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4화
두 팔과 두 다리로 지면을 긁으며 뛰어나가던 거병이 거친 쇳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헤리븐은 긴장한 채 앞에 선 거병을 바라봤다.
4m 크기의 거병. 검은 외장갑에 특수한 도료를 발랐는지 연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시각 장치가 모여 있을 머리 부분이 좌우로 삐걱거리더니 이내 똑바로 세워졌다.
“석주입니까?”
헤리븐이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대답하던 도중에 거병이 어깨를 들썩이더니 땅바닥에 양손을 댔다. 끼긱, 쇠 맞물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뭔가 잘못된 게 확실해 보였다.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믿어도 되는 걸까?
헤리븐은 마수들 사이에서 날뛰는 다른 거병을 바라봤다.
무기도 없이 손으로 마수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사냥용 도끼를 사용하면 더 효율적일 텐데, 저들은 왜 마수의 이빨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해 굳이 맨손으로 박투를 벌이는 걸까?
자세히 보니 손이 아니라 머리로 들이받는 거병도 있었다. 시각 장치가 모여 있는 중요 모듈이라 보호하며 싸우는 게 일반적인데…….
하나같이 이상했다.
탑승자들의 정신 상태가 우려될 정도였다.
쿠구궁!
거대한 마수에게 치인 거병 한 기가 나무에 처박혔다. 팔이 한쪽 떨어져 나간 상태. 전투가 불가능해 보였으나 거병이 몸을 튕겨 일어서더니 그대로 마수에게 달려들었다.
떨어진 팔을 마수 안면에 꽂아 넣는 거병. 기괴한 싸움이었다. 인간과 마수의 전투가 맞는 걸까?
-전술적으로 합을 맞추는 건 힘들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거병이 놓친 마수를 처리해 주세요.
석주가 말하는 동안 또 다른 거병이 마수에게 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굉음과 함께 지면에 처박힌 거병이 파르르 떨면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체임버를 덮은 외장갑이 쿵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저, 저기!”
마법사 중 하나가 비명에 가깝게 소리쳤다. 헤리븐 역시 거병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외장갑이 벗겨지며 체임버 덮개가 반쯤 벌어졌다. 내부가 드러났는데, 안에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거병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대체 저게 무엇입니까?”
불가해한 물건이었다. 마수보다 저게 더 위험해 보였다. 마법 공학을 깊게 이해한 건 아니었으나 불변의 진리는 알고 있었다.
거병은 사람의 형태에 따라 만들어야 하며, 인간을 태우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
대원칙이었다.
바뀔 수 없는 원칙이라고 배워왔는데 눈앞에 예외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열이 넘게.
-기회가 된다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마수를 막아내는 것에 집중하죠.
석주의 목소리를 내던 거병이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헤리븐은 손을 뻗어 다른 마법사들을 물러서게 했다.
거병이 주변을 훑다가 이내 마수를 향해 뛰어갔다.
“마스터 헤리븐.”
“……일단 석주의 말대로 마수 처리에 온 힘을 다합시다.”
헤리븐은 하늘석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석주는 대체 무얼 만들었고, 또 얼마나 보유한 것일까.
석주는 말했었다.
학회장이 보유한 기술에는 관심이 없다고.
좌중을 설득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니었다.
정말로 필요 없는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은 진형을 갖추게.”
짐승처럼 움직이는 거병들을 뒤로한 채 둔으로 접근하는 마수들이 나타났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하네!”
얼마 남지 않은 물리 타격용 스크롤을 들며 외쳤다.
* * *
“거창!”
거병이 돌격용 창을 들어 올렸다. 일렬로 늘어선 다른 거병들도 창을 움켜쥐었다.
100m 전방에 마수들이 나타났다.
크기가 작은 것들이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뒤를 따라 거대한 마수가 기어 오는 중이었다.
길목에 난 폭 3m의 균열을 눈여겨봤다. 몇몇 마수는 뛰어넘었으나 대부분의 마수는 균열을 끼고 돌았다.
지금이다.
돌격 신호를 내리며 전진했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균열을 뛰어넘은 소형 마수가 타격 대상이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줄어들었다.
