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8화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복잡한 기계 장치만 보일 뿐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이게 정말 거병이라고?”
-맞습니다. 형식 분류상 거병입니다.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군기가 한 대 더 쓰러졌다.
다섯 대였던 기괴한 기계는 어느덧 일곱 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마나 밀도의 증가를 알리는 오토마타의 경고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것인가?
통신 장애로 인해 첨병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부터 불길하긴 했다.
기우일 거라고, 전투가 임박해 예민해진 거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무엇보다 신호탄이 올라오지 않았다. 습격을 받았다면 첨병들이 신호탄을 쏘았을 텐데 주변은 조용했었다.
하지만 적이 나타난 이 순간조차 첨병 쪽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신호탄을 쏠 찰나조차 허락지 않고 제압당했다는 뜻이다.
간파당했다. 적은 우리의 위치뿐만 아니라 세부적인 정보까지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카롤은 손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기형의 거병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대장님. 제 오토마타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저 빌어먹을 기계가 거병이라고 합니다.
“내 오토마타도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카롤은 정면에 있는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리가 여섯 개인 괴물을 상대하려면 기존의 전투 방식을 버려야 했다.
루스와 합을 맞춰 다리를 공략했다. 안에 사람이 없다는 걸 방증하듯 놈들의 대처는 조금씩 늦었다.
막막했으나 점차 살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거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 없이 단순하게 움직이는 기계라면!”
까가강, 도끼날이 이번에도 적의 다리를 갈랐다. 루스가 뒤이어 달려들어 창으로 몸통을 찍었다.
-대장님. 이거 마수를 사냥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이건 거병과의 전투가 아니다. 사냥이라고 생각하면…….”
희망이 실린 목소리로 대답할 때였다. 비명이 채널을 비집고 들어왔다.
후트론, 다일, 캔.
대열을 맞춰 적 기계를 제거하던 세 부하가 동시에 침묵했다. 근거리 통신으로 계속 호출해 봤으나 대답이 없었다.
본대 서쪽이 뚫린 건가?
보병들로는 다리 여섯 개 달린 괴물에 대처하기 힘들 것이다.
“최대한 접근해서 다리를 노려라!”
단순한 전법이었으나 확실한 방법이었다. 돌입하는 과정은 부하들의 센스에 맡길 것이다. 유능한 놈들이니 분명 해낼 터였다.
카롤도 다시금 루스와 합을 맞춰 세 번째 목표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전과 같은 전투를, 아니, 사냥을 반복하면 된다.
티이잉!
짓쳐 들어가던 도끼가 튕겨 나왔다. 카롤은 눈을 부릅떴다. 적 기체 하부에서 튀어나온 기계 팔이 도낏자루를 쳐낸 것이다.
루스와 속도를 맞춰 동시에 들어간 공격이었다. 앞선 두 대는 반응하지 못하고 다리를 내줬는데, 세 번째 놈은 달랐다.
전투에 우연은 없다.
보고 대처한 것이다.
설마 학습한 건가? 그 짧은 시간에?
“루스!”
거리를 두고 재정비해야 할 때였으나, 루스가 약간 늦고 말았다.
적 기체의 우측 다리 세 개가 동시에 접히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측면으로 이동했다.
루스가 있는 곳이었다.
콰아앙!
거병용 도끼도, 창도 녀석에겐 필요 없었다. 육중한 몸이, 가속을 받은 질량이 무기였다.
“루스! 루스!”
연이어 호출해 봤으나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루스가 타고 있는 기체의 오토마타가 상황을 전해왔다.
활력 징후 소실.
사망이었다.
루스의 죽음을 기점으로 전 채널에서 짧은 비명이 이어졌다.
죽어가고 있다, 힘겹게 키운 정예 병사들이. 인간이 타지도 않은, 용납할 수 없는 기계 따위한테!
카롤은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감각 확장을 8단계까지 상승시켰다.
아찔해질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졌다. 오토마타가 배터리 잔여량이 30% 미만이라며 경고음을 냈다.
-퇴각을 추천합니다.
“경로 탐색 그만두고 앞에 있는 놈 분석에만 집중해.”
