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수치가 변했어요.”
엔엔이 계기판을 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모노클을 왼쪽 눈에 가져다 댄 후 둔 상공을 바라봤다.
지속적으로 방출되던 마나 파장이 보이지 않았다.
“내부에서 뭔가 일어난 것 같네요.”
외부로 흘러나오던 에너지가 사라졌다. 의도된 것이라면 좋지 않은 징조였다.
“5분만 더 지켜보죠.”
둔이 방출하던 마나로도 모자라 주변 일대의 모든 마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켈트였다.
공급이 줄어들면 에너지 확보에 차질이 생기고, 켈트가 이상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전히 마법 파장은 검출 안 되고 있어요.”
“켈트를 다시 재울게요.”
가하란은 현장 제어를 엔엔에게 맡긴 후 하늘석으로 뛰어갔다.
하늘석과 가까워질수록 아찔한 흡입력이 느껴졌다. 외력마저도 집어삼킬 기세였다. 마나를 다루는 자가 하늘석 근처에 있었다면 마나뿐만 아니라 생명의 근간까지 빼앗겼을 것이다.
신체 보존을 위한 단순한 활동이 이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
신이 빚어낸 태초의 거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켈트는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고.
통제실로 들어가 정지시킨 전송탑을 전부 재가동했다. 지하로 배출하던 마나 역시 재설정해 켈트로 향하게 했다.
하늘석이 크게 진동했다.
가시화 패드에 맺힌 진행 상태를 확인했다. 난폭하게 주변 마나를 끌어당기던 켈트가 서서히 활동을 멈췄다.
정상 궤도에 올라서기까지 10여 분 소모됐다. 16번 전송탑이 과열로 잠시 멈췄지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다.
통제실 지하로 내려갔다.
가시화된 마나들이 안쪽에서 날뛰고 있었다. 철거하지 못한 설비들이 마나에 닿으며 녹아내렸다.
지옥과도 같은 환경 속에서 켈트는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가시화된 마나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옅은 빛을 내며 흡수됐다.
경이로웠다. 대륙이 붕괴하는 재앙이 덮쳐도 켈트는 홀로 살아남으리라.
가하란은 외력을 두른 채 전진했다. 마나 밀도가 낮아지고 있어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너덜너덜해진 거대한 커넥터를 제거하고 마나 방출을 위한 단자를 격리했다.
“엔엔 님, 내부 정리는 끝났어요.”
-하늘석 외부의 마나 쏠림도 사라졌어요. 안정화 단계예요.
“둔은…….”
-마법 파장이 그친 후로 변화가 없어요. 힘의 이동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워낙 방대한 에너지라 측정기가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사람을 현혹하던 마법 파장은 사라졌다. 난관을 하나 이겨낸 것이지만, 해결해야 할 난제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가하란.
유토니아의 통신이었다.
-밀레나의 상태를 확인했어요.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전투를 수행하는 건 힘든 상황이에요.
다쳤다는 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블루아이 회수는 차후에 해도 되니까 누나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해 줘.”
-그럴게요. 지금 갤리온으로 후송 작업 중이에요. 그리고 슬리피가 전해준 데이터에 의하면 남동부에서 확인된 마수만 백이 넘어가고 있어요.
“다른 쪽 상황은?”
-닥과 스니지가 관측 중이에요. 10km 내에 200마리 정도 확인됐어요.
아찔한 숫자였다.
디졸브 필드를 가동하면 마수의 행동을 제약할 수 있으나, 지금은 사용할 수 없었다.
핵심 설비들을 하늘석 바깥으로 빼놓은 상황인 데다가 다중 연산을 맡아줄 올 역시 분리된 상태였다.
분사 장치를 지상에 설치해 공핍 영역을 유도할 수도 있으나, 변수가 워낙 많아 카트시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늘석 밖으로 나갈 때였다.
먼 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강렬한 마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법사들이다.
클랜의 마법사들이 연대해 마수를 막아내고 있는 건가?
“아리엘이 협조를 요청해 왔어요.”
엔엔이 손끝으로 지시를 내리며 말했다. E30 수십 대가 외부로 빼놓은 설비를 들고 하늘석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연합 전선만으로는 막아내기 힘들어 보여요.”
가하란은 유토니아를 호출했다.
“그럼피, 스니지, 도피. 이 셋한테 갤리온 운용법을 알려줘.”
