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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42화 (542/558)

제542화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밀레나는 시각 장치를 조절해 커다란 균열 너머에 있는 숲을 바라봤다.

차분하게 매달려 있어야 할 잎들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 아래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

배율을 재조정했다. 나무 사이로 날뛰는 마수들이 보였다.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슬리피.”

-왜?

복귀를 준비 중이던 슬리피가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블루아이가 받은 시각 정보야.”

오토마타를 경유해 슬리피에게 정보가 전해졌다.

-탐지 범위 밖이라 알아채지 못했어. 진행 방향이 둔 쪽인 거 같아. 이것들 말고 다른 무리가 있는지 살펴봐 줘.

슬리피의 말을 들으며 시야를 옮길 때였다. 밀레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왜 갑자기…….”

전방위에서 마수가 밀려들고 있었다. 균열 사이에서 튀어나온 작은 마수부터, 나무를 뭉개며 접근 중인 마수까지.

이상 현상이었다. 여긴 둔과 가까운 숲 지대였다. 미개척지도 아닐뿐더러 마수의 활동 영역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수는 무리 지어 행동하지 않는다.

“설마.”

불현듯 떠오르는 단어, 대마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마수는 처리했으나 ‘유단’은 놓치고 말았다.

살아남은 유단이, 이제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그것이 다시금 문제를 일으킨 걸까?

시기도 절묘했다.

둔이 마비된 이 순간에 나타나다니.

-밀레나, 상황이 안 좋아. 숫자가 너무 많아.

슬리피가 경고했다.

밀레나는 전방을 훑으며 블루아이의 기동 가능 시간을 확인했다. 13시간.

“손봐야 할 곳 있어?”

-쉴드 카트리지만 교체하면 됩니다.

블루아이가 대답했다.

“기동성에는 문제없다는 거지?”

-오더러가 원하는 걸 시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좋아.”

밀레나는 통신 채널을 옮겼다.

“가하란.”

다급하게 호출하자마자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가하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수를 발견한 거지?

“숫자가 너무 많아. 게다가 둔을 향해 움직이고 있어. 각개 격파가 가능한 건 지금뿐이야.”

-기동 가능 시간은?

“13시간. 충분해.”

-위험하니 안 된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고민은 해볼게.”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누나의 실력은 알지만, 블루아이로 마수를 상대하는 건 사뭇 다를 거야.

“그렇겠지. 블루아이라고 한들 소형 거병보다는 기동성이 떨어지긴 하니까.”

-슬리피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미니 비트 내에서 지금도 분석하고 있을 테니까. 관절 마모도를 우선적으로 확인하고 위험해질 것 같으면 무엇보다 생존을 우선시해.

“널 내버려 두고 죽을 생각 없어. 적당히 하다가 빠질게.”

의지를 실어 한 걸음 내디뎠다. 블루아이가 수목을 밀쳐내며 나아간다.

-곧 지원 병력이 갈 거야.

“알겠어.”

작은 점으로 보이는 마수를 힘껏 밟았다.

콰직, 희미한 소리가 육중한 쇠를 타고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둔을 향해 일직선으로 뛰던 마수들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둔으로 향하는 모든 마수를 처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길목을 통해 둔으로 가는 마수는 단 한 마리도 없을 것이다.

콰가가강!

전법은 필요 없었다. 발로 지면을 긁고 주먹을 힘껏 내리칠 뿐이다.

경직됐던 마수들이 한순간 퍼지더니 거병의 후면부를 노리기 시작했다. 산양처럼 발목을 올라타더니 손톱으로 외장갑을 긁으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관절부 사이로 파고들 작정인가?

“출력을 조금 높일까?”

탈로스를 휘감은 액상 근육이 잘게 떨리며 퍼져나갔다. 실린더가 폭발적으로 움직였고 액상 근육이 오가는 배관은 팽창했다.

관절부로 파고들던 마수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이어서 자세 제어에 쓰이는 노즐을 죄다 노출시켰다. 개폐 장치가 열리며 달라붙었던 작은 마수들이 튕겨 나갔고, 이어서 방출된 마나에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던 마수들이 한순간 녹아내렸다.

