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9화 (539/558)

제539화

-가하란.

유토니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은 정신을 일깨웠다. 가하란은 살며시 눈을 떴다. 어지럽게 공유되던 시각들이 일순간 사라지며 단조로운 박스 내부가 보였다.

-괜찮아요?

“모르겠네. 괜찮다고 해야 할지, 괜찮지 않아야 하는데 멀쩡하니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스물셋.

사망자의 수였다.

그중 다섯은 가하란이 직접 조종한 갤리온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살인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도시에서도 사람을 죽였으니까.

하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건, 죽였음에도 심적 변화가 전혀 없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필요한 일이었어요.

달래주듯 말하는 유토니아가 훨씬 인간적이었다. 가하란은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감쌌다.

다중 코어를 기반으로 60대의 갤리온을 조종했다. 물론 60대 전체를 동시에 다룬 건 아니었다.

로우 레벨의 명령 체계를 확립해 패턴에 맞춰 움직이게 한 다음, 특수한 몇몇 상황이 발생하면 직접 개입해 명령을 내렸다.

버거울 줄 알았으나 놀라울 정도로 간편했다. 뇌에 걸리는 부담감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예측을 벗어난 속도로 적응해 버린 것이다. 착안, 그리고 올조차 이해할 수 없다던 뇌, 마지막으로 산페르가 인정한 인내심이 이뤄낸 결과였다.

전장의 모습이 감긴 눈꺼풀 위로 스쳐 지나갔다.

갤리온은 우수했다. 효율적으로 적진을 붕괴시켰고, 다족 보행의 장점을 살려 거병을 압박했다.

접지압 문제에서 벗어난 다족 보행 병기는 무척이나 유용했다. 시가지라면 폭이 좁은 거병이 유리하겠으나, 개활지라면 갤리온이 좀 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으리라.

마나 방출용 포신을 장착하고, 다리가 아닌 캐터필러로 교체하면 전술적으로 활용할 만한 다른 거병이…….

아아악!

귀 안쪽으로 아스라이 비명이 스쳐 갔다. 하체가 으스러져 죽어가던 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 번 본 것은 어지간하면 잊지 않는다. 생기가 사라져 가는 눈으로 형제를 찾던 군인의 모습은 앞으로도 뇌리에 각인돼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가하란은 죽어간 자들의 얼굴을 되새김질했다. 떠올릴 때마다 평온했던 심박수가 급격하게 상승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얌전해졌다.

“이름 모를 적의 죽음은 애도할 가치가 없는 걸까?”

-자책하는 건가요?

“심정적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이성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보통은 반대 아닌가요?

“그러게.”

유토니아가 작게 말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아파하세요. 떨쳐버릴 수 있을 만큼만 슬퍼하고요. 가하란이 하늘석을 선택했을 때, 올에게 길을 보여 주겠다고 말했을 때 이런 상황은 예정된 거였으니까.

“가차 없네.”

-위로해 드려요? 그걸 원한다면 얼마든지 말해줄 수 있어요.

“아니. 내가 선택한 일인데 너한테 위로받을 순 없지.”

-맞아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중 코어에 연결하기 위해 손목에 감아뒀던 시동키를 제거했다.

일어서고 나니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가하란. 앞으로 갤리온은 제가 담당할게요. 이번에 얻은 전투 데이터로 학습을 이어 나가면 가하란의 도움 없이도 거병을 상대할 수 있어요.

“네가 동시에 다룰 수 있는 갤리온의 숫자가 몇이었더라?”

-지금은 동시에 운용 가능한 건 10대가 한계예요. 가하란의 뇌를 경유하지 않으면 아무래도 퍼포먼스가 떨어지니까요.

“앞으로도 내가 할게.”

-사람을 죽이는 건 제가 할게요.

“그것도 내가 할게. 필요하다면.”

박스의 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밀폐된 박스 안으로 밀려들었다.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쩐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혐오스럽다거나 죄책감이 이는 건 아니었다.

일어난 사건과 감정이 완전히 분리된 것 같았다.

이대로 시간이 계속 흐르다 보면 어떤 인간이 되는 걸까.

