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6화 (536/558)

제536화

-갤리온 코어 활성화 끝마쳤어요. 예비용 배터리 연결 후 기동 준비에 들어갈게요.

배쉬플의 보고였다.

이제 하버 트럭만 오면 된다.

지휘소가 있는 방향을 응시할 때였다. 하버 트럭이 얕은 균열을 가로지르며 나타났다.

“그쪽 인간들하고는 얘기 끝냈나요?”

엔엔이 하버 트럭에서 내리며 물었다.

“예. 아주 협조적이던데요?”

“자발적 협조인지, 반강제적 협조인지는 묻지 않을게요. 어쨌든 다행이네요. 말로 해도 못 알아먹으면 뒤집어 엎으려고 했는데.”

가하란은 트레일러에 실린 박스로 다가갔다. 측면 덮개를 열고 정렬된 커넥터들을 바라봤다.

“유토니아의 코어를 연결해야 해요.”

“허브 변환은 제가 할 테니 가하란은 갤리온을 가동할 준비 해요. 아, 인간들이 어딜 담당하기로 했죠?”

“남서부를 부탁했습니다. 그쪽에 집결된 병력이 많다고 했어요.”

“갤리온으로 북동부를 틀어막고 여유가 되면 지원을 하러 가야겠네요.”

엔엔이 단자함에 양손을 집어넣고 그대로 뽑아냈다. 하버 트럭과 하늘석의 중계 기기가 속살을 드러냈다.

“통신기 계속 켜놔요. 레이어 작업할 때 물어볼 게 몇 개 있으니까.”

가하란은 허리춤에 통신기를 찬 후 하늘석 하부 격납고로 들어갔다.

설비를 옮기는 기계인형을 지나 4번 격납고로 들어갔다. 차폐벽 안쪽에 벽을 따라 늘어선 갤리온이 보였다.

E30들이 차례차례 다가왔다.

감각기를 손에 끼고 지시 사항을 전했다.

“서두르자. 할 일이 많아.”

명령을 받은 E30들이 다리를 재빨리 움직이며 기동 준비에 들어간 갤리온 근처로 향했다.

* * *

거병 기동 시험을 본 후 반드시 치르는 통과 의례가 하나 있었다.

바로 웨이브 겔 없이 거병을 조종해 보는 것이다.

마나씰과 웨이브 겔.

탑승자를 보호하기 위한 마법적 장치라는 걸 이론으로 배워서 알고 있으나, 두 가지 안전장치가 정확히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았다.

글이 아닌 몸으로 배워라.

우등 교관이 웃으면서 했던 말이었다.

밀레나 역시 웨이브 겔이 없는 상태로 거병을 움직였고, 속에 든 걸 게워내야 했다.

거병이 발을 뗄 때마다 위아래로 몇 m씩 흔들리는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마법적 보호 장치 없이 거병에 올라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확실하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물론 웨이브 겔을 사용한다고 해서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거지 안락함을 제공하는 건 아니니까.

옛 거병은 분명 그랬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밀레나는 거침없이 땅을 박차는 블루아이 안에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가 없는 게 문제야. 이 정도로 뛰면 몸에 충격이 가해지는 게 정상인데, 아무렇지 않잖아. 온순한 말에 탄 기분이야. 거병을 조종 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설마 인지 통합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모든 게 정상 범위 안에 있습니다.

촤아악,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양옆으로 누웠다. 속력이 점점 빨라진다.

한없이 자유로웠다. 인지 통합도 매끄럽고, 감각 확장 역시 6단계에 이르렀는데도 부담감이 없었다.

-새로운 오더러를 위한 오토매틱 매뉴얼을 학습했습니다.

“날 위한 매뉴얼?”

외장갑을 타고 미끄러지는 바람마저 세밀하게 느껴졌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토록 완벽한 합일이라니. 노련한 기사들만 체험할 수 있다는 마리아주가 이런 걸까?

“잠깐 헤어진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네.”

-오더러를 위한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밀레나, 저는 더욱 정밀해질 겁니다.

“널 완벽하게 다루려면 내가 더 공부해야겠네.”

쿵!

폭이 넓은 균열 위를 가로지르며 쭉쭉 치고 나갔다. 둔을 집어삼킨 거대한 반구체가 금세 멀어져 간다.

최대 출력으로 계속 뛴다면 대륙 횡단도 며칠 내로 끝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엄마, 거리를 유지해요.