-먼지 털기를 끝냈습니다.

“훌륭해.”

작은 벌레처럼 기어오르던 마수들을 죄다 정리했다. 상대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마수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블루아이를 무시한 채 지나가려는 듯했다.

허리를 숙여 나무를 뽑아냈다. 손아귀에 들어온 나무 여섯 그루를 멀어져 가는 마수를 향해 투척했다.

쿠우웅!

흙먼지가 솟구쳤다. 압사한 마수들 뒤쪽으로 길목이 막혀 허둥지둥하는 마수가 보였다.

달려가 치워버렸다.

공포의 대상이던 마수가,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던 괴물들이 저항조차 못 해보고 뭉개졌다.

-고밀도 마나입니다.

블루아이가 좌측에 있는 거대한 균열을 인식시켰다. 균열 사이에서 검붉은 손가락이 뻗어 나왔다.

손가락이 지면을 긁으며 점차 위로 올라왔다.

밀레나는 도망치는 작은 마수를 무시한 채 검붉은 손을 바라봤다.

여덟 개의 손가락.

모습을 드러낸 마수는 손바닥을 닮아 있었다.

손가락 끝에 박힌 샛노란 눈동자.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한순간 블루아이에 집중됐다.

“쉴드!”

입으로 외치기 전에 이미 블루아이는 반응하고 있었다. 오른쪽에 장착된 카트리지는 이미 사용했기에 왼팔을 내밀었다.

전면부에 반투명한 막이 맺히기 무섭게.

파아아앙!

안구를 통해 분사된 마나가 쉴드를 강타했다. 쉴드가 미처 중화하지 못한 마나가 난반사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화르륵. 분홍빛에 그을린 땅이 불타기 시작했다.

또다시 이어지는 마나 방출!

피아를 가리지 않는 파상 공격이었다. 휩쓸린 마수들이 검게 변해 쓰러졌고, 숲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슬리피!”

-괜찮아. 포격 지점을 예상해서 피하는 중이야. 그보다 쉴드 카트리지, 그게 끝이야. 트레일러에 있는 거로 교환해야…….

슬리피의 말을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여덟 개의 눈이 핑그르르 돌더니 다시금 블루아이를 바라봤다.

쿵.

쉴드 카트리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왼팔 구동계의 마모율을 재빨리 확인했다.

쉴드가 중화했음에도 물리적 타격이 있었다. 직격당하면 블루아이의 외장갑도 녹아내릴 것이다.

달려!

조종간을 강하게 밀었다.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고, 상체를 숙이는 순간 위로 방출된 마나가 지나갔다.

-우완 손상. 접합부 E332 경계 손상.

오른쪽 어깨 쪽 외장갑이 날아가 버렸다. 통증이 덮쳐왔다. 감각 확장 7단계 이상에서나 맛볼 수 있는 공유 통각이었다.

첨예한 통증이 있기에 좀 더 세밀하게 컨트롤할 수 있다.

발바닥에 닿는 조약돌의 개수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흥분 상태가 지속되자 오토마타가 아닌 별도의 시스템이 경고를 보내왔으나, 밀레나는 멈추지 않았다.

-우측면, 기울기 21. 가능합니다.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블루아이의 목소리였다. 음성이 아닌 전기적 신호.

블루아이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믿고 내지를 뿐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마수의 눈동자가 다시금 블루아이를 응시했다.

정면으로 돌진하는 상황.

마나 방출이 시작되면 체임버가 관통될 것이다.

검붉은 손가락 끝에 달린 눈동자로 마나가 모여든다. 밀도가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인다.

-지금.

블루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전적인 상황이 아닌, 으레 해왔던 단순한 작업의 반복이라는 듯이.

엄마는, 아른고개의 푸른기사는 이런 걸 매번 해왔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콰드드득!

블루아이가 기울어졌다. 좌측면에 설치된 노즐을 개방해 강제적으로 자세를 무너트렸다.

거대한 동체가 비스듬하게 넘어진다. 시야각도 그에 따라 바뀌었다.

