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4화 (534/558)

제534화

가하란은 슬리피를 바라봤다. 대규모 병력이라니?

-애들한테서 방금 연락이 들어왔어. 북동, 남서, 남동. 세 방향에서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고. 정확한 병력 규모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남동쪽에서 오는 병력에는 거병이 스무 기 이상 섞여 있어.

슬리피가 이어서 말했다.

-미안해. 더 빨리 말해줬어야 하는데.

“통신 장애 때문이잖아. 미안해할 것 없어.”

하늘석을 지상에 내린 덕에 미니 비트가 활성화됐으리라. 상공에 있을 때보다는 특수 대역 파장의 간섭을 덜 받으니까.

슬리피의 어깨를 다독이는 사이 기펠이 도착했다. 기펠 역시 같은 소식을 가지고 왔다.

사방에서 병력이 밀려들고 있다는 것.

“접촉은 해봤나요?”

“의도를 묻기 위해 연락병이 가긴 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일전에 연합 전선을 거부한 도시가 움직인 거니.”

“한번 반대했던 이들이 동시에 진격한다는 건…….”

말끝을 흐리자 기펠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둔의 새로운 주인이 되고 싶은 모양이죠. 허허, 그들 눈에는 저게 통제 가능한 무엇으로 보였나 봅니다.”

유단이 퍼트리는 파장은 사람의 심상 세계를 건드려 행동을 유도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획일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버텨낼 인간은 버텨낸다.

특히나 군대같이 통솔되는 집단은 개별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질 테고.

그런데 세 도시가 동시에 대규모 병력을 일으켜 둔을 압박하고 있었다.

심리 유도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다.

욕심.

기펠의 말대로 둔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새로운 연대를 구성한 것이리라.

“방어할 여력이 남아 있습니까?”

“진형부터가 불리하니 쉽지 않겠죠. 한쪽을 틀어막는다고 해도 뒤가 훤히 비어 있으니까요. 병력을 분산할 여력이 남아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군요. 이곳 지휘부가 판단할 일일 테지만…….”

“원로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기펠이 수염을 매만졌다.

“근 일주일간 이곳에 모인 군사들은 쉼 없이 움직였어요. 홀려서 달려드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날뛰는 마수를 상대로, 거기에 슬쩍 찔러보는 타 도시를 상대로 분전했죠. 기력이 다했을 테죠.”

“힘들다는 뜻이군요.”

“유능한 자들이지만 한계라는 게 있으니까요. 나도 손을 보태주기는 하겠으나, 무장한 거병을 상대로 연이은 전투는 힘들어요. 나이도 나이고 무엇보다 난 이곳 사람이 아니니.”

연합 도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펠이 지금껏 도움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실리만 따지는 사람이었다면, 오히려 적대 세력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동부의 도시끼리 상잔하여 피해를 보게 된다면 누구보다 이득을 보는 건 연합 도시일 테니까.

“석주께서 잘 마무리한다면야 나도 계속 도울 거예요. 그게 양측을 위한 길이니까. 하지만 축이 기울어진다고 판단하면,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해하시겠죠?”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최강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타챠가 둔에 묶여 있었다. 연합 전선을 짠 방위군의 피로도를 생각하면, 총공세를 버텨내는 건 어려울 것이다.

“엔엔 님. 작업을 잠시 중단해야겠어요.”

엔엔이 하늘석 하부 격납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병들을 깨울 건가요?”

“그래야겠어요. 유토니아의 서포팅이 필요해요.”

“하버 트럭은 어디에 있죠?”

“지휘소 옆이요.”

“가져올게요. 하늘석을 재기동할 수 없으니 하버 트럭을 메인 허브로 삼아요. 유토니아도 그쪽으로 옮기고요.”

“준비해 둘게요.”

엔엔이 몇 걸음 떼다가 멈춰 섰다.

“근데 괜찮겠어요? 과부하 테스트 때 힘겨워 보였는데.”

“이동하며 계속 재조정해 놨어요. 확장 코어를 이용한 병렬 체계도 익숙해졌고요.”

“유토니아가 무언가 계속 준비 중이었는데, 그거였군요. 알겠어요. 가하란을 믿어볼게요.”

기펠과 함께 엔엔이 자리를 떠났다.

가하란은 밀레나가 탄 거병을 올려다봤다.