슬리피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신비로운 일체감에 잠깐 잊고 말았다.

“지금이라면…….”

밀레나는 속력을 낮추지 않고 그대로 제동을 걸었다. 하부 모듈의 충격 완화 장치가 유기적으로 가동하며 전면부에 가해지는 대미지를 분산시켰다.

취이익, 발목 개폐부가 열리며 형상화된 마나 파장이 분출됐다. 앞으로 쏠리던 중심이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급제동은 위급 상황이 아니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마모율이 높아집니다.

블루아이가 말했다.

“미안. 전투에 임하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었어. 지금의 네가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지.”

-전 오더러가 바라는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고 의지를 보여 주십시오. 오더러의 뜻을 이뤄 드리겠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황홀경에 빠질 것 같았다.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완벽한 세팅이었다.

블루아이라면, 모든 게 자신에게 맞춰진 상태의 블루아이라면 수천의 적이 몰려와도 괜찮으리라.

-신나는 건 알겠는데 블루아이는 섬세한 친구야. 너무 막 다루면 안 돼.

슬리피가 경고를 보내왔다. 교체 모듈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과 함께.

“망가트리는 일 절대 없을 거야.”

자신이 생겼다. 완벽하게 반응해 주는 기체라면 어떤 전투도 소화해 낼 수 있으니까.

-블루아이의 기억 단자를 다 같이 살펴봤어.

“기억 단자?”

-거기에 들어 있는 전투 정보를 지금 가시화 패드에 전송해 줄게.

왼쪽 가시화 패드에 정보가 출력됐다. 날짜가 내림차순으로 정렬돼 있었고 그 옆에는 ‘o’라고 표시가 돼 있었다.

간혹 ‘x’ 표기가 보이긴 했는데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게 뭐야?”

-이런 표현은 엄마한테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그래도 해야겠어. 어떤 괴물의 기록이야.

“괴물?”

-날짜는 출격일. 옆의 표시는 수리 여부. 외장갑 교환 같은 단순 소모성 부품 수리는 체크하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전투 피해로 인한 기체 수리만 표시한 거지.

“…….”

설명을 듣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이건 엄마, 아른고개의 푸른기사가 남긴 업적이었다.

-전투 데이터를 지금 보여줄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걸 연속적으로 해냈어. 엄마의 엄마, 할머니라고 해야겠지? 할머니는 괴물이야.

“괴물이란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부정할 수는 없네.”

-블루아이는 그런 사람과 함께해 온 친구야. 다중 연산 능력은 분명 우리보다 떨어지지만, 계산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에서 우리보다 뛰어난 처리 속도를 보여. 이상한 일이지?

“조종 기술에는 숫자를 매길 수 없지.”

압도적인 전과였다.

전쟁 영웅이란 호칭을 정치놀음으로 따내지 않았다는 증거.

도전 욕구가 샘솟았다.

필렌. 어머니가 아닌 동경하는 기사로서 그녀의 발자취를 어설프게나마 따라가 보고 싶었다.

-전방 600m.

“나도 확인했어.”

저 멀리 대열을 맞춰 진군 중인 병사들이 보였다. 거병과 거병을 서포트하는 트럭이 앞 열에 있었고, 보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육안으로 식별한 거병의 수만 해도 50기. 저 정도 병력이면 도시 방위군 소속 거병을 모조리 끌고 나온 것이리라.

저쪽 역시 목숨을 건 도박에 나선 것이다.

분배소가 걸린 문제이니 그럴 수밖에.

-우린 거리를 두고 대기할게. 예비 무기, 쉴드 카트리지, 그리고 교체용 하부 모듈 세트가 하나 있어.

“쓸 일 없을 거야.”

-그러길 빌게. 작업하는 건 피곤하니까.

슬리피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움직이던 적들이 우뚝 멈춰 섰다.

저들도 블루아이를 발견한 것이리라. 하긴, 20m를 훌쩍 넘는 병기를 못 본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공격할 겁니까?

“말로 설득이 가능하면…….”

블루아이와 대화 중일 때였다. 적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 트레일러 근처로 거병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긴 커넥터를 연결했다.

“저쪽은 대화할 생각이 없나 보네.”

-마나 변화 감지. 밀도가 올라갑니다.

벨틴이다.

오라클에서 사용하는 것과 형태가 조금 달랐는데, 아무래도 밀반출된 걸 개량한 모양이다.

