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후벨은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며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마수 사체가 내뿜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정면을 바라봤다. 균열 너머에서 서성거리던 마수들이 일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마수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동력원을 잃은 거병에서 뛰어내린 후 뒤를 돌아봤다.
유단 학회장의 얼굴을 한 인간형 마수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거병의 외관을 살펴봤다. 연합 전선에 소속된 거병이 아니었다. 식별 표식도 없었고.
“석주인가.”
후벨은 검을 뽑아 든 다음 신체술을 사용했다. 생로를 찾아야 했다.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재빨리 왼발을 뗐다. 앞으로 튀어나온 작은 마수를 벤 후 일직선으로 뛰었다.
왼쪽에는 마수 떼가, 오른쪽에는 인간형 마수와 소속 불명의 거병이 있었다.
촤아악!
마수 몇 마리가 방향을 틀어 따라오기 시작했다.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속도를 더 올리고 싶었으나 발목이 잡혔다. 후벨은 나무를 등지고 섰다.
들소 크기의 마수들이 온몸을 던져왔다.
쿵!
마수의 안면이 굵직한 나무에 틀어박혔다. 검으로 노출된 목 뒷부분을 그어버리고 거리를 벌렸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어림잡아 열 마리 이상이 쫓아오고 있었다.
지면을 차던 오른쪽 다리에 이상이 생겼다. 신체술을 사용한 대가가 찾아오고 있었다.
반동을 억제하며 뒤돌아섰다.
기어이 따라온 마수가 일곱.
둘 정도는 잡을 수 있으나, 나머지는 힘들었다.
행운은 한 번뿐인가.
호흡을 가다듬고 전투를 준비할 때였다. 마수들이 고개를 쳐들더니 동시에 몸을 틀었다.
마수가 멀어져 간다. 먹잇감을 앞에 두고도 포기한 걸 보면…….
“하아, 하아.”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단을 닮은 마수가 명령을 내린 듯했다.
대체 무엇일까?
유단 학회장과 닮은 마수라니. 인간의 말을 사용하고,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마수.
“통솔력까지 갖춘 그놈이 도시에서 날뛴다면…….”
재앙이 따로 없었다.
눈앞이 흐려진다. 회복되려면 몇 분이 걸릴까.
몸 상태도 걱정이지만 후퇴한 부하들과 본대의 상태 역시 신경 쓰였다.
다수의 거병이 있다고 한들 마수가 끝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처리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인간형 마수를 제거하는 것.
통솔력을 발휘하는 기이한 마수를 처리하면 다른 마수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흩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구심점을 잃으면 각개 격파할 수 있으니 수월해지고.
덜덜 떨리는 오른손으로 신호탄을 뽑아 들었다. 단거리 통신망이 확립된 시대라고 하지만, 이렇게 사고가 나면 구시대적 방법이 필요해진다.
붉은색 연기를 뿜어내며 치솟은 신호탄이 밝게 빛을 냈다.
특수한 마수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
본대가 확인했다면 관측병의 상황 보고를 토대로 대책을 강구하리라.
생각을 정리하며 몸 상태를 확인할 때였다.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길게 자란 잡초를 헤치며 마수가 나타났다.
뱀의 형태인데 몸통으로 기는 게 아니라 길게 돋아난 팔로 걷고 있었다.
주둥이가 쫙 벌어지며 무언가를 토해냈다. 후벨은 온 힘을 다해 옆으로 쓰러졌다. 일어서서 대피할 기력조차 없었기에 쓰러지는 게 최선이었다.
콰득!
기대고 있던 나무에 무언가가 틀어박혔다. 자세히 보니 두개골이었다.
마수의 몸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주둥이가 또다시 벌어졌다. 차라리 접근해 온다면 발악이라도 해볼 텐데, 놈은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지 제자리를 사수했다.
온다.
이젠 피할 여력도 없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놈을 노려보던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푸욱!
마수의 대가리가 돌아갔다. 대가리에 꽂힌 긴 화살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괴성을 지르며 마수가 몸을 트는 사이 또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지면에 닿아 있는 팔이었다.