-알겠습니다.
거병 상체를 기울인 다음 치고 나갔다. 신체술의 한계 시간인 5분. 거기에 감각 확장으로 인한 신체 부담까지 더해지면, 5분이 지나고 나면 탈진해 쓰러질 것이다.
그 5분간, 최대한 적을 정리한다.
본진 쪽으로 이동한 네 대를 제외하고 눈앞에 있는 적 기체는 세 대.
카롤은 자신이 있었다. 목숨을 건 전투라면, 삶을 포기한 싸움이라면 저 끔찍한 기계들을 정리할 수 있다고.
5분이 지나고 나면 죽게 되겠지만, 뒷일은 부하들이 처리해 줄 것이다.
둔 포위는 실패로 돌아가겠으나 적 기계를 노획해 분석하면 얻는 게 있겠지. 전투 데이터도 분명 쓸모가 있을 테고.
“이 채널을 통해 듣고 있는 자가 있다면, 이 오토마타에 기록된 전투 데이터를 토대로 대처법을 강구해라.”
쿵!
앞으로 뛰쳐나갔다.
암담한 상황이었으나 괜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어느 때도 느껴보지 못한 일체감이었다.
지금의 상태라면 적 기체를 모두 정리하고 생환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적이 내지른 기계 팔을 도끼날로 매끄럽게 받아넘겼다. 각 관절의 움직임이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한계를 초월한 느낌.
구동계에서 전해지는 힘을 온전히 다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흡이 점점 빨라졌다. 빨라지는 호흡과 반비례로 주변의 사물은 느려져 보였다.
아아!
난 할 수 있다.
기계 팔을 쳐낸 후 순식간에 적 기체 우측면에 섰다.
우선 한 마리!
완벽하게 틈새를 찔렀다고 생각할 때였다.
콰드득, 불안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직후 몸이 왼쪽으로 쏠렸다가 오른쪽으로 튕겨 나갔다.
웨이브 겔로도 막아내지 못한 충격이 온몸을 덮쳤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다가 이내 뒤집혔다. 카롤은 피가 섞인 토사물을 쏟아냈다. 점심때 먹은 고기 조각이 계기판에 뿌려졌다.
-하부 모듈 전손. 감각 단계를 낮춥니다. 인지 통합 불완전.
오토마타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인지 통합을 복구했다. 거병의 시각 장치가 외부 상황을 전해줬다.
다리 여섯 달린 기계들이 주변에 모여 있었다. 열 대가 넘었다.
카롤은 허망한 눈으로 뒤쪽을 돌아봤다. 거병의 머리가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본대가 제압당했다.
그쪽에도 정체불명의 기계들이 모여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서른 기가 넘었다.
“하, 하하.”
인간도 태우지 않은 기계.
거병이라 부를 수 없는 기계 따위한테 함락당했다.
-활력 징후가 정상 범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응급 치료가 필요합니다.
“나도 알아. 근데 말이야,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
몸의 통증과 별개로 머리는 희한하게 맑아졌다. 카롤은 배를 내려다봤다. 우그러진 철판이 복부를 관통한 상태였다.
죽음이 확정됐다.
의술사가 달라붙어도 어쩔 수 없는 상처라는 걸 보는 즉시 깨달았다.
“저게 거병이라고 했지?”
-예. 거병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론상 거병은 이족 보행이어야 하잖아? 사람을 닮은 꼴로 만들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으니까. 내 상식이 틀린 건가?”
-아닙니다. 정확합니다. 거병의 작동 원리는 모두 베이스 아키텍처에 기반하며, 인간의 형태가 아닌 다른 형태를 취할 시 회로 간 간섭이 일어나 작동하지 않습니다.
“근데…… 그러면…… 저건 뭐지?”
오랫동안 함께해 온 오토마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너도 모르는 게…….”
눈앞이 캄캄해질 때였다. 체임버 덮개가 덜컹거리더니 뜯겨 나갔다.
카롤은 고개를 들었다.
연녹색 외장갑이 보였다. 외장갑 중앙에 박혀 있는 반투명한 시각 장치도 보였다.
“사람도…… 아닌 게…….”
