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7화 (537/558)

제537화

베르드는 인상을 쓰면서 통신기를 바라봤다.

“뭐라는 거야.”

통신 장애 때문에 안 그래도 목소리가 뜨문뜨문 전해지는데, 상대방이 워낙 급하게 내뱉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릴 중장, 똑바로 말해주시오. 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우…… 퇴…….

“이보시오, 이봐! 이릴 중장!”

베르드는 잡음만 토해내는 통신기를 노려봤다. 거대한 통신 장치를 짊어진 통신병에게 다가가 한 소리 했다.

“이거 어찌할 방법 없는 건가?”

“죄송합니다. 여러 채널로 시도해 보고 있지만 하나같이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와의 통신이다 보니 채널도 한정적이라…….”

“방법을 찾아보게. 자네가 돈 받고 여기에 있는 이유가 그거일 테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고 차분하게 말했다.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아랫것들에게 화내는 건 고상하지 못하다. 물론 방법을 찾아오지 못하면 사람을 갈아 끼울 것이다.

“의원님. 카롤 대장님께서 출발하겠다고 합니다.”

“알겠네. 아, 그쪽 통신병은 상태가 어떻지?”

“저희도 전부 먹통입니다. 인근 부대와의 연락도 간신히 될 정도라, 타 도시와는 소통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군 담당관이 물러났다.

연대가 중요한 작전은 아니니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각자 맡은 지역을 경유해 둔을 압박하면 될 일이니까.

사전에 긴밀하게 조율한 작전인 만큼 실패할 가능성은 없었다.

아리엘 의원을 주축으로 모인 적 병력의 세부 구성까지 알고 있는 상태.

세 도시가 끌어모은 병력이라면 지금 둔을 포위 중인 연합 전선을 쉽게 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둔 상공에 떠 있는 하늘석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어차피 이해 못 할 물건이었다.

“출발합니다.”

물자를 실은 트럭들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베르드는 바퀴 달린 저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멋대로 터지거나, 방향타가 고장 나 엉뚱한 곳으로 꺾여버리면 쇳덩이 안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고 그냥 죽어버릴 텐데…… 그런 무서운 물건을 어찌 탈까?

“워워.”

베르드는 자신의 애마를 다독였다. 괴상한 트럭에 비하면 말은 교감할 수 있는 안전한 생명체였다.

기수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낙마할 일도 없고. 배터리 문제로 장시간 이동이 불가한 트럭에 비하면 말은 건초와 물만으로도 먼 곳을 이동할 수 있었다.

마법 공학은 필요하나 만능은 아니다. 그게 베르드의 생각이었다.

수행원 둘과 함께 본대의 이동을 바라볼 때였다.

길쭉한 트레일러를 달고 이동하던 트럭이 갑자기 좌우로 크게 휘청이더니, 이내 굉음을 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앙!

트럭이 거목을 들이받고 멈춰버렸다. 베르드는 혀를 찼다. 기어이 사고가 났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트럭의 안전성을 설파하던 공학자들의 면면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역시 믿을 게 못…….

“거기 비켜!”

베르드는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트럭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번에도 제어가 안 되는지 갑자기 출발했다.

한 대는 정비 실수라고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대가 동시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의원님!”

다급하게 외치는 수행원이었다. 베르드는 급하게 고삐를 챘다. 뒤쪽에서 달려온 트럭이 거대한 균열로 직진했다.

쿠웅, 해더 트럭의 앞바퀴가 균열에 빠졌다. 그럼에도 트럭은 멈추지 않았다.

운전자가 뛰쳐나왔음에도 트럭의 바퀴는 맹렬하게 회전했다.

끼기기긱!

트럭이 균열 사이로 빠짐과 동시에 연결된 트레일러 역시 빨려 들어갔다. 길이 10m에 달하는 트레일러가 수직으로 높게 치솟았다가, 검은 균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제어가 안 됩니다!”

“으아악!”

“거병으로 막아!”

베르드는 멍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이번 작전에 투입된 해더 트럭은 총 오십 대였다.

그중 절반은 거병 지원용이었고, 나머진 전쟁 물자를 옮기는 용이었다. 배터리와 긴급 교체에 필요한 모듈, 거기에 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각종 기기까지.