“블루아이가 필요해.”

-나한테 맡겨. 그 애를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건 나니까. 아니, 두 번째로 잘 다루는 건가?

첫 번째는 필렌일 것이다. 가하란은 개방된 격납고로 들어갔다. 내부 물자를 빼내는 E30들을 지나쳐 안쪽에 누워 있는 블루아이 곁으로 걸어갔다.

희미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유토니아를 통해 상황 보고를 받았습니다.

“다시금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아.”

-그게 제가 해왔던 일입니다.

“누나를 잘 부탁해.”

블루아이 전용으로 개발한 마나 포집기 단자를 연결했다. 옛 거병들이 사용했던 마나 응축봉을 대신해 개량한 배터리를 삽입한 후 고정대에서 뛰어내렸다.

시동키를 손에 쥔 후 제한해 뒀던 접근 권한을 모두 풀었다.

우우웅, 구동계가 묵직한 울음을 냈다. 액상 근육이 맹렬하게 퍼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블루아이가 고정된 캐터필러가 회전을 시작했다. 격납고를 오가던 모든 기계인형이 좌우로 비켜섰다.

레일을 따라 고정대가 움직였다.

이윽고 블루아이가 격납고 입구에 도착했다.

깡 소리와 함께 고정쇠가 풀려나갔다.

가하란은 시동키를 들고 사슴이 조종 중인 거병 앞에 섰다.

“준비는 끝내놨어.”

-지금 나가도 될까?

“괜찮아.”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에 타고 있는 밀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외력이 손끝에서 길게 이어져 밀레나의 몸을 감쌌다. 유단이 발생시킨 파장도 외력을 뚫어내지는 못한다.

“네가 사용하는 힘, 이런 느낌이었구나.”

가하란의 손을 붙잡으며 체임버에서 내려오는 밀레나였다.

시동키를 넘겨줬다. 본래 주인을 찾은 시동키가 은은한 빛을 냈다.

“블루아이 안이라면 아무 문제 없어. 옛 거병의 마나씰은 성능이 뛰어나니까.”

밀레나가 블루아이를 올려다봤다.

“어릴 땐 막연히 생각했어. 하루라도 빨리 블루아이를 타고 전투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젠 알아. 모든 거병은 격납고 안에 있을 때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걸.”

밀레나가 시동키를 팔목에 찼다.

“안에 있어야 할 친구가 밖으로 나왔어. 나온 이상 그 명성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 줘야겠지. 푸른기사의 이름에 먹칠할 수는 없잖아?”

신체술을 끌어올린 밀레나가 단번에 뛰어올랐다. 고정대에 누워 있는 블루아이에 올라서더니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아무도 못 오게 할게. 누가 됐든, 어떤 거병이든 내가 막을게. 그러니 넌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저 괴상한 거 얼른 치워버려.”

가하란은 오른손을 들어 올려 흔들었다. 밀레나가 뒷짐을 진 후 턱을 가볍게 당겼다. 그게 옛 중앙 군부의 군례임을 가하란은 알고 있었다.

푸쉬이.

지지대가 내려앉으며 소리를 냈다.

블루아이가 그 거대한 몸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전고 27m의 전략 병기.

새하얀 외장갑을 두른 거인이 두 발로 지면에 섰다.

콰앙!

블루아이가 남동부를 향해 움직였다. 가하란은 슬리피를 바라봤다.

-정비팀은 나한테 맡겨. 내가 엄마를 서포트할게.

옛 거병은 단독으로 운영하지 않는다. 써전을 비롯한 정비팀과 운반팀이 항상 붙어 있어야 했다.

그 역할을 슬리피와 G-21이 주축이 된 서포트팀이 맡아줄 것이다.

블루아이의 기본 모듈을 재설계할 때부터 함께 해온 팀이니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량된 마나 포집으로 한계 운영 시간이 15시간이 된 괴물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게다가 블루아이의 오토마타 역시 미니 비트 내에서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며 자신을 개발해 나갔다.

줄이 창조한 아이들만큼이나, 가하란이 직접 제작한 유사 정령만큼이나 뛰어난 코어.

가하란은 거침없이 나아가는 블루아이를 바라봤다.

밀레나가 조종간을 잡으면 열악한 상황에서도 마리아주가 일어날 것이다.