밀레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사선 끝자락에 여덟 개의 눈깔이 놓였다. 급하게 손가락을 꺾어 방향을 재설정하는 중이지만, 이쪽이 한발 빨랐다.

콰아앙!

미끄러지듯 접근한 블루아이가 마수와 충돌했다.

온몸이 흔들렸다. 웨이브 겔을 뚫고 충격이 전해졌다. 목이 꺾여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었다.

신체술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경추나 척추, 둘 중 하나는 분질러졌을 것이다.

어금니 사이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재빨리 치운 후 앞을 바라봤다.

블루아이에 깔린 손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치워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왼쪽 끝 손가락이 지렁이처럼 꿈틀대다가 이내 블루아이 쪽을 향했다.

손가락에 달린 눈깔로 다시금 마나가 모여들었다.

같이 죽으려는 건가?

이 거리에서 방출하면 자기 몸도 꿰뚫릴 텐데.

그때였다. 마수의 손가락 마디가 갈라지는 게 보였다. 손에서 떨어져 나가도 살 수 있다는 건가?

확장된 눈동자가 마치 승리를 예견한 미소처럼 보였다.

블루아이의 발을 움직여 차보려 했으나 불쾌한 쇳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마나 밀도가 상승하는 게 보였다.

한 점으로 모이는 빛을 바라보며 숨을 멈출 때였다.

콰직!

마수의 눈동자가 터져나갔다.

새빨간 체액이 블루아이의 시각 장치를 덮었다. 안구가 터져버린 손가락이 좌우로 비틀대다가 툭 꼬꾸라졌다.

-블루아이는 그렇게 쓰면 안 돼. 마법으로 물리적 법칙을 어느 정도 상쇄했다고 한들, 그 막대한 질량을 다 해결한 건 아니니까.

슬리피의 목소리였다.

어깨를 꽉 움켜쥐던 긴장감이 탁, 하고 풀렸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일곱 개의 눈동자들이 동시에 광택을 잃었다. 번들거리던 눈에 검은 물이 차오르더니 한순간 녹아내렸다.

몸체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던 그 눈알 하나가 본체였던 걸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모든 신경을 그 눈 하나로 옮긴 걸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마수가 완전히 침묵한 걸 보면 그 눈알 하나가 치명상이 된 듯했다.

-너무 몰상식해. 내가 말했잖아? 블루아이는 섬세한 친구라고. 필렌의 전투 기록을 다음에 자세히 알려줄게. 세상에, 하부 모듈을 아주 다 해먹었네? 블루아이, 너 괜찮아?

-기립할 수 없는 상태다. 모듈 교체가 시급하다.

슬리피와 블루아이가 주고받는 대화를 듣다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았잖아? 기체가 조금 망가졌지만.”

-조금?

“조금…… 많이.”

가시화 패드를 슬쩍 바라봤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문으로 도배돼 있었다.

스무 번 이상 출전했지만 수리 내역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엄마와 비교하면…….

“첫 실전치고는 나쁘지 않아.”

-필렌, 할머니의 첫 실전은 아주 아름다웠어. 교육 자료로 만들어서 보여줄 테니까 공부해. 밀레나는 너무 무식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어.

“…….”

머쓱하게 웃다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선물 받은 스카프로 다시 묶은 후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적당히 정리했는데도 많네.”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둔을 향해 뛰어가는 마수들이 보였다. 수십 마리는 죽인 거 같은데, 아직도 많았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다른 곳에서도 마수가 날뛰고 있으리라.

“저건 너무 큰데.”

신체술을 사용해야 겨우 보이는 곳에서 검은 덩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블루아이보다 거대했다.

저런 게 둔으로 밀고 들어가면 대처할 방법이 없다.

“슬리피! 최대한 빨리 하부 모듈 교체해 줘. 블루아이가 아니면…….”

그렇게 말할 때였다.

희미하게 보이던 검은 덩어리가 팽창하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뒤늦게 폭음 같은 게 들려왔다.

뭐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시야에 잡히는 건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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