마수들이 진군하는 거병을 향해 달려들었다. 전술이라고는 머리에 없는 무능한 짐승들.
콰직!
창이 마수를 꿰뚫었다. 마수의 사체가 창에 꿰여 축 늘어졌다.
대열을 유지한 채 균열 왼쪽으로 이동했다. 돌격용 창을 던져버리고 사냥용 도끼를 꺼내 들었다.
합을 맞춘 대로 셋씩 산개해 마수를 제거했다.
정예라 불러도 모자람 없는 부하들은 정확하게 마수의 다리를 베었다. 팔로 이동하는 놈이 있다면 팔을, 작은 날개를 퍼덕이는 놈이 있다면 날개를.
체액을 쏟아내는 마수를 향해 다른 마수들이 뛰어들었다.
냄새를 맡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피아 식별조차 못 하는 놈들이었다.
사체를 뜯어먹는 마수를 지켜보다 보면 무리에서 빠져나와 행동하는 놈들이 발생한다.
지능이 있는 녀석들이다.
우선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
“레이크!”
후벨의 외침에 3팀이 움직였다. 이탈한 마수를 쫓아 등에 도끼를 꽂아 넣었다.
대열을 갖춘 후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한바탕 휩쓸었음에도 마수의 수는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장군님. 이탈해야 합니다.
관측병의 보고였다. 좌측에 자리한 산맥을 따라 마수가 내려오고 있다는 말이 뒤이어 전해졌다.
후벨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거병의 시각 장치가 밀려드는 마수를 잡아냈다.
50마리가 훌쩍 넘었다.
하나같이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다.
개중에는 커다란 날개를 펴고 직진하는 놈도 있었다. 타 부대도 발견했는지 굵은 작살이 날아올랐다.
날개가 꿰뚫린 마수가 땅으로 추락했다.
“다음 저지선 상황은?”
-3차 저지선도 마수와 분전 중입니다. 균열에서 빠져나오는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땅속에 길이라도 있는 건가.”
욕지거리가 나왔다. 날아다니는 놈은 그나마 나았다. 눈에 보이니까. 보이면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균열을 이용해 이동하는 놈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사람을 보낼 수도, 거병으로 따라붙을 수도 없었다.
후벨은 괴물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균열을 내려다봤다. 당장 눈에 보이는 거대 균열만 해도 아홉 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가 남긴 재앙의 틈이 마수의 이동 통로로 사용되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대장, 좀 버거운데요?
언제나 “예”라고만 대답하던 우수한 부하들이 난색을 표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안 좋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부하들은 유능하게 작전을 수행해 줬으나 적의 머릿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이 많은 괴물이 한날한시에 몰려들다니. 절대 우연일 리 없었다. 대마수처럼 무언가가 트리거가 됐을 것이다.
-아아악!
통신을 타고 비명이 전해졌다.
후벨은 곧바로 움직였다. 균열 밑에서 뛰쳐나온 마수가 거병의 외장갑을 뜯어내고 있었다.
도끼로 마수의 머리통을 날리고 부하의 상태를 확인했다.
-죄, 죄송합니다.
체임버 덮개가 녹아 있었다. 안에 탄 부하의 팔 한쪽 역시 녹아서 사라진 상태였다.
“버텨라.”
기절하지 않고 용케 눈을 뜨고 있는 게 대견했다. 진형을 갖춘 후 후퇴를 준비했다.
마수 사체가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 당분간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때였다.
마수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순간이었다.
마수들이 사체를 무시한 채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깨달았다. 통솔하는 놈이 근처에 있다는 걸. 후벨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오토마타 역시 특이한 행동을 취하는 마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인간?”
돌진하는 마수들 사이에 인간이 서 있었다.
아니, 저건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형태를 한 다른 무엇이었다. 오토마타가 적의 심도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심도 10 이상.
계측이 잘못된 걸까?
마수의 심도는 대개 크기와 비례했다.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마수 뼈에 응축된 마나가 심도를 결정하니까.
그릇이 커야 담을 수 있는 마나의 양도 늘어나는 법.
