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0화
-상대도 상황 파악이 끝난 듯합니다. 대치 상태를 끝내고 지금 회군 중입니다.
율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전해졌다. 엔엔이 다녀간 후로 부대 간 통신 품질이 좋아졌다.
“다행이네. 후벨 장군은?”
-관측병만 배치해 두고 본대로 복귀 중입니다. 마스터 헤리븐은 미리 출발…….
율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잡음도 없는 상태. 몇 번이고 율의 이름을 불러보다가 통신기를 바라봤다.
“무슨 문제가 생긴 거죠?”
통신병에게 물어봤으나 당황한 얼굴로 알아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단순한 장비 결함인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걸까. 고심하던 찰나였다.
아리엘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무언가가 온다.
서둘러 지휘소를 나섰다.
야전 병원으로 들어서던 의술사도, 망가진 거병을 확인하던 수리공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 쥔 통신기를 늘어트리며 둔을 집중해서 바라볼 때였다.
쿠구구구.
지면이 강하게 떨렸다. 인근 균열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그라운드 제로가 떠오르는 현상. 경직된 눈으로 주변을 살필 때였다.
둔중한 마나 파장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지근거리에서 일어난 마나 폭발도 이런 파장을 내뿜지는 않는다.
아찔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정면을 확인했다.
둔을 집어삼킨 반구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하늘석, 그리고 가하란이 떠올랐다.
제거에 성공한 걸까?
“아.”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회백색 반구체가 제자리를 잡았다.
아리엘은 신체술을 사용한 후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하늘석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빛무리가 몰려들고 있었다.
가시화된 마나였다.
이 정도 거리에서 보일 정도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힘이 저 좁은 지역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가하란과 엔엔은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아리엘 의원!”
말과 함께 나타난 건 마스터 헤리븐이었다. 주름진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서, 석주는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겁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아시다시피 상하 관계가 아니라 따로 보고받은 게 없고.”
“저걸 보세요! 저 파멸의 빛을! 의원님도 느꼈을 겁니다. 그 무서운 파장을요. 저건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에요. 잘못돼 마나 역류나 폭발을 일으키면…….”
헤리븐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우리는 물론이고, 아웃라인 너머 바인시까지 휩쓸릴 겁니다. 밀도 상승으로 인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주변 일대가 모두 엉망이 될 겁니다!”
마스터 헤리븐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멀리서 뿜어져 나오는 파장임에도 신체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날뛰는 마나가 한순간 폭발을 일으키면 둔을 비롯한 인근 도시가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되리라.
“처음부터 불안했어요. 그래서 우리 마법사들이 해낼 수 있다고 한 거였는데, 일이 이 지경이…….”
“마스터 헤리븐. 아직 단정하긴 일러요. 과정이 끝난 게 아니니까요.”
“의원님. 보고도 모르겠어요? 저건 제어할 수 없는 힘입니다. 이미 통제 불가의 영역으로 들어섰어요, 아시겠어요?”
답답하다는 듯 주먹을 세게 움켜쥐는 헤리븐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가하란 씨, 아니, 석주가 지닌 능력으로도 해결 못 한다면 그땐 마법사 클랜의 의견을 전적으로 지원할 테니.”
“이미 늦었습니다. 가시화된 마나가 저리 날뛰고 있어요. 오는 길에 모노클로 확인했습니다. 밀도가 측정 불가 영역에 들어섰어요. 잔뿌리에 근접했다는 거죠. 저 일대는 이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헤리븐이 낙담한 얼굴로 둔 일대를 바라볼 때였다.
마나 파장이 다시금 몸을 덮쳤다. 하지만 종전의 파장과는 느낌이 달랐다.
조금 전 파장이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밀쳐냈다면, 지금은 반대로 당기는 느낌이었다.
“마스터 헤리븐. 방금…….”
헤리븐이 품에서 모노클을 꺼냈다. 오른쪽 눈에 모노클을 끼고 먼 곳을 바라보던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럴 수가.”