거병 다섯 대가 일렬로 늘어섰다.

지면에 발을 박아넣고 기병대가 쓸 법한 거대한 랜스를 들어 올렸다.

뾰족한 창끝에 마전기가 모여드는 게 보였다.

-방출 임박. 곧 옵니다.

“널 너무 얕보는 거 같은데?”

벨틴의 화력은 탈로스를 녹일 정도로 강력하다. 정면으로 받아낸다면 강화된 블루아이의 외장갑이라고 한들 내열성을 초과하는 열에 흐물흐물해질 것이다.

정면으로 받아낸다면 말이다.

꾸웅!

자세제어 사전 동작도 필요 없었다. 인간의 신체가 움직이듯, 블루아이는 조종간을 잡고 의지를 발현한 순간 오른발을 크게 떼어 움직였다.

사선으로 달린다.

적진에 늘어선 거병들이 부랴부랴 방향을 꺾는 게 보였다.

하지만 밀레나는 알고 있었다.

마나 방출형 무기 벨틴의 취약점.

파아아아!

블루아이가 지나간 자리를 보라색 빛이 휩쓸었다.

방출 단계에 돌입한 벨틴은 도중에 멈출 수 없다. 목표로 삼은 물체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조준하기 어려운 것이다.

형태가 다른 개량형 무기라고 한들 근간이 벨틴인 이상 취약점은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유단, 그리고 체시.

유능한 적이기에 오히려 믿을 수 있었다. 줄리어스의 아이들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를 다른 공학자들이 해결했을 리 없다.

물론 가하란은 예외지만.

“일단 대화하고 싶게 만들어볼까?”

-좋습니다.

실전에 들어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니, 웨이브 겔을 뚫고 충격이 전해졌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야 목숨을 건 싸움 한가운데에 있다는 실감이 든다.

적들이 포격 방향을 틀었다. 한점을 노리는 게 아닌, 진행로 전체를 덮을 생각인가?

판단은 좋았다.

이제는 운용되지 않는 거대 거병이라고 한들, 옛 기사들은 공성용으로 사용된 거병의 취약점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뛰어난 내구성을 지녔지만 기동력에는 한계가 있다.

적 거병들의 랜서 끝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블루아이의 경고에 맞춰, 밀레나는 조종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기존 거병이라면 불가능한 동작.

좌우 회피가 아닌 도약.

분사된 마나 파장이 블루아이의 동체를 강하게 밀어냈다. 아찔한 부유감에 실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발밑으로 적 군대가 놓였다.

“트레일러부터!”

콰아앙!

적 본진에 낙하를 마친 블루아이가 왼발을 힘껏 휘둘렀다. 발등에 치인 트레일러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고, 연결된 해더 트럭 역시 장난감처럼 튕겨 나갔다.

거병들이 산개했다.

당황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걸 보면 노련한 기사들이었다.

후면을 노리고 날아드는 작살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선명하게 전해진다.

동체를 회전시키며 오른팔로 작살을 쳐냈다.

따앙!

튕겨 나간 작살이 적 보병 쪽을 훑었다. 아스라이 비명이 들려왔다.

움직일 땐 실감이 났으나, 손가락보다 작게 보이는 인간이 찌부러지는 모습은 멀게만 느껴졌다.

강한 힘이, 폭력이 사람을 무디게 만드는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마음껏 날뛴다면 수백의 보병을 짓밟을 수 있었다.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블루아이에게 의지를 전하고 발을 들어 올리면 끝날 일이었다.

“우리 얘기를 하죠.”

밀레나는 목소리를 꺼냈다.

학살하러 온 게 아니었다. 이해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온 거였다.

-오더러.

“알고 있어.”

기체를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방출 준비를 마친 거병이 있었다.

저 안의 기사는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승리를 예감하고 환희에 찼을까, 아니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의식이 발현된 순간, 블루아이가 읽어내고 실행했다.

국소적 마나 차폐 기기, 쉴드가 측면부 외장갑 안쪽에서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강렬한 빛이 시각 장치를 가렸다.

형상화된 마나가 블루아이에 직격하는 순간, 쉴드가 작동했고 빛은 가닥가닥 나뉘어 방사형으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간 빛이 쓰러진 거병과 보병들 사이를 헤집었다.

굉음과 함께 비명이 난무했다.

“얘기할 생각이 없나요?”

밀레나는 증기를 내뿜는 쉴드를 내부로 회수하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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