-가하란. 밀레나가 다쳤었어요.

“뭐?”

급하게 통신기를 찾았다.

블루아이에 문제가 생긴 걸까? 완벽하게 정비를 끝냈는데,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던 걸까?

초조한 마음으로 통신기를 붙잡을 때였다.

-아, 오보고였네요. 밀레나는 안전해요. 남동부 정리를 끝내고 복귀하는 중이고요.

“…….”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당황하네요.

“너 설마…….”

-가하란. 전 인간의 관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요. 슬픔을 공유하는 방식이나, 기쁨이 옮겨 가는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하죠.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어요. 이름 모를 타인의 죽음보다 지인에게 생긴 작은 상처가 더 신경 쓰인다는 거.

E30 한 대가 제어판 위로 올라갔다. 유토니아가 직접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누군가는 가하란을 보며 비정하다고 할 수 있겠죠.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안 그래도 악마라는 말을 들었어.”

-하지만 말은 말일 뿐이에요. 말은 본질을 바꿀 수 없죠. 가하란은 남들보다 조금 더 침착할 뿐이에요. 그리고 울음 대신 일을 해결할 뿐이고요.

가하란은 다시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앎이 깊어진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

-멍청하게 당하고 우는 것보다는 나아요.

멍청하게 당하고 우는 것.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니까.”

박스에서 내려왔다. E30이 걱정된다는 듯이 눈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나중에 한풀이하면 또 들어줄래?”

-가하란이 말했죠? 외롭게 있지 말라고. 저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네요.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 털어놓아요.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같이 고민해 줄 수는 있으니까.

“고마워. 아, 갤리온 정리를 부탁해.”

-맡겨주세요.

북동과 남동쪽은 해결됐다. 연합 전선이 맡은 남서쪽도 별다른 피해는 없을 것이다.

승냥이를 치워냈으니 이제 사자를 사냥해야 할 때였다.

가하란은 하늘석 내부로 들어갔다. 긴 복도를 거쳐 통제실에 도착했다.

작업 중이던 엔엔이 모노클을 왼쪽 눈에서 떼어냈다.

“해결됐나요?”

“네. 정리했어요.”

“수고했어요. 이런저런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얼굴을 보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네요.”

엔엔 뒤쪽에 섰다. 제어판 하단부에 어지럽게 연결된 커넥터들이 보였다.

“올의 코어는 분리해 놨어요. 연결부에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되돌려 놓을 때 수리하면 돼요.”

가하란은 감각기를 낀 후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하늘석 내부 배선도가 허공에 맺혔다.

그중 마나가 오가는 길목을 눈으로 훑었다.

“전송탑 위치는 이대로 고정해 놓죠.”

“전방위적인 마나 흡수가 일어날 테니 가하란 말대로 이 위치가 좋겠어요.”

“시간당 흡수하는 마나양을 조절하려면…… 6번, 7번, 8번 전송탑의 단자를 분리해 둬야겠네요.”

“둔에서 발생하는 파장이 주목적이니 그 정도면 되겠죠. 여기, 계산식으로 예상되는 수치를 내봤어요.”

엔엔이 벽면을 가리켰다. 통제실 벽면 한가득 숫자와 기호가 적혀 있었다.

내부 설계를 변경할 때 정리한 유도식이었다.

“허용치를 벗어나면 강제적으로 연결을 끊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전송탑 자체를 파괴할 겁니다.”

“역류가 일어난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엔엔에게 마무리를 부탁한 뒤 켈트가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핵심 장비들은 전부 분해해 밖으로 내뺀 상황이라 시설의 앙상한 뼈대와 쇳물을 담아내던 틀만 남아 있었다.

설비의 잔재 너머에 웅크려 누워 있는 거인이 보였다.

천장과 벽면에서 길게 뻗어 나온 선들이 거인의 몸 곳곳에 연결돼 있었다.

마나가 일정량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켈트가 깨어나 강제력을 발휘해 주변 마나를 흡수한다.

하늘석 시스템을 관리하는 올조차 막을 수 없는 상위 명령이 켈트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다.

가하란은 켈트의 몸에 손을 댔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다.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존재.

