제547화
감각 장치의 오류는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로서 수치화된 자료가 머릿속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가하란.
유토니아의 목소리가 경고처럼 들려왔다.
유단처럼 인간의 형태를 한 마수인가? 그렇다고 해도 조금 전 확인한 마나 밀도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숫자였다.
가하란은 인지 통합으로 묶인 세 대의 거병을 한 곳으로 모았다.
피아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상황.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남자가 검을 툭 털며 걸어왔다.
그때였다. 쉼 없이 전해지던 경고들이 한순간 사라졌다.
이해 불가 영역으로 치달았던 마나 밀도도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관측된 모든 정보가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이.
“유토니아, 방금 기록된 수치 재확인해 줘.”
-측정기에 오류는 없었어요. 마나 간섭이 일어날 정도의 뿌리 활동도 없었고요.
마나 폭발을 일으키고도 남을 방대한 마나가 한순간 사라졌다.
“마나의 이동 경로는?”
-관측되지 않았어요.
유토니아가 내놓은 대답이 가하란을 혼란으로 이끌었다. 마나는 소모하든, 형태를 바꿔 방출하든 반드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크기가 클수록, 밀도가 높을수록 마나의 이동 경로는 탐색하기 쉬워진다.
그런데 코앞에서 그걸 놓쳤다?
생각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인가, 아니면 마수인가.
“신분을 밝혀주시죠.”
가하란이 목소리를 냈다. 현장에 있었다면 착안으로 확인했을 텐데.
다가오던 남자가 멈춰 섰다. 턱을 들고 앞을 바라본다.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너저분하게 난 수염.
“목소리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남자가 말했다. 정확한 어휘를 구사하는 걸 보면 인간일 확률이 높았으나, 유단의 사례도 있으니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신분이라고 밝힐 만한 게 마땅히 없지만, 그래도 랜더라고 하면 기억하려나?”
남자가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눈이 보였다. 고요한 눈이었다.
단숨에 과거로 날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그저 테리와 제니랑 노는 게 즐거웠던 시절.
그때 만났던 사람.
산페르가 호기심을 보이고 나아가 경계했던 사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처했다. 눈앞의 랜더는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10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생김새에 변화가 없다는 점이었다.
한 번 본 얼굴은 잊지 않는다.
주름의 형태와 개수도 기억할 정도였다.
하지만 랜더의 얼굴은 단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엄정한 시간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예전에 알던 사람을 만나면 여러모로 난처해지지. 설명하자니 길고 안 하자니 상대가 어려워하고.”
“조금 놀라서 그랬습니다. 들은 게 있으니 설명은 따로 안 하셔도 됩니다.”
이제는 알고 있다.
랜더라는 가명 뒤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그제야 계측 오류처럼 보이던 막대한 숫자들이 이해됐다.
한때 운명이라 불리던 창조주의 규율. 그 규율을 없애버린 장본인.
제자리에서 맴돌던 인류사를 다시금 나아가게 만든 사람.
“아, 그러고 보니 아르드헨이 협회 가입을 권유했다고 하던데.”
“예전에 제안을 받았었죠.”
“같이하기로 했나?”
“아니요. 당시에는 확답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기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거든요.”
랜더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귀찮은 곳이니까 거절해.”
몸을 틀어 둔을 덮은 반구체를 바라보는 랜더였다.
“난해해 보이는데, 해결할 방법은 찾았나?”
“아니요.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는데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치우는 건 간단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치우는 건 간단하다?
랜더가 다시금 거병을 올려다봤다.
“날 이용할 방법은? 이건 내 분야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켈트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신의 작품도 둔을 뒤덮은 위상에 간섭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라면, 고정된 섭리조차 바꿔버린 이 사람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시도하지 못한 방법이 하나 있어요.”
“일단 그쪽으로 가야겠네.”
“안내하겠습니다.”
시야가 바뀌었다. 거병과 공유하던 시각을 끊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유토니아, 랜더 씨를 이쪽으로 모셔 와 줘.”