도시 1년 치 예산이 바퀴 달린 쇳덩이에 실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그 막대한 돈이 부서져 나가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베르드는 눈앞이 벌겋게 변하는 걸 느끼며 소리를 질렀다.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군수품이 박살 났다.

몇몇 거병은 날뛰는 트럭을 막으려다가 같이 뒤엉켜 균열 아래로 추락했다.

소란이 가라앉은 건 10분 정도가 흐른 후였다.

베르드는 말에서 내렸다.

터벅터벅 걸어가 이름 모를 시체 옆에 섰다. 질주하는 트럭을 피하지 못해 깔려 죽은 병사였다.

“…….”

시동을 끈 채 출발 대기 중이던 트럭 열 대를 제외한 나머지 마흔 대가 반파 혹은 소실됐다.

거대한 균열 아래로 추락한 트럭만 해도 열 대가 넘었다.

뺨을 두어 번 쳤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 꿈속이 아닐까. 하지만 뺨은 얼얼했고 지독한 탄내와 신음은 선명했다.

담당자를 찾아야 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참사를 일으킨 정비 담당을 찾아 경위를 듣고 사형시켜야 했다.

“카롤 장군!”

트럭의 관리 주체는 방위군이었다. 책임 소재는 명백했다. 이건 군의 잘못이었다.

카롤을 찾아 엉망이 된 본대 쪽으로 다가설 때였다.

땅땅땅, 경쾌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잠깐의 침묵 후 사방에서 쇳소리가 퍼져 나왔다.

군 경보 체계를 전부 아는 건 아니지만, 이게 어떤 신호인지는 알고 있었다.

적의 습격.

베르드는 허겁지겁 몸을 돌렸다. 자신은 전투 요원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향후 있을 권리 해석을 위해 현장에 참여한 의원이었다.

수행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열심히 뛰었다.

“……어디 갔어?”

애마와 함께 대기하고 있어야 할 수행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네 필의 말도 함께 사라졌다.

뒷덜미에 난 털들이 비죽 솟는 기분이었다. 베르드는 불길한 예감을 받으며 전면에 있는 수풀 너머를 바라봤다.

연녹색이 움직였다.

무언인지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연녹색으로 칠해진 무엇인가가 숲 안쪽에서 이동 중이었다.

베르드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맹수 앞에 놓인 기분이었다. 몸을 돌려 도망치는 순간 등을 향해 저 안에 있는 ‘무엇’이 달려들 것 같았다.

발을 질질 끌며 몸을 뺄 때였다.

쿵.

묵직한 소리가 숲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문제는 소리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적으로, 균일하게 들려온다는 점이었다.

쿵, 쿵, 쿵, 쿵.

질서정연한 무언가가 다가온다.

베르드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돌려버렸다. 헛숨과 비명이 동시에 튀어나와 기괴한 소리가 됐다.

“여기, 여기!”

애타게 사람을 찾으며 저 멀리 있는 본진을 바라볼 때였다.

무언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게 아군 거병임을 깨달았을 때 베르드는 걸음을 멈춰야 했다.

공중으로 5m 정도 떠오른 거병이 볼품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쾅!

베르드는 눈앞에 추락한 거병을 바라봤다. 헤드 부분이 꺾이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몸체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지면에 처박힌 몸통 사이로 희멀건 액체가 흘러나왔다. 액상 근육이라는 걸 눈치챈 순간 베르드는 다시 뒷걸음질 쳤다.

이내 푸시시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액상 근육이 기화하며 엄청난 열을 뿜어냈다.

체임버 덮개가 덜컹거렸다. 안에 탄 거병 기사가 탈출하려 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불꽃이 거병 전체를 덮어버렸다.

마지막 순간 체임버 덮개가 살짝 열렸다. 베르드는 피부가 녹아내린 거병 기사와 눈이 맞았다. 기사는 입을 살짝 벌리다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비명조차 내지 못한 죽음이었다.

베르드는 주먹으로 허벅지를 내리쳤다.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다리가 다시금 긴장했다.

본진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다.

요란한 소음이 들려온 후에는 어김없이 아군 거병이 반파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던져지는 게 반, 간신히 도망치는 게 반.

쿵!

베르드는 어깨를 움츠렸다.

뒤에 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본진을 습격한 정체불명의 무엇이 등 뒤에 있다는 걸.

죽는 걸까?