하지만 눈앞에 있는 적은 성인 남자의 크기였다. 저 작은 체구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모아놨다는 거지?
인간의 형태를 한 마수가 달리기 시작했다.
후벨은 깨닫고 말았다.
저놈한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산개해! 테가비나, 최대한 멀리…….”
부하의 이름을 외치며 도끼를 들어 올릴 때였다. 쾅, 인간의 형태를 한 마수가 부하의 거병 위에 올라섰다.
깍지 낀 손이 해머처럼 거병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쾅!
거병의 머리가 날아갔다. 연결 부위가 파손되며 체임버 상단이 드러났다.
한 번 더 공격당하면 체임버째 찌그러진다.
후벨은 고함을 지르며 조종간을 낚아챘다. 도끼가 인간형 마수의 몸을 후려쳤다.
타앙!
살점이 갈리며 진득한 소리가 나야 하는데, 마치 강철을 두드린 것처럼 쨍한 소음이 났다.
인간형 마수가 저 멀리 튕겨 나갔다.
“후퇴해!”
후벨은 부하들에게 외친 후 자세를 가다듬었다. 등을 보이고 뛰는 순간 바로 전멸한다.
누군가는 남아서 저놈과 얼굴을 맞대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부하들은 유능하나 자신과 비교하면 모자란 측면이 있었다.
그러니 괴물을 상대하는 건 제 몫이어야 한다.
통신을 닫았다. 매정한 놈들이 아니니 분명 무언가 말하고 있을 것이다.
동시에 무능한 놈들이 아니기에 멈춰 서서 얼 타는 짓도 안 할 것이다.
부하들이 진형을 갖춘 채 멀어지는 게 보였다.
동시에 인간형 마수가 달려들었다.
가까스로 반응했다. 도끼를 밑에서 위로 그었다. 손맛이 있었다. 베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폼 잡기는.”
인간의 목소리였다.
콰드득!
체임버 덮개에 구멍이 생겼다. 뚫고 들어온 건 거무튀튀한 손이었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인간이 아닌 것.
후벨은 곧바로 검을 뽑아 찔렀다. 불편한 자세였으나 힘은 실렸다.
깡!
검은 적의 손을 자르지 못했다. 허망하게 부러진 날이 동공에 맺혔다.
여기가 끝이구나.
후벨은 시트 하단 안쪽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군화 밑창으로 액상 근육 가속 장치를 눌렀다.
거병의 양팔로 마수를 붙잡았다.
허용치를 넘어선 마나가 일시적으로 액상 근육에 녹아들며 기준 출력 이상의 힘을 뿜어냈다.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는 건 30초. 그 후에 역류가 시작되면 마나 폭발이 일어난다.
탈출하고 싶으나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개죽음이 확정됐다면 적한테도 개죽음을 선사해 줄 뿐이다.
“난 말이야, 이런 걸 원했어.”
마수가 말했다.
체임버 안쪽으로 비집고 들어온 손이 철판을 찢으며 아래로 내려갔다.
구동계로 마전기를 전하는 전력 모듈 위에 마수의 손이 놓였다.
손이 활짝 펼쳐졌다. 보자기처럼 늘어나더니 모듈을 집어삼켰다.
썩은 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회전하던 액상 근육이 굳기 시작했다.
마전기 공급이 중단된 것이다.
후벨은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고밀도 마전기를 그대로 삼켜 버리다니.
“괴물 새끼.”
“나도 이렇게 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야.”
손이 다가온다.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단검을 꺼내 그어봤으나,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죽음이 실질적인 모습으로 눈앞에 드리워졌을 때였다.
마수의 손이 멈췄다.
갈라진 철판 사이로 인간형 마수의 얼굴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유단 학회장?”
고개를 쳐들고 저 먼 곳을 바라보던 마수가 피식 웃었다.
“알아봐 주니 고맙네.”
손이 뒤로 빠져나갔다.
“근데 말이야, 운명이란 게 있긴 한가 봐. 저걸 여기서 만나다니.”
기쁘다는 듯이 소리 내 웃던 마수가 거병에서 떨어졌다.
후벨은 간신히 유지된 인지 통합으로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저 멀리서 거병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