“마음껏 흡수해 봐.”

켈트에 연결된 단자들을 확인한 후 통제실로 올라왔다.

“아래쪽은 문제없어요.”

“여기도 준비 끝냈어요.”

엔엔이 제어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통신기를 들었다.

“대피 작업은 끝났어?”

-네. 2km 바깥으로 모든 물자를 옮겼어요.

“수고했어.”

배쉬플의 보고를 들은 후 엔엔에게 눈길을 줬다.

“시작하죠.”

“1번부터 5번 전송탑 기능을 정지시킬게요. 정확히 5분 후에 켈트가 반응할 거예요.”

“파장뿐만 아니라 둔을 둘러싼 장막까지 거둬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힘들 거예요. 파장이야 마나가 매개라지만, 둔을 덮은 저건 마법적인 변화가 끝난 심상 세계에 가까워 보이니까요.”

“이 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가하란은 벽면에 투영된 회백색 반구체를 보며 말했다.

“기도해야겠네요. 행운이 따르길.”

“기도해야죠. 이제부터는 계산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엔엔이 제어판에 손을 올렸다.

짧은 경고음이 난 후 하늘석 전체를 감싸던 희미한 마나 파장이 완전히 사라졌다.

외부에서 마나를 끝없이 모으던 전송탑이 일을 멈춘 것이다.

“방출도 시작할게요.”

켈트에 이어놓은 커넥터를 통해 마나가 이동했다. 유지·관리에 필요한 마나가 하늘석 하단부를 통해 지면으로 흩어졌다.

마나 밀도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우리도 나가죠.”

엔엔과 함께 하늘석을 벗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마나의 소용돌이다.

켈트가 보관하고 있던 마나가 인위적으로 흩어지게 되며 자연 상태에 놓여 있던 마나 역시 날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하로 유도한 마나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뿌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석과 맞닿은 지면이 가시화된 마나에 의해 붉게 끓고 있지만, 저 현상도 3분 후면 사라질 것이다.

“순조로워요. 하늘석이 자체적으로 보유하던 마나가 절반 이하로 줄었어요.”

“시작되겠네요.”

그렇게 5분이 흘렀을 때였다.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착안이 제멋대로 열리고 닫혔다.

“그때랑 같은 파장이에요. 뒤척이기 시작하네요, 태초의 거인이.”

엔엔은 상기된 얼굴로 하늘석을 보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흥분되는 것이리라. 가하란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다.

모든 거병의 시작점.

안전하게 보관해 왔던 켈트를 억지로 움직이게 했다.

물론 눈을 뜨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유지·관리를 위해 켈트의 몸이 마나를 흡수할 뿐이니까.

“시작됐어요!”

꾸우웅!

하늘석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일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렬한 마나 파장이 일대를 휩쓸었다. 외력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면 장기가 으스러졌을 것이다.

“가하란, 괜찮아요?”

“예. 엔엔 님은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요. 칼랑의 가죽은 질기니까요.”

모노클을 꺼내 끼려다가 그만뒀다. 착안을 열지 않아도, 모노클을 사용하지 않아도 마나의 이동이 눈에 보였다.

하늘석을 중심으로 가시화된 마나가 넘실거렸다.

탄생과 죽음을 모두 관장하는 빛.

디졸브 필드가 특수 대역 마나의 이동을 유도해 일정 지역을 마나 공핍 상태로 만든다면, 하늘석 안의 켈트는 순수하게 마나를 흡수해 주변 마나를 마르게 할 것이다.

“가하란!”

엔엔이 둔을 가리켰다.

회백색 반구체가 크게 출렁거렸다.

잔잔하던 표면에 물결이 치더니 이내 하늘석 쪽으로 빨려들듯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변형은 오래가지 않았다. 반구체는 금세 본래 형태를 되찾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켈트를 이용한 건 어디까지나 둔에서 발생하는 마나 파장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긴장한 채 외부 연락을 기다릴 때였다.

-엔엔, 이쪽 억제기에 걸리는 게 없어요. 마나 파장이 상쇄되고 있나 봐요!

해피의 목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