아니, 죽는 건 둘째 치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트럭이 제멋대로 날뛴 후에 절묘하게 이어진 습격.

게다가 이쪽 위치를 훤히 알고 있다는 듯이, 아니, 위치뿐만 아니라 전력 구성까지 알고 있다는 듯이 완벽하게 공략해 왔다.

대체 몇 대의 거병이 투입된 걸까?

사방을 포위해 공격해 올 정도라면 오십 대 이상의 거병이 쓰였다는 건데, 아리엘 측에 그만한 여유 병력이 있었던가?

쿵.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베르드는 경직된 몸을 간신히 움직여 뒤를 바라봤다.

연녹색이 눈을 찔렀다. 그다음에 보인 건 여섯 개의 다리였다.

높이는 3m 정도 될까?

기괴한 생김새였다. 육각형 몸통에 직각으로 구부러지는 다리가 여섯 개. 메뚜기처럼 휜 다리가 펴질 때마다 육중한 동체가 앞으로 나아갔다.

베르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을 교차해 얼굴을 막았다.

짓눌린다. 죽는다. 여기서 끝난다.

쿵, 몸 전체를 흔드는 소리와 진동이었다.

베르드는 움츠렸던 목을 펴며 슬며시 눈을 떴다. 다리 여섯 개 달린 기괴한 기계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

살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베르드의 몸이 들렸다.

기계 팔이었다.

측면에서 채찍처럼 뻗어 나온 팔에 붙들린 것이었다. 비명을 질러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거인에게 붙들린 장난감이 된 기분이었다. 아니, 눈앞에 있는 건 사람의 형태도 아닌 기괴한 기계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쇠로 된 벌레?

아니면 다리 한 쌍이 더 있는 개구리?

그것도 아니면 다리가 부족한 거미?

세 쌍의 다리가 구부러지며 소리를 냈다. 이윽고 쿵,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아아악!”

베르드는 길게 비명을 질렀다.

원치 않게 흘러나온 눈물이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다. 흐릿해진 눈으로 확인한 건, 기괴한 기계한테 포위당한 본진이었다.

* * *

카롤은 시동키를 매만지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저게 대체 뭐지?

마법 공학이 발달하며 괴이한 기계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3m에 달하는, 소형화된 거병과 비슷한 크기의 전투용 기계가 존재한다는 건 듣지 못했다.

-커헉!

기사단 채널을 통해 탁한 신음이 전해졌다. 거병 한 기가 또 파손됐다.

괴상한 기계는 여섯 개의 다리를 사용해 재빠르게 이동했다. 집요하게 거병의 측면만 노렸고, 빈틈을 보이면 그 즉시 달려들었다.

놈들의 공격 방식은 무식했다.

전면에 덧댄 외장갑을 무기 삼아 부딪쳐 왔다. 민첩하게 대응해 공격을 피해도 놈들한테는 앞뒤 구분이 없는지, 곧바로 반격을 해왔다.

게다가 기체 측면 하단부 쪽에서 기계 팔을 뽑아내 휘두르는데, 시야 바깥에서 날아올 때가 있어 대응하기 어려웠다.

“루스!”

-예!

부하와 호흡을 맞춰 동시에 공격했다. 재빠르게 움직이던 기계가 드디어 공격을 허용했다.

몸체가 길게 갈라졌다. 기세를 몰아 다리도 으깨버렸다.

쿠궁.

왼쪽 다리 두 개를 잃어버린 기계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카롤은 도끼를 들어 올려 기계의 몸통을 찍어버렸다.

카가각!

불꽃이 튀며 외장갑이 갈려 나가고 합판이 찢어졌다. 기괴한 기계의 내부가 드러났다.

“……저건.”

센서가 기계 내부에 자리 잡은 장치를 잡아냈다.

말도 안 돼.

오류여야 했다. 하지만 거병의 오토마타는 눈앞에 보이는 게 명백한 사실임을 다시금 알려주었다.

-내부 설계와 마나 파형으로 분석해 봤을 때 저건 오토마타입니다. 이후 이 물체를 거병으로 인식하겠습니다.

“거병이라니.”

카롤은 눈을 찌푸렸다.

이게 정말 거병이라 분류할 수 있는 ‘기계’라면, 탑승자는 어디에 있다는 건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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