몸을 지탱하던 팔이 꿰뚫리자 마수가 기우뚱거렸다.
후벨이 활의 주인을 찾아 눈동자를 굴리는 순간 다시금 화살이 날아왔다.
혀를 내두를 만한 연속 사격이었다. 마수의 가죽을 뚫는 화살. 시위의 장력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런 활을 이 정도 속도로 쏜다?
푹, 푹!
날아온 화살이 마수의 안면에 틀어박혔다. 정교한 실력이었다. 마수가 몸부림치고 있는데 화살이 빗나가질 않았다.
쿵 소리와 함께 마수가 꼬꾸라졌다. 몸통에 화살 네 개가 틀어박힌 직후였다.
후벨은 줄줄 흘러나온 체액을 바라보다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장궁을 어깨에 멘 채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안심하라는 듯 눈길을 준 다음 마수 사체로 다가갔다.
남자의 단검이 다시금 마수 머리를 관통했다. 축 늘어져 있던 마수가 꿈틀거리며 팔을 휘저었다.
남자는 뒤로 훌쩍 물러서서 시위를 당겼다. 정면에서 쏜 화살이 아찔한 소리와 함께 날아가 마수의 몸통을 꿰뚫고 뒤로 튀어나왔다.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남자가 말했다.
“도와주신 덕분에 괜찮소.”
남자의 손을 붙잡고 일어섰다. 몸을 뒤흔들던 반동이 사라지고 있었다. 마나가 자연 상태로 흩어지며 위축됐던 신경도 돌아왔다.
“난리도 아니군요.”
남자가 숲 바깥을 보며 말했다. 마수들이 여전히 날뛰고 있었다.
“보아하니 사냥꾼 같은데, 여긴 위험 지역이니 휘말리기 싫으면 빨리 벗어나시오.”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군요. 일이란 게 참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어요.”
“일이라니…….”
후벨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남자가 눈을 찡그리며 활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 공간을 향해 시위를 잰 남자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 순식간에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화살이었다.
“뭐가 많이 오는군요.”
“대체 뭘 본 겁니까?”
“저 밖에서 날아오는 게 있었어요. 가까이 오면 문제 될 것 같아서 쏴서 떨어트렸죠.”
농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력이 뛰어난 건 알겠으나 그래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거요.”
후벨은 검을 챙긴 후 본대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서둘러 합류해야 했다.
전력이 한참 부족할 텐데 혼자서 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몇 걸음 걷다가 나무뿌리를 밟고 비틀거렸다.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남자가 다가와 팔을 붙들어 줬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군 장관급인 거 같은데.”
“맞소.”
“어쩌다 혼자 여기에 떨어진 거요?”
“일이 재수 없게 꼬였소.”
어쩌다 보니 남자와 함께 숲 밖으로 나왔다.
훤히 트인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건, 수십 대의 거병이 마수를 찢어발기는 장면이었다.
콰가가강!
방사형으로 뿜어진 빛이 사방에서 달려들던 마수를 쓸어버렸다.
오물을 물에 씻어버리듯, 아주 말끔하게 처리해 버렸다.
남은 거라고는 검게 타들어 간 대지와 지글지글 익어버린 살점뿐.
후벨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저런 병기가 존재한다고?
다시금 빛이 뿜어졌다.
순간 출력이 몇이나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강력한 에너지였다.
마나 파장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마나 방출 한 번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잿더미가 돼 사라지고 있었다.
“세상이 참 빠르게 변해요, 그렇죠?”
남자가 말했다.
상식을 초월한 마나 병기를 목격했음에도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문외한이라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벨은 알고 있었다.
벨틴의 운영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그걸 지원하기 위한 필수 자원이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하지만 벨틴과 유사해 보이는 저 무기는 방출을 끝마친 다음 복잡한 방열 작업이나, 카트리지 교체 없이 재사격에 돌입했다.
고밀도 마나 무기를 연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게다가 광범위한 범위로?
