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6화
-우산이 좋아. 왜 좋냐고 물으면 마땅히 할 말은 없지만, 우산이 좋아. 넌 우산이 싫어? 싫어하지 마. 우산은 좋은 거야. 왜 좋은지 알아? 우산은 말이야…….
왼쪽에서는 우산이, 오른쪽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음이, 머리 위쪽에서는 잎사귀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정신을 흐리멍덩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멍청하게 있으면 휩쓸려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
입이 벌어지며 목소리가 나왔다.
정신을 다잡기 위한 채찍질과 비슷했다. 입으로 소리 내는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백여 개의 상담실이 가동 중이었다.
각 상담실 안에는 온갖 것들이 들어앉아 있었다. 공통점은 단 하나. 정령이라는 것뿐.
가상의 상담실은 오토마타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구조였다. 전장에서 가동 중인 ‘로트’ 안에 각 정령이 녹아들어 있었다.
정령이 작전 수행을 도와주는 건 아니었다. 거병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건 유토니아가 통합 관리하는 오토마타였다.
-가하란. 맥박이 올라가고 있어요.
유토니아의 목소리였다.
“19번까지 연결을 잠시 끊을게. 그쪽은 사슴님이 담당할 수 있으니까.”
보이지 않는 혹이 뚝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아직은 순조로워요. 정령을 사용한 에너지 이동도 유의미한 수치를 내고 있고요.
가하란은 우측 가시화 패드를 살폈다. 다중 코어 온도는 정상. 미니 비트 연결성도 괜찮았다.
-정령들이 말을 잘 들어 주던가요?
“지금까지는 우호적이야.”
-싫증이 나서 안원으로 돌아가는 정령도 분명 생길 거예요.
“안 그래도 83번이 불안해. 자극을 원했는데 막상 자극을 받으니 기분이 안 좋다고 하네.”
말을 내뱉는 사이 83번과 연결이 끊겼다. 인지 통합이 강제적으로 해제되며 거병이 멈췄다.
가하란은 왼손 검지를 한 번, 중지를 세 번, 그다음 오른손 중지를 세 번 까닥거렸다. 신체 행동을 추가하는 것으로 머릿속 분류 작업이 수월해진다.
브라인을 보고 배운 것이다.
정령의 부재로 행동을 멈춘 로트의 제어권을 가져왔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공유됐다.
눈앞으로 마수가 달려드는 중이었다. 도끼로 몸통을 베어버린 후 이탈했다.
마수와 대적하는 순간에도 각기 나뉜 작은 가하란들이 상담실에서 문제를 해결 중이었다.
가하란은 손을 들어 올려 미간을 꾹 눌렀다. 개발 단계에서 수없이 동작 테스트하며 익숙해졌다고 여겼는데, 실전에서 사용하니 피로도가 급상승했다.
-완전 독립화가 가능할까요?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수가 보이질 않네. 처음 해피를 만들었을 땐 크기를 키워도 미니 비트로 커버될 줄 알았는데, 너무 얕봤나 봐.”
3m 이상의 거병은 사고체의 도움 없이는 기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베이스 아키텍처의 심층 레벨 해석이 끝나면 방법이 생길 것도 같지만, 너무나도 먼 얘기였다.
갤리온처럼 단순화한다면 사고체 없이도 운용이 가능하지만, 일정 수준의 퍼포먼스를 내려면 정령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고체로 인간이 아닌 정령을 쓰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요. 그들의 특수한 힘도 끌어다 쓸 수 있고. 하지만 사슴 같은 특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에게 온전히 거병을 맡길 순 없어요.
“위험하긴 하지. 정령과 우리는 목표하는 바도, 삶을 바라보는 형태도 다르니까.”
지금도 사고체로서, 기동에 필요한 하나의 부품으로서 정령과 가계약을 맺은 것이다.
몇몇 정령이 제어권을 넘겨달라고 했으나 거절한 상태였다. 날뛰다가 인명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
신호가 들어왔다. 77번이었다.
풍경이 바뀌었다. 거병이 마수 사체에 머리를 박은 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왜 입이 없어? 못 먹는 거야?
“못 먹어요.”
-그래?
