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1화
주황빛이 점멸했다.
빛이 드리워질 때 생각은 뻗어나갔고, 어둠이 깔릴 때 생각은 정리됐다.
점멸하는 빛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이내 이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무엇보다 내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로키는 몸을 내려다봤다. 몸이란 걸 인식하는 순간 몸이 생겨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 위로 회색 실이 기어 다니더니, 이내 직물로 짜인 옷이 됐다.
흐릿했던 감각이 점차 선명해지고, 선명해지다 못해 예리해졌다.
“체시.”
이름을 불러봤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지?”
-글쎄. 정확히 정의하기가 힘들어. 시간이란 게 모호해진 곳이니까.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거 같아.
뒤쪽에서 주황빛이 번쩍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툼한 주황색 선이 세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거 보여?”
-뭘 말하는 거야?
아무래도 체시의 감각 기관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듯했다.
로키는 주황색 선을 향해 걸었다. 선이 가까워지는 듯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또다시 멀어져 있었다.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점멸하던 주황색 선이 흐릿해지더니 결국 모습을 감췄다. 사라지는 순간 깨달았다.
두 눈으로 본 그것이 갈망의 집약체이자 연원(淵源)의 참모습이라는 걸.
지식의 시작과 끝.
가지고 싶으나 가질 수 없는 것.
아니,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는 주변을 돌아봤다. 회색으로 물들어 있던 세상이 점차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바로 앞에 보이는 건 성난 표정을 지은 산의 전사였다. 미간에 난 비늘이 잔뜩 솟아 있었다.
그 뒤로 인간 여자가 보였다.
둘 다 눈동자가 탁했다. 어딜 보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미래인가 과거인가 아니면 시간에서 벗어난 그 어디인가.
체시의 기계 팔이 움직였다. 느릿하게 나아간 기계 팔이 산의 전사를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한시적 영혼 세계가 제대로 안착했어.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개입할 수 없을 거야.
유단은 전사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야가 어그러진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전쟁터였다.
탄내와 함께 썩은 시체의 누린내가 코를 찔렀다.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로키는 발밑에 놓인 인간의 시체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앞에 산의 전사가 있었다. 산의 전사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검을 든 인간과 싸우고 있었다.
눈으로 좇을 수 없는 속도로 둘이 움직였다.
로키는 전투를 잠시 지켜보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뭘 한 거야?
“이자의 욕망을 들여다봤어. 누군가와 싸우고 있더라.”
-예나 지금이나 솔직한 종족이야. 그보다 개입할 수 있다면 지금 산의 전사를 죽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건 안 돼. 어디까지나 영혼 세계를 불러들였을 뿐, 이곳을 완전히 제어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나 역시 여기에 속해 있을 뿐이지.”
뒤에 있는 인간 여자에게 손을 올렸다. 인간 여자는 바람을 타고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었다.
로키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지하 연구실이 아닌 둔 중심가에 서 있었다.
-물리적 법칙은 전부 무시되는 곳인가?
“그 또한 알 수 없지. 다른 것들이 형태를 유지하는 걸 보면 무언가 다른 힘이 작용하는 것일 수도 있어.”
-연구해 보고 싶네. 하지만 이 안에서는 불가능하겠지.
유단은 넘어진 채로 멈춰버린 아이에게 손을 올렸다. 특이하게 생긴 개와 함께 큰 강을 건너고 있었다.
“다들 꿈을 꾸고 있어.”
움직이는 인간은 없었다. 아니, 인간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중첩돼 결국은 멈춰버린 세계.
로키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건 무슨 의미야?
“신께 기도를 올릴 때 이렇게 손을 맞잡아.”
-우리 때랑은 좀 바뀌었네.
맞잡았던 손을 서서히 떼어냈다.
손과 손 사이에 빛이 모여들었다. 빛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날뛰다가 한순간 매끄러운 구슬처럼 변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야.
“인간의 몸을 빌린 마법이니까. 하지만 이론 자체는 네가 말했던 것과 다를 바 없어. 이게 세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물질이야.”
-여기서 시작되는구나.
모든 시간과 모든 장소의 기억.
지상으로 불러들인 영혼 세계의 정보를 이 안에 집어넣을 것이다.
“줄리어스.”
눈앞에 놓인 거리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정지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난해하네.
주변 풍경이 연속적으로 바뀌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 위로 풀밭이 자라나고 강줄기가 생겼다. 생겼던 강줄기가 마르고 작은 마을이 솟아났다.
새롭게 생겨난 인간들이 웃으며 로키 주변을 빠르게 걷다가 흩어졌다.
작은 동물들이 날뛰다가 성장해 싸우고 이내 흙으로 돌아갔다.
아이가 노인이 됐다가 손가락조차 분리되지 않은 작은 덩어리가 됐고, 작은 덩어리가 순식간에 커져 성숙한 여인이 됐다.
세계가 무수한 변화를 일으키다가 어느 순간 정지했다.
-아.
체시의 감탄을 들으며 로키는 두 손을 다시 맞잡았다.
-어머니의 도시.
줄이 보여준 사진 속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타 왕국의 전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였다.
도로 중간에 둔의 건축물이 생겨났다. 모든 시간, 모든 장소.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건 불가능한가.
중첩된 상태라고 해도 일을 진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로키는 기억을 더듬었다.
줄리어스의 미소가 떠오르는 순간 주변 모든 것이 바뀌었다.
-돌아왔네.
어머니의 연구실이었다.
블루베리와 크랜베리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 로키는 시선을 옮겼다. 캐비닛 앞에 줄리어스가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손바닥과 줄의 몸 사이에 미지의 장벽이 생겨 만질 수 없었다.