“무슨 일이죠?”
“마나가, 그토록 날뛰던 마나가…….”
늙은 마법사의 얼굴에 오만 가지 감정이 내려앉았다. 설명을 기다릴 수 없어 인근 수리공에게 모노클을 빌렸다.
마나 밀도를 알려주는 센서가 짙은 푸른색에서 점차 채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줄어들고 있다.
폭발할 듯이 몰려들던 마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자연 상태의 마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류에 휩쓸려 모여들고 있었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잔뿌리와 유사한 형태였고, 그건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걸 의미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주변 일대의 마나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요?”
헤리븐이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흩어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마나 자체를 흡수하고 있어요.”
“흡수요?”
“정확히 모르겠군요. 소모라고 하기에는 저 방대한 마나를 치환할 만한 장치가 있을 리 없고, 흡수라고 하기에는 마찬가지로 저만큼의 마나를 담아낼 그릇이…….”
갑자기 옆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야전 병원 쪽이었다. 천막을 들추면서 어떤 남자가 뛰쳐나왔는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이봐요! 내가 왜 여기에 있죠? 당신들 대체 누굽니까?”
남자가 외쳤다. 그게 시작이었다. 사방에서 난리가 났다.
군의관들이 도움을 요청해 왔다. 임시 수용소로 만들어 놓은 곳에서 사람들의 격한 외침과 비명, 울음이 흘러나왔다.
아리엘은 수용소로 뛰어갔다.
“무슨 일이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어요.”
“정신을 차려요?”
“예. 이성을 잃고 둔만 바라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를 왜 납치해서 이런 곳에 데려왔냐고.”
아리엘은 수용소 안쪽을 살펴봤다.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흥분한 남자가 의자를 들어 올려 휘둘렀다. 아리엘은 군의관들에게 물러서라고 말한 후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하세요.”
“왜, 왜 우릴 여기에 가둔 겁니까?”
“당혹스러운 거 이해해요. 보니까 어떤 상황인지 전혀 기억 못 하시는 것 같네요.”
사람들이 경계심 어린 눈으로 아리엘을 바라봤다.
“설명해 드릴게요. 여러분들이 왜 여기에 있으며, 무슨 일을 겪게 된 건지.”
어려운 말은 배제했다. 마법이란 말로 단순화해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마법에 홀린 거라고요? 여기 있는 모두가?”
난리 치던 사람들도 점차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군의관과 클랜 소속 마법사들이 수용소 안 사람들을 살폈다.
“점차 호전되고 있습니다. 일정 행동을 유발시키던 특수한 파장도 감지되지 않고 있고요.”
“다른 쪽도 확인해 주세요.”
아리엘은 뒷일을 부탁한 후 수용소를 벗어났다. 마스터 헤리븐은 여전히 멍한 눈으로 둔 쪽을 보고 있었다.
“제어되고 있어요. 저 구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마나가 하늘석 내부로 이동하다니. 둔에서 나오는 파장조차 하늘석의 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고요. 아아, 이럴 수가.”
헤리븐이 모노클을 내려놓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스터 헤리븐!”
아리엘이 헤리븐 옆에 섰다.
“의원님. 난 가서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 두 눈으로 제대로 봐야겠어요. 석주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어떻게 저 모든 마나를 제어하고 있는 건지.”
“접근하면 안 된다는 석주의 경고를 잊으신 건가요?”
“압니다, 기억하고 있죠. 그럼에도 가야겠어요.”
단단히 홀린 눈이었다. 배움을 추구하는 학자로서 이 순간을 외면할 수 없다는 눈이었다.
재차 막아섰으나 헤리븐은 뜻을 꺾지 않았다.
“의원님, 마스터 올르비가 제 업무를 대신 수행해 줄 겁니다.”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압니다. 하지만 저 현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건 더 무책임한 일이에요.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던 한 차원 높은 마법이, 어쩌면 마법 이상의 것이 저기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후배들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은 아니고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헤리븐이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갔다. 말릴 수 없다. 완력으로 붙잡으면 헤리븐 역시 마법을 사용할 것이다.