첨단 마법 공학 무기를 가장 먼저 접하는 군에서조차 실현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방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줄에 선 거병들은 양날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한쪽 도끼날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날에 닿은 마수의 살점은 타들어 가다 못해 녹아내렸다. 마수의 가죽뿐만 아니라 도끼날에 스친 땅조차 주홍빛으로 끓었다.
거병은 마전기를 끝없이 소모한다. 그렇기에 마전기를 이용한 병기를 운용하기 어려웠다.
가동 시간에 중점을 두는 게 생존과 전투, 양측에서 득이 되니까.
공학자들은 말했다.
‘언젠가’ 배터리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마전기를 이용한 병기 사용이 가능해질 거라고.
공학자들이 말한 그 ‘언젠가’가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후벨은 검을 늘어트리고 전투를 응시했다.
경이로웠다. 현세대를 앞서나간 마법 공학은 저런 게 가능하단 것인가?
오십 대가 넘는 거병.
지상으로 이동해 접근했다면 관측병 시야에 잡혀 보고가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된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하늘석이 거대한 격납고 역할을 하고 있다.
하늘석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병기였다. 정밀 타격은 불가능하겠지만 돌덩이로 주요 시설을 뭉개버리면 도시 함락은 하루 이틀이면 가능할 것이었다.
그런 하늘석 안에서 거병이 튀어나온다? 고밀도 마나 병기로 무장한 거병이?
“……누가 저걸 막을 수 있다는 건가.”
석주가 공포 정치를 펼친다면 어느 도시가 저항할 수 있을까?
석주는 중재자를 표방한다고 했으나 사람 일이라는 게 언제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법이었다.
이성 없이 날뛰는 마수와 이성으로 무장한 공중 병기.
무엇이 더 위험한지는 코흘리개 애도 알 것이다.
후벨은 혼란스러웠다.
둔 사태가 마무리 지어진 다음, 동부의 판도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예측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빨리 좀 오게. 사람이 점점 굼떠지는 거 같아.”
옆에 서 있는 남자가 외쳤다.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 부르는 것일까?
후벨은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서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여행해 왔는지 걸친 망토에는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저게 그 아이가 다루는 물건일까요?”
후드를 쓴 남자가 말했다.
“정황상 그런 것 같네. 얼추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지. 아르드헨이 왜 그렇게 탐냈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군.”
아르드헨?
아르드헨 의원을 말하는 걸까.
후드를 눌러쓴 남자가 장검을 뽑은 채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검병은 낡았으나 검신은 잘 정비돼 있었다. 기름을 잘 먹여 윤이 도는 날.
워낙 자연스러운 걸음이라 후벨은 멍하게 바라봤다. 마수 사체가 즐비하고, 여전히 살아 날뛰는 마수가 수북한 그곳으로 남자는 걸어갔다.
“이, 이봐!”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불렀다. 후드를 쓴 남자가 뒤돌아섰다.
후드를 들추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얼굴이 드러났다. 이발도 한참 안 했는지 머리카락이 개털처럼 부스스했다.
너저분한 몰골이었으나 후벨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입이 살짝 벌어졌다.
기억 밑바닥에 저 얼굴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
“……대장?”
“후벨. 멋지게 늙고 싶다더니 그렇게 됐네. 애들은?”
“자, 잘 지냅니다.”
수십 년에 달하는 시간의 공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길바닥에서 밀리언이 한 밥을 나눠 먹고, 지겹게 마수를 사냥하던 그 옛날이 눈앞에 훅 드리워졌다.
대장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다는 얘기는 들었었다.
아니, 살아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한 번 죽었다가 제국의 영웅으로 재차 되살아났다는 소식까지 들었었다.
그럼 그렇지, 쉽게 죽을 양반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몇 번 찾아가 보려 했으나 그라운드 제로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었다.
“어디 계셨습니까?”
후벨이 물었다.
대장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예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후벨은 하, 하고 웃고 말았다.
긴장감이 사라졌다.
눈앞에 마수 수백 마리가 날뛴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저 사람이 있는 곳에 위험 지대란 없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