-괜찮을까요? 제 안에 기록된 숫자만 보면 이 남성은 잔뿌리와 다를 바 없어요. 문제를 일으키면 한순간에 모든 게 다 사라질 거예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박스 밖으로 나와 엔엔에게 소식을 전했다. 랜더가 온다고 말하니 맹한 표정을 짓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할 게 있어요.”
엔엔과 함께 반구체 앞까지 다가갔다. 변함이 없는 회색빛 막. 손을 가져다 댔다. 저항감 없이 안쪽으로 손이 쑥 들어갔다.
“어쩔 생각이에요?”
엔엔이 질문했다.
가하란은 착안을 열었다. 주변 모든 것이 서서히 점으로 변해갔으나 둔을 감싼 반구체는 형태를 유지했다.
“올.”
-듣고 있어요.
“내가 있는 좌표로 위상 균열을 열어줘.”
-이미 시도해 봤잖아요. 경계면을 생성하기 어려워요.
“재차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알겠어요. 켈트가 잠들었으니 위상 균열을 생성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엔엔에게 물러서라는 신호를 준 후 기다렸다. 몇 분 후 올이 말했다.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하늘석을 바라봤다. 전송탑이 모은 마나가 중앙부로 옮겨지고 있었다.
이윽고 하늘을 향해 잔가지처럼 뻗어 있던 비트의 줄기들이 한데 뭉쳐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주황색 비트가 회색 장막에 닿는 순간 비트가 수천 가닥으로 나뉘었다. 반구체를 가로지르는 빛도 있었고, 표면을 타고 흐르는 빛도 있었다.
-여전히 좌표를 특정하는 건 불가능해요. 이 상태로 경계면을 넘게 되면 가하란은 엉뚱한 곳에 도착하게 될 거예요.
“일단 멈춰줘.”
비트가 사라졌다.
가하란은 착안을 닫고 둔을 바라봤다.
좌표를 고정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유도한 비트가 갈라져 버렸다. 거대한 반구체에 휩싸인 둔은 하나의 위상이 아닌, 셀 수 없이 많은 위상의 집합체일 수도 있었다.
마법사들은 말했다. 인간은 모두 다른 심상 세계를 소유했고, 심상 세계의 수만큼 마법이 존재한다고.
어쩌면 사람의 내면 또한 위상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비트가 갈린 것도 설명이 된다. 수천, 수만의 사람에게 비트가 반응해 경계면이 열리는 거니까.
명백해 보이던 공간이란 개념이 난해해지기 시작했다.
유단은 둔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마법을 부린 걸까? 둔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비트가 갈라진 수만큼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실제로 둔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상 세계가 모두 구현화 됐다면…… 지금 둔 안은 어떤 모습인 걸까?
나아가 구현된 심상 세계로 유단은 무엇을 하려는 걸까?
가하란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름 모를 벌레가 사마귀의 머리를 입에 문 채 땅 밑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엔엔 님.”
“네.”
“마법은 마나를 통한 심상 세계의 발현이었죠?”
“보통은 그렇게 말하죠.”
“물질을 생성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몇몇 특수한 마법사들은 만들어 낼 수 있죠. 하지만 일시적이에요. 마나는 언제나 자연 상태로 돌아가려 하죠. 만들어진 물질 역시 똑같아요. 흩어지죠.”
“온전한 형태로 만들어 고정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나요?”
“인간이란 형태를 만드는 거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태일 뿐이에요.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그냥 고깃덩이죠. 게다가 고정하는 건 불가능해요. 지속해서 마나를 공급한다고 해도 마나의 불확실성이 고정된 형태를 파괴하니까요.”
“그럼에도 가능하다면요?”
엔엔이 눈을 찌푸렸다.
“형태를 구축하는 건, 그래요. 사고 실험의 영역에서 가능할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죽은 사람을 되살렸다고 볼 수 없어요. 정교하게 만든 인형일 뿐이니까요.”
“영혼의 존재 여부.”