고개가 점점 꺾인다. 흐릿한 어둠이 시야 위쪽을 덮으며 내려왔다.
* * *
끝났다.
베르드는 한데 모인 군인들을 바라봤다. 다리 여섯 개 달린 정체 모를 기계들의 통제하에 모든 것이 정리됐다.
-의원이신 거 같은데.
갑작스러운 음성에 베르드는 고개를 휙 돌렸다. 기계 팔에 붙들린 상태라 목을 돌리는 것조차 꽤 힘이 들었다.
“누, 누구십니까?”
-일단은 아리엘 의원 쪽 사람이라 해두죠.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베르드요.”
-의원 맞으십니까?
“그렇소.”
-여기 계신 분들을 대표하실 수 있는 위치고요?
“통제관은 따로 있소.”
-군인인가요?
베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서 나와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곤란하네요.
기괴한 기계의 상판이 살짝 흔들리더니 위로 들렸다. 베르드는 눈을 크게 뜨고 기계 안을 살폈다.
사람이 없다.
“어, 어떻게…….”
-대면이 어렵다는 건 이해하셨을 테고, 통제관이 저 사람 맞나요?
저 멀리서 커다란 발을 교차하며 기계가 다가왔다. 베르드는 탄식을 흘렸다. 축 늘어진 시체가 들려 있었다. 카롤이었다.
-맞는 것 같군요.
“우릴 어찌할 생각입니까?”
-포로로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여건도 안 되고. 식량은 남겨드릴 테니 이대로 회군하시면 됩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트럭들이 움직였다. 운전자를 태우지 않은 트럭이 금세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당신이 한 짓이었어.”
보안 설정을 끝마친 트럭을 제멋대로 다루고, 무인 기계를 동원해 전투를 벌이는 자.
두려움이 발끝에서 시작돼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법 공학이 생활 전반은 물론 전쟁의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은 시대였다.
기계 너머에 있는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더 끔찍한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저항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부상자를 챙겨 돌아가세요.
“우릴, 우리의 도시를 지배하려는 겁니까? 둔이 시작인 겁니까?”
아리엘 의원이 말도 안 되는 전력을 손에 넣었다. 야망이 대단한 여자였다. 그녀는 도시 하나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편의상 말씀드린 거였는데, 정정해야겠군요. 전 아리엘 의원과 한시적 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입니다. 둔 사태를 방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의 의원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고 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습니다.
“그걸 내가 어찌 믿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제가 다른 행동을 취해야 할까요?
그와 동시에 사방에 퍼져 있던 기계들이 진압된 병력을 향해 돌아섰다.
베르드는 깨달았다. 기계 너머에 있는 남자가 손가락만 까닥거리면 수백의 사람이 죽는다는 걸.
-분배소는 재가동될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조금 온화해진 목소리였다.
“정말입니까?”
-향후 기술적 지원도 약속드립니다. 그러니 그쪽 도시에서 마법에 홀려 이탈하는 사람을 막아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발이 지면에 닿았다.
다리 여섯 달린 기계들이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들이 물러난 자리에 시체들이 눕혀져 있었다.
기계들이 숲으로 이동했다. 멀거니 지켜보던 병사 중 하나가 소리를 질렀다.
“이 악마!”
부러진 창이 기계를 향해 날아갔으나, 팅 소리와 함께 허무하게 튕겨 나갈 뿐이었다.
-뒷일은 맡기겠습니다.
베르드는 방금 전까지 기계 팔이 붙잡고 있던 옆구리를 매만졌다.
지독한 탄내와 가지런히 누워 있는 시체들. 그리고 묵직한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는 기계.
“세상이 바뀌었어.”
홀린 듯이 기계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외쳤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이다음에 무엇을 할 겁니까? 우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베르드는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한데 모인 병사들 앞에 섰다.
“돌아갑시다.”
“당신이 뭔데…….”
“살아서 움직일 수 있을 때 돌아갑시다.”
그 말에 웅성거리던 병사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베르드는 살아남은 장교급을 모아 부상자 후송과 시체 처리를 상의했다.
조용한 뒷정리가 시작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