-다중 코어를 이용한 연결 방식이라 단시일에 학습하는 건 어려워요.
“전선에 있는 지휘관들의 지시를 받으면 괜찮을 거야. 독립적인 행동은 자제하고 어디까지나 지원하는 형태로 운용하면 어렵지 않을 거고.”
-그런 거라면 가능해요.
마수의 진입 경로를 갤리온의 몸체로 틀어막는 것만으로도 전술적인 이점을 가져올 수 있다.
일렬로 대기 중이던 갤리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갤리온을 바라보다가 하버 트럭에 다가섰다.
박스에 연결된 허브 장치를 떼어냈다.
“가하란.”
엔엔이 다가왔다.
“로트를 써야겠어요.”
“지금 로트를 쓰겠다는 건…….”
“갤리온만으로는 부족해요. 애초에 전투 목적으로 개발된 것도 아니니까요.”
박스의 개폐 스위치를 당겼다. 측면 벽이 벌어지며 누워 있는 로트가 드러났다.
“사슴님을 통해 수집한 모핑 데이터라는 게 불안하긴 하지만, 지금 이보다 유용한 게 없으니까요.”
“상시 제어는 힘들 거예요. 저번에 해봐서 알죠? 가하란의 머리가 버티질 못해요.”
“이번에는 사냥이니까요. 어느 정도 제약을 풀어도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 거예요’만큼 불안한 말이 없죠.”
엔엔이 슬며시 웃었다.
“인간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정밀한 작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가하란 말대로 이번이 적기겠네요. 날뛰게 해보죠.”
엔엔이 허브 장치를 번쩍 들어 올려 다른 트레일러와 연결했다. 그 옆에 분리해 둔 올의 코어가 놓였다.
-유토니아에게 설명은 들었어요. 로트 전체를 내보낼 계획인가요?
“수백에 달하는 마수와 대치하려면 우리도 머릿수를 맞춰야지.”
-과열돼 머리가 녹게 돼도 날 탓하진 마세요.
“위험하면 연결을 끊어줄 거라 믿어.”
-기계한테 믿음을 강요하는 건 뭔가 불합리해요. 믿음은 수치에 기반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믿어, 유토니아와 널.”
-그렇게 말하면 이젠 자존심의 문제네요.
로트의 체임버를 열고 안에 탔다.
후면부 해치를 열어젖히자 상하로 놓인 오토마타가 보였다. 아래쪽 오토마타는 물리적으로 잠가둔 상태였다.
커넥터를 연결하고 보안 장치를 풀었다.
두 개의 물리적 코어가 가동하며 은은한 마나 파장을 뿌려댔다.
-가하란.
유토니아의 목소리였다.
-가상 코어를 이용한 다중 코어 연산이 아니에요. 물리적 실체가 있는 코어를 이용한 것이기에 직접적인 부하가 걸릴 거예요.
“온도도 꽤 올라갈 테고.”
-가하란이 익지 않도록 관리할게요.
최종 점검을 끝내고 시동키를 손목에 찼다.
“사슴님.”
-난 언제든 나갈 준비가 돼 있어. 내 부하들을 이끌고 신나게 뛰어다닐 거야.
“사슴님의 무브먼트를 기반으로 제작된 로트예요. 제가 제어해 보겠지만, 몇몇 기체는 사슴님께 동화돼 따라 움직일 거예요.”
-그래?
“이탈하는 기체는 사슴님께서 제어해 주세요. 하늘석이 지상에 있는 상황이라 전부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니.”
-아기자기한 마나 덩어리들을 데리고 놀면 되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통제할 필요도 없지.
“사람이 다치는 건 최대한 피해 주세요.”
-네가 그렇게 부탁한다면야 말은 들어줄게. 인간이 없는 쪽에서 마수들과 놀면 되니까. 하지만 경고를 무시하고 접근하는 인간은 나도 어쩔 수 없어. 같이 노는 수밖에.
얼른 내보내 달라며 날뛰는 사슴이었다.
호흡을 짧게 끊어 내쉰 후 인지 통합을 시작했다. 갤리온은 E30을 기반으로 제작된 거병이라 제어하는 게 쉬웠다. 실제 코어가 아닌 가상 코어로도 통솔 가능할 정도였다.
하지만 로트는 다르다.
하나하나가 마력선 짜맞춤으로 제작된 거병이었다. 최종 목표는 완전한 독립 개체로서 자율성을 갖고 활동하는 것이지만, 아직은 걸음마 단계였다.