가하란은 둔을 덮은 반구체를 올려다봤다.
거대한 위상.
각기 구현된 인간의 심상 세계.
“영혼 세계 역시 하나의 위상으로 취급할 수 있겠죠?”
“……모르겠어요. 영혼 세계의 실체는 확인됐으나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해요. 영원히 이어지는 초록 눈도 그곳을 엿볼 뿐, 이해하지 못해요. 초록 눈조차 그곳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멋대로 들여다본 대가를 치렀고요.”
가하란은 유단을, 아니, 로키의 집념을 떠올렸다. 몸을 탐하고 언제나 줄리어스만 바라보는 그를 생각했다.
아직은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로키라면, 거짓을 발견한 창조적 기계라면 도달하지 않았을까?
“에너지를 물질로 치환할 수 있다면, 치환한 물질 안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가하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엔엔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올 때였다.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유토니아가 조종 중인 거병과 함께 랜더가 도착했다.
가하란은 반사적으로 착안을 열었다. 모든 걸 올바르게 보는 눈이 랜더를 직시했다.
변한다. 형태가 흐트러지고 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힘의 파동은 없었다. 잔잔했다. 한 명의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눈이 알려주고 있었다.
신에게서 미래를 이어받은 특별한 사람. 하늘석처럼, 켈트처럼 착안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랜더는 튀는 것도, 모자란 것도 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인식됐다.
랜더가 다가왔다. 가하란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랜더가 내민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릴 때처럼 목말을 태울 순 없으니까.”
안도감이 이는 목소리였다. 급박한 현실의 문제가 잠시 잊힐 정도였다.
옅게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애들은 정말 금방 크는구나.”
“10년이 넘었으니까요. 애도 아니고요.”
랜더가 미소를 지었다.
“오면서 칼리고 씨한테 대충 들었다. 너도 무사히 돌아왔고, 밀레나 양도 원하는 걸 찾았고. 이제 이것만 해결하면 한숨 돌려도 되는 걸까?”
랜더가 반구체를 바라봤다.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난 그다지 아는 게 없어. 주변에서는 날 통달한 구도자처럼 대하지만, 난 검을 조금 잘 쓰는 퇴역 군인일 뿐이니까.”
검이 검집에서 부드럽게 뽑혀 나왔다.
“난 복잡한 걸 좋아하지 않아. 지름길이 있으면 언제나 지름길을 선호하지.”
랜더의 검이 장막을 찔렀다.
변화는 없었다. 검신이 부드럽게 장막 안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음, 벨 수는 있어.”
“정말인가요?”
“없애는 건 쉽지. 그런데 그 이후에 뭐가 벌어질지는 알 수 없어. 이게 ‘틈’이라면 대책이 필요해.”
랜더가 한 걸음 물러섰다.
“살짝만 갈라볼게. 안이 어떤 상황인지 보일 수도 있으니까.”
왼발이 반보 나아갔다. 오른손에 든 검을 느슨하게 늘어트렸을 때였다.
양쪽 착안이 움찔댔다. 산페르의 본체와 마주했을 때처럼, 용의 그림자와 만났을 때처럼 두 눈이 제멋대로 열렸다.
“…….”
마나였다.
인간은 사라지고 그곳에 남아 있는 건 마나뿐이었다.
달아오르는 착안으로 마나의 이동을 살폈다. 하늘에서, 바닥에서, 전방위에서 마나가 몰려들고 있었다.
힘, 변화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점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뿌옇게 변한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더니 이내 눈앞에 어떤 형태가 나타났다.
거병이었다.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거병이었다. 크기는 하늘에 닿을 것처럼, 아니, 하늘을 통과해 저 먼 우주에 닿아 있는 것처럼 컸다.
착안은 열려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런 게 보인다는 건…….
한순간 거병이 사라졌다.
세계가 본래 형태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선으로 그어지고 있는 랜더의 검이었다.
부드럽게 나아간 검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부를 꽁꽁 감추던 회백색 반구체가 검의 궤적을 따라 갈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