정령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제어권을 유토니아가 쥐고 있지만 미니 비트가 단절되면 오토마타는 정령의 명령을 우선시했다.
개선해야 할 부분이었다.
미흡한 시스템이라 사람과 공동 전선을 짤 수 없었다. 갑자기 돌변해서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사람이 없는 곳, 마수만 득실거리는 곳이 데이터를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아버지.
닥이었다. 여분의 신체가 없기에 여전히 E30에 코어를 싣고 다니는 중이었다.
-배쉬플이 가져온 정보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영상 자료였다. 중간중간 손실이 생겨 알아볼 수 없는 화면도 있었으나, 배쉬플이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인간형 마수.
“유단.”
가하란은 제어 가능한 모든 거병을 유단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갑작스러운 마수의 출현도 유단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해더 트럭을 동원해 지원 장비를 옮겼다. 후퇴 중인 연합 전선의 거병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한 후 전열을 갖췄다.
저 멀리 마수를 병사처럼 거느린 유단이 나타났다.
인간의 외형을 고집하는 건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감의 발로일까.
유단 역시 하루 이틀 내로 다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동정심이 일 만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어줄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앞에 있는 건 처리해야 할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유토니아.”
-사격 준비 끝냈어요.
“최대한 빠르게 정리할 거야.”
-신속 정확, 전 그 말이 가장 좋더라고요.
* * *
가증스러운 마법 공학 병기.
벨틴이란 것의 약점은 알고 있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속도를 높이면 쓸모없는 쇳덩이로 만들 수 있었다.
이미 몇 차례 검증도 마쳤다.
쓸모없는 나약한 개체를 몇 마리 던져주면 끝. 붉게 달아오른 포신을 향해 달려들면 거병은 아무것도 못 하고 쓰러졌다.
벨틴뿐만 아니라 마나 증발 현상 역시 대비를 끝마쳤다.
마나 증발을 일으키려면 특수한 장비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야 한다.
게웰의 아이들이, 접경 지역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이 모아온 정보였다.
실패는 한 번이면 족했다.
둔으로 진입하기 전 광범위한 탐색 작업을 끝마쳤다. 그 어디에도 끔찍한 마법 공학 장치는 없었다.
마나를 증발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복잡한 사전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준비된 게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 돌진을 명령했다. 둔을 탐내는, 지성을 갖춘 다른 마수들도 동시에 움직여 줬다.
전투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인간들이 저항했으나 저지선은 계속 뚫렸다.
유단은 죽어가는 인간들보다 시체 너머에 있는 둔에게 이끌렸다.
처음에는 몸을 되찾겠다는 욕망에 움직였다. 되찾고 나서 찢어 죽이겠다는 욕구에 충실했다.
하지만 둔에 가까워질수록 몸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에 있는 건 모든 걸 실현할 에너지였다. 인간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유단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저걸 손에 넣으면 모든 게 이루어진다.
반걸음이었다.
반걸음만 더 내디디면 채울 수 없던 갈증이 해소될 것이었다.
“이 개좆같은 새끼가!”
강렬한 빛이 오른쪽을 휩쓸고 지나갔다. 공포와 현혹, 협상으로 이끌고 온 나의 군대가 지랄 맞은 사격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렇게 흘러가선 안 될 일이었다.
군사가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방출을 마치면 무능력한 쇳덩이가 되어야 할 무기가 끝없이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사나운 마나가 모든 걸 할퀴며 지나갔다. 저항할 수단은 없었다. 피해야 하는데, 지능이 낮은 마수들은 그저 달려들기만 할 뿐이었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은 사선으로 움직이며 빛을 피했지만, 이어진 공격에 어김없이 당해야 했다.
수십 가닥으로 갈라져 나오는 가시화된 마나라니.
억울했다. 정말 눈물이 나도록 억울했다. 잔혹한 신은 왜 저놈에게 저런 능력을 부여한 것인가?
“이번엔 안 되겠네. 우린 이만 돌아갈게.”
유단은 잘 있으라는 말과 함께 날개를 펴는 마수를 바라봤다. 손을 내밀어 날개를 찢었다.