신경 전달 체계를 뛰어넘는, 인간과 오토마타의 완벽에 가까운 호흡을 저 둘이라면 보여줄 터였다.

남동부는 해결됐다.

이제 남은 곳은 북동과 남서.

“‘갤리온’을 깨워야겠어.”

-전부 다요?

배쉬플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120대 전부 다.”

-알겠어요. 코어 활성화 시작할게요.

격납고 안쪽으로 뛰어가는 배쉬플이었다. 가하란은 감각기를 끼고 E30들이 옮겨준 장치 앞에 섰다.

하버 트럭을 허브로 쓰려면 변경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유토니아, 계산 좀 도와줘.”

가하란은 머리를 쓸어올린 후 툴을 손에 쥐었다.

* * *

“노친네들이 진짜.”

아리엘은 개인 무장을 챙긴 후 지휘소 밖으로 나왔다.

최소한의 대화조차 그들이 거부했다. 둔을 향해 삼면에서 달려들고 있는 타 도시의 병력들.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을 때 예상은 했으나 이 정도로 무모할 줄은 몰랐다.

“마스터 헤리븐. 코튼시에 협력한 마법사 클랜과 연락이 됐나요?”

헤리븐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퍼밀리어를 보내봤으나 도중에 연결이 끊겼어요. 제거당한 거죠.”

“마법사라면 알 텐데요? 저 망할 대규모 마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위험하다는 건 달리 바라보면 기회일 수도 있죠.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욕심이 납니다. 저걸 다른 식으로 이용한다면, 신인류를 초월한…… 심상 세계에 구속되지 않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도달할 수 있다고요? 단정적이시네요.”

“……정정하죠. 도달할 수도 있어 보입니다.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집합체죠. 넘겨주기 싫을 겁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그 위험을 자신들이 관리하겠다는 거겠죠.”

형태가 바뀐 자원 싸움이었다.

상황을 설명해도 그들은 듣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반길 것이다. 마스터 헤리븐의 말처럼 자기들이 위험을 관리하겠다고 나설 터였다.

“해체는 여전히 어렵겠죠?”

“접근할 수 있는 마법사의 수도 점점 줄고 있어요. 멘탈 관리조차 힘겨워지고 있죠. 심리 유도 마법이 조금 더 강화된다면, 이곳에서도 철수해야 할 겁니다.”

차라리 길목을 열어버릴까?

현실을 깨닫게 된다면 말도 안 되는 욕심이 꺾이지 않을까?

재정비가 필요한 시기였다.

의무와 정의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었다. 이곳에서 몸을 던져 희생하고 있는 군인들 역시 인간이었다.

피로해지면 정신력이 깎이고, 이내 유단이 뿌려대는 마법에 홀릴 것이다.

아리엘은 연합 전선의 수장들을 모았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다들 같은 심정이었다.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깨달았으니까.

“길을 열죠. 저들이 해결한다면 우리도 손해는 아닙니다. 결국 목적은 같으니까요.”

“이후 이권 문제는 어떻게 할 겁니까? 만약 저놈들이 정말로 둔을 감싼 저 마법을 치워내고 둔을 탈환하면, 모든 게 저놈들 손에 넘어갈 겁니다.”

“그땐 협정을 맺어야겠죠. 거절하면 전쟁을 해야 하고요. 둔에 있는 것들을, 특히 학회의 지식을 빼앗길 순 없으니까요. 분배소를 잃으면 우린 끝입니다.”

“길을 여는 건 위험해요. 애초에 이 생고생을 한 이유가 뭡니까?”

“목소리 낮추세요.”

“낮춰야 하는 건 당신이고. 어디 데브린 같은 소규모 도시 따위가 이런 곳에 끼어서.”

“그 입 조심하시오!”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연합 전선은 각자의 이해가 맞았기에 뭉친 한시적 동맹일 뿐, 수틀리면 언제든 뒤돌아설 수 있는 관계였다.

지금 이들에게 대의니, 명분이니 그런 허울뿐인 말은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살아가려면 물질적인 게 필요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가하란이란 존재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면, 이들을 통솔해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뚜렷한 결과가 약속되지 않는다면 결속은 틀어질 것이다.

“일단 진정하시죠.”

아리엘이 목소리를 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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