일곱 대의 초소형 거병의 에고를 복사해 주체적 의식을 확립해 보려 했으나, 닥을 비롯한 모든 아이들은 초기 설계 모델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아이들의 에고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단계에 돌입한 것이었다.
코어를 분해한 후 로우 레벨 데이터를 모두 분석한다면 행동 원리를 알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
결국 로트는 초기 모델을 근간으로 제작됐다. 모핑 데이터는 사슴이 쌓아온 것을 사용했다.
오로지 전투, 아니, 사냥만을 위해 제작된 병기.
-연결 시작할게요.
올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전신의 감각이 확장됐다. 머릿속으로 온갖 정보가 주입되자 자연스럽게 착안이 열렸다.
체임버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힘의 줄기가 보인다. 하나하나가 미니 비트에 준하는 정보를 담고 있었다.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온갖 목소리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안원에 처음 갔을 때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흔들려서는 안 된다. 뒤엉킨 목소리를 구별해 내야 했다. 거대한 동물의 울음처럼 웅웅거리던 소리가 서서히 나뉘었다.
로트의 목소리.
백여 대의 거병이 내지르는 갈망 어린 외침.
가하란은 첫 번째 로트를 깨웠다. 점으로 된 세계 한쪽 구석에서 밝은 빛이 점멸했다.
다음 아이를 깨웠다.
발광하는 점이 하나 더 생겨났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거병을 기동시켰다.
-얘들 데리고 먼저 나간다!
사슴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뇌에 꽂히는 순간, 진동이 몸을 덮쳤다.
보지 않아도 바깥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깨어난 ‘로트’들이 움직이고 있으리라.
* * *
신인류의 마법은 편리했다.
이제 막 마나를 깨달은 아이조차 스크롤 없이, 루틴과 매개체만 있으면 마법을 쏟아낼 수 있으니까.
“뒤로 물러서!”
헤리븐은 탈진한 젊은 마법사들을 후퇴시켰다. 침착함을 잃은 젊은 마법사들은 감당 못 할 마나를 끌어다 사용했다.
마나를 붙들어 두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젊은 마법사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아악!
몰아치던 바람 칼날이 멎자 마수들이 재차 날뛰기 시작했다.
헤리븐은 동료 마법사와 시선을 주고받은 후 합을 맞춰 스크롤을 내밀었다.
심상 세계를 통한 고유 마법이 아닌 정형화된 공격 마법.
스크롤 끝자락에서 피어난 불꽃이 점차 커지더니 노도처럼 변해 직선상에 놓인 마수를 집어삼켰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헤리븐은 정신을 차리고 파괴된 스크롤을 땅에 버렸다.
“마스터 헤리븐, 이게 마지막입니다.”
상황이 나아지질 않았다.
범위 공격 마법은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정신력 소모는 크지만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진 못했다.
애초에 마법은 살상용으로 부적합하다는 게 정론이었다.
억지로 살상력을 부여하려고 정형화된 스크롤을 쓰고 있지만, 이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격이었다.
형태를 파괴하는 고유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면 모를까.
헤리븐은 침침한 눈을 치켜떴다.
5m 크기의 마수들이 타들어 간 시체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불길로는 저 괴물을 막을 수 없다.
후벨 장군이 정리를 끝내고 합류할 때까지 이곳을 사수할 수 있을까?
전황이 암울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쿠웅!
뒤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났다. 거병이다. 후벨 장군이 도착한 걸까?
-비켜!
칼칼한 목소리가 전선을 뒤흔들었다.
두 발로 뛰던 거병이 앞으로 꼬꾸라지듯 상체를 기울이더니, 양손을 사용해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아군 마법사들을 지나 저 멀리 떨어진 마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
인간의 동작이 아니었다.
거병이 들개처럼 네 발로 뛰다니?
쿠궁, 쿠궁!
뒤이어 오는 거병들도 네 발로 뛰고 있었다. 기괴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저 거병은 어디 소속이란 말인가?
-사슴님! 제대로 움직여 주세요!
뒤따르던 거병 사이에서 석주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 그만해!
가장 먼저 뛰쳐나간 거병이 마수의 목을 뜯어내며 외쳤다.
헤리븐은 양손을 늘어트린 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스터 헤리븐, 이게 대체…….”
“아군인 건 확실해 보입니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마수처럼 날뛰는 거병을 보며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