이미 왼손에 스크롤을 쥐고 있었다.
“의원님!”
뒤를 돌아봤다. 통신병 둘이 큼지막한 통신 장비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통신이 복구됐습니다.”
통신기를 든 후 가하란을 호출했다.
-채널이 다시 살아났네요.
“석주.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어요. 주변에서 느껴지던 끈적한 파장도 사라졌고요.”
-수치는 정상화됐지만 약간 불안했었는데, 의원님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이제 둔으로 몰려드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해냈구나.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아, 마스터 헤리븐이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면서. 어떻게 할까요? 일에 방해가 되는 거라면 제 선에서…….”
-상관없습니다. 위험 구간은 지났거든요. 하지만 너무 가까이 오는 건 안 된다고 전해주세요. 최소한 400m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힘에 휩쓸릴 수도 있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아리엘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른 마법사들도 헤리븐처럼 둔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식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건가.
물론 수가 많지는 않았다.
네 명 정도.
대부분 노년에 접어든 마법사들이었다.
“이쪽에서 최대한 통제해 볼게요.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지만.”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지는 건 당연해요. 전 이해합니다.
석주는 이해해도 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리엘은 헛웃음을 담아 말했다.
“둔을 감싼 틈새가 흔들리는 걸 봤어요. 그것도 해결된 건가요?”
-아니요. 둔에서 발생하는 마나 파장만 상쇄 중이에요. 위상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어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요?”
희망적인 대답이 가하란의 입을 통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제가 쥐고 있는 마지막 수단을 썼어요. 그럼에도 위상은 건재하죠. 시간이 주어진다고 한들 해결책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요.
“방법이 전혀 없나요?”
-이쪽으로 오는 마법사분들과 의견을 교환해 볼게요.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뭔가 나올지도 모르니까.
“다른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통신이 끊겼다.
아리엘은 곳곳에 설치된 수용소를 바라봤다.
둔을 둘러싼 상식 저편의 문제가 석주와 마법사의 몫이라면, 인간이 얽힌 지극히 현실적인 행정 처리는 자신의 몫이었다.
“간단한 검진 후에 최대한 빨리 민간인을 현장에서 내보내세요. 호송 병력도 준비하고요.”
아리엘은 둔을 한번 돌아본 후 군의관들을 향해 걸어갔다.
* * *
으드득.
허벅다리 살점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인간 몸에 녹아들어 있는 희미한 마나가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부족하다.
턱없이 부족하다.
유단은 머리만 남은 인간 시체를 저 멀리 던졌다.
“아, 아…….”
흐느적거리며 도망치는 인간을 짓밟았다. 터져나간 몸뚱이를 내려다보다가 히죽 웃었다.
몸을 회복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살아야 한다는 집념 하나만으로 동부 끝자락까지 도망쳤다. 벌레부터 다시 시작해 작은 마수를 잡아먹기까지, 끔찍한 나날을 버텨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몸은 완벽하게 재생됐다. 그 빌어먹을 가하란에게 당했던 상처도 다 아물었고.
유단은 반파된 거병을 바라봤다.
거병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육체가 되살아났다.
외장갑을 뜯어내고 체임버 하단에 처박혀 있는 배터리를 꺼냈다.
체내에 배터리를 쑤셔 넣고 그대로 찌부러트렸다. 몸 깊숙한 곳에서 마전기가 흘러나왔다.
황홀한 힘의 축복.
유단은 더욱 단단해진 몸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냄새가 나.”
로키의 냄새가 난다.
몸의 냄새가 난다.
그래, 되찾아야지.
원래 내 몸인데.
유단은 뒤쪽에 들어선 마수들을 바라봤다. 지능은 낮으나 욕심만큼은 하늘을 찌르는 놈들.
“가자, 형제들.”
둔이 코앞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