“찾았으니 됐어.”
로키는 다시금 손을 맞잡고 강하게 염원했다.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알갱이가 반응했다. 영혼 세계가 품은 정보가, 줄의 모든 것이 작은 알갱이 안으로 흘러들었다.
힘이 난동을 부렸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손바닥 사이에서 일어났다.
깨트리면 안 된다.
로키는 집중했다.
재구성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로키, 눈이야.
“그래. 어머니의 눈이야.”
실핏줄이 달린 둥근 안구를 보며 말했다.
육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 *
“이런 규모의 마법은 역사적으로도 몇 번 없었죠.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스터 아낙스의 마법 역시 우리가 구현해 보려고 했으나…….”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헤리븐은 설명을 멈췄다. 앞에 있는 석주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거대한 반구체를 바라봤다.
“석주도 느꼈나요?”
“예. 마나 파장과는 다른,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힘의 이동이었습니다.”
석주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곁에서 지켜보던 헤리븐은 석주 주변의 마나가 미세하게 바뀌는 걸 알아챘다.
특히나 눈 주변의 마나가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눈은…….”
슬쩍 운을 떼 봤으나 석주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특수한 마법 공학일까, 아니면 심상 세계를 통해 발현한 마법일까.
석주와 대면하고 고작 한 시간. 헤리븐은 그 한 시간 동안 수없이 놀라야 했다.
두터워 보였던 상식의 막이 여러 번 깨져나갔다. 석주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법이란 게 마법 공학의 부산물로 느껴질 정도였다.
두려울 정도로 발전한 기술이었다.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고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마법과 마법 공학을, 석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고 있었다.
아니, 비단 석주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사태의 원흉인 유단 학회장 역시 마법과 마법 공학을 접목하지 않았는가.
기존의 스크롤을 사용해 발현한 마법에서 신인류의 루틴, 더 나아가 마법 공학의 편의성을 갖춘 마법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는 걸까.
구시대의 마법사들은 이제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낙담할 시간은 없었다.
기술의 발전이 마법의 영역을 침범했다면 그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레거시’가 되살아나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특별한 심상 세계를 갖춘 마법사라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발전의 시초를 잡아야 한다.
석주의 기술력이 어쩌면 단초가 될지도 모른다.
“마스터 헤리븐!”
다급한 목소리였다. 통신병이 헉헉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반구체 근처에서는 통신이 안 된다고 했었지, 헤리븐은 통신병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후, 후벨 장군께서 전 병력을 호출했습니다. 마법사 클랜에도 지원을 요청했고요.”
“도시 문제는 다 해결한 거 아니었나?”
회군하는 것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석주를 찾아온 것이었다.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다?”
“마수가, 집단을 이룬 마수가 둔을 향해서 오고 있습니다.”
“집단을 이룬 마수?”
듣자마자 떠오르는 현상이 있었다. 몇 년간 국경을 틀어막고 있던 대마수.
“숫자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수가 워낙 많습니다. 전방위에서 동시에 밀고 들어오는데…….”
통신병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몸을 돌렸다.
“빠르게 합류해 주십시오. 한시가 급합니다.”
이어서 석주에게 쪽지를 넘긴 통신병이 몸을 돌렸다. 전할 곳이 또 있는지 바쁘게 뛰어가는 통신병이었다.
말들도 반구체 근처에서는 겁을 집어먹고 주저앉는 터라 사람이 직접 뛸 수밖에 없었다. 마전기를 이용한 트럭은 애초에 접근할 수가 없고.
“석주, 아무래도 우린 이만 가봐야겠네. 여기 있는다고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따라온 다른 마법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자리에 남아 앎의 끝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전선이 뚫려버리면 모든 게 끝날 수도 있었다.
“나중에 꼭 다시 얘기해 봅시다. 난 석주가 지닌 기술이 현시대의 마법을 발전시킬 열쇠라고 보오.”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지휘소로 돌아왔다.
다른 도시의 참전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장군.”
“오셨군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작전판을 바라봤다. 검게 칠한 핀이 둔을 중심으로 둥글게 박혀 있었다.
“설마 저게 다…….”
“육안으로 확인한 것만 400마리가 넘어가고 있어요. 어디서 이렇게 튀어나온 건지, 빌어먹을.”
마수의 공격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인간들처럼 마나 파장에 영향을 받은 건지, 미친 듯이 날뛰는 놈들이 하루에도 두세 마리씩 나타났다.
하지만 400마리라니.
그것도 관측병에 의해 확인된 숫자였다. 시야가 미치지 않은 곳에서 밀려들고 있을 마수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해졌다.
“심도 8 이상으로 추정되는 놈들도 열 마리 이상 포진해 있어요.”
아리엘 의원이 말했다.
유능한 사냥꾼 조합조차 꺼리는 심도였다. 8 이상은 거병조차 짓이겨 버리는 놈들이 등장하니까.
심도가 강함의 척도는 아니나,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 밀도가 높으면 그에 상응하는 기괴한 공격을 해오기 마련이었다.
헤리븐은 지휘소에 모인 사람들을 바라봤다.
다들 체력적으로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후방 지원 부대조차 힘겨운 상황인데 최전선에서 뛴 군인들은 어떨까.
“섬멸은 못 하더라도…… 우리가 최대한 수를 줄여 보겠습니다.”
헤리븐이 말했다.
“광역으로 힘을 뿌릴 수 있는 젊은 마법사들이 몇 있습니다.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으나, 수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