비명을 들으며 이빨로 놈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단단한 뼈가 거슬렸지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열 내지 말고 다음에 해. 제법 즐거웠잖아?”
다른 마수가 낄낄 웃으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래, 애초에 저것들은 도움이 안 된다. 향상심 따윈 없는, 그저 쾌락만이 존재 이유인 쓰레기들.
나는 다르다.
인간의 지성에 뛰어난 육체를 지니고 있다.
왜 저 모자란 인간들에게 ‘인간’이란 호칭을 부여해야 하는 걸까?
한계를 넘어선 나야말로 ‘인간’에 부합한 새로운 종일 텐데.
고함을 치며 달려 나갔다.
앞을 막는 거병의 팔을 발로 차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거병의 팔이 뒤틀렸다. 거병이 쥐고 있던 도끼를 빼앗았다.
양팔로는 부족하다. 어깨에서 팔을 두 쌍 더 뽑아냈다. 여섯 개의 팔로 두 자루의 도끼를 나눠 쥐었다.
“내가 하면 돼.”
할 수 있다.
힘이 충만했다. 쇳덩이들을 모두 갈라버리고 그 뒤에 있을 가하란을 처죽인 후 둔으로 들어간다.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하하하, 전투의 희열에 웃음이 나왔다. 게웰이 없어도 해낼 수 있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몸으로, 축적해 놓은 에너지로 눈앞의 적들을 모두…….
어?
몸이 기우뚱거렸다.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하반신이 사라졌다. 지면을 딛고 있어야 할 다리 대신 하얀색 창이 보였다.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날아오는 창이 보였다.
유단은 몸을 축소했다. 쥐고 있던 거병 도끼가 땅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콰강!
거병이 투척한 창이 지면에 틀어박혔다. 유단은 헛숨을 토해내며 남은 팔로 바닥을 긁었다.
몸이 재생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쐐애액!
이동 방향으로 다시금 창이 날라왔다. 유단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틀었다.
몸을 날린 자리에 거병의 발이 내려오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이상한 일이었다.
거병들의 반응 속도가 갑자기 빨라졌다.
아니, 그것보다 더 문제인 건.
촤악!
어깨가 떨어져 나갔다. 유단은 비명을 참아내며 다시 뛰었다.
읽히고 있다. 모든 행동이 예측 가능하다는 듯이 거병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골목으로 몰린 기분이었다. 사냥당할 수밖에 없는 초식 동물의 비애 같은 게 느껴졌다.
몸을 더 작게 만들어야 해.
눈앞에 균열이 보였다. 저기까지만 가면…….
-형, 이제 그만 하자.
거병 한 기가 균열을 가로막고 있었다.
역겨운 목소리에 정신을 빼앗길 뻔했으나 유단은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다.
늘어트린 검과 오래된 망토. 보아하니 패닉에 빠진 인간 같았다.
인질로 잡을 수만 있다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오늘은 운이 안 따랐을 뿐이다.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만반의 준비를 다 했지만, 신이 저놈을 어여삐 여겨 일어난 불운이었다.
한 번 더,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잡으면 가하란을 죽일 수 있다. 나아가 몸을 빼앗은 로키도 부숴버릴 수 있다.
인질을 잡으면 공격하지 못한다.
인간의 조잡한 도덕관을 유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나를 분사해 먼지를 일으켰다. 흩어진 흙먼지와 마나가 적의 시각 장치와 탐색기를 마비시킬 것이다.
포위를 빠져나왔다.
코앞에 인간이 있었다.
잔인한 신이 마침내 미소를 한 번 보여 주는구나!
하지만 인간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무언가 잘못됐음을 감지했다. 시야가 나뉘었다. 아니, 나뉘고 있는 건 내 몸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유단은 떨어져 나가는 몸의 절반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 * *
가하란은 한 줌의 액체로 녹아버린 유단을 바라보다가, 그 앞에 선 남자를 응시했다.
감각 확장을 9단계로 올리고, 직접 제어하는 기체의 수를 세 대로 낮춘 상황이라 받아들이는 정보의 품질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상태였다.
주변 모든 것을 감각하고 전해주는 장치들이 입을 모아 외치고 있었다.
저 앞에 있는 건 인간이 아니라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