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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33화 (533/558)

제533화

실패는 언제나 부산물을 남긴다. 실패의 부산물은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고 하지만 보통은 잊히거나 버려지기 마련이었다.

디졸브 필드 생성을 위한 하늘석 내부 설계 변경.

여러모로 위험성을 점검하고 진행한 일이었으나 켈트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에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됐다.

계획 일자가 어긋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기에 후회는 없지만, 하늘석 설계 미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교훈뿐이었다.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엔엔은 가하란을 바라봤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가하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설계 미스를 통해 얻은 게 있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 쓸 만한 건 없다고 봐요.”

디졸브 필드를 이용한 마나 공핍 현상도 유도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부수는 일이라면 하늘석의 막대한 질량이 도움이 됐겠지만, 지금 눈앞에 들이닥친 문제는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실패 자체가 도움이 될 거예요. 물론 확실하지는 않아요.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니까.”

“실패가 도움이 된다고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도전적이면서 동시에 위험천만해 보이는 눈을.

“잘못되면 하늘석 메인 시스템뿐만 아니라 하늘석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어요.”

“알아요. 하지만 지금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뿐이에요.”

“너무 위험해요.”

가하란이 살짝 웃었다.

“위험하다는 건 가능성을 봤다는 뜻이겠죠? 엔엔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늘석은 무한한 가치를 지녔어요. 올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몰라요.”

“올의 코어는 옮겨둘 거예요. 카트시와 마찬가지로 실체가 있으니까요.”

“그 외의 모든 것이 파괴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계산해 봐야죠.”

엔엔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민했다.

“정확한 마나 밀도를 기반으로 식을 세워 봐야겠지만, 가하란 말대로 가능성은 있어요. 외부로 퍼져나가는 특수 대역의 파장 역시 에너지의 일부니까요.”

“위상 전체를 거둬내는 건 어렵지만, 사람을 홀리는 마법은 처리할 수 있을 테죠.”

가하란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바로 시작할 건가요?”

“예. 상황이 급변하기 전에 손을 써두고 싶어요.”

“알겠어요. 하늘석을 내릴게요.”

엔엔은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 * *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밀레나는 트레일러 박스에서 내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늘석이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뭐야, 왔네?

칼칼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날렵하게 생긴 거병이 양손에 기절한 사람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사슴 씨!”

-난 사슴이 아니라 아슈…… 아니다, 됐다. 너희한테 뭘 바랄까. 그보다 꼬마는?

“저쪽에 있을 거예요.”

밀레나는 하늘석의 착륙 지점을 가리켰다.

-저건 또 왜 내려와?

“모르겠어요.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그래? 그러면 가봐야겠네. 안 그래도 꼬마한테 권한을 늘려달라고 부탁하려 했거든. 그 녀석 없이도 움직이게 됐지만, 제한적이라 마음에 들지 않아.

들고 있던 인간을 던져버리고 기체를 돌리는 사슴이었다.

“잠깐만요!”

-왜?

“지금은 괜찮지만 가까워지면 문제가 된다고 들었어요.”

-어, 그렇다더라. 인간은 문제가 된다고.

“거병에 타고 있어도 노출되는 양만 조금 감소할 뿐 여전히 위험하다, 맞죠?”

짧은 침묵이 이어진 후, 거병이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체임버 덮개가 활짝 열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어. 널 데려다줄게. 한정적이지만 내 힘으로 이 어그러진 기류를 차단할 수 있으니까.

“고마워요.”

잽싸게 체임버 안에 올라탔다.

-고맙긴. 내가 널 도왔으니 꼬마는 내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 거야. 이번엔 다리 쪽을 강화해 달라고 해야겠어. 날아다니다가 뛰어다니려니까 답답하거든. 물론 재미는 있지만.

거병이 속도를 높였다. 누군가가 접근하면 안 된다고 외쳤으나 사슴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근데 저거 해결할 수 있는 거야?

“모르겠어요. 내버려 두면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이해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뭐가 됐든 간에 빨리 처리해. 난 이 층에서 좀 더 즐기고 싶다고. 안원으로 돌아가서 지루하게 시간을 죽이는 건 끔찍해. 너희가 제대로 처리해야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으니까 서둘러 해결해 봐.

인류사에 기록될 정도의 재앙조차 사슴의 시점에서 보면 사소한 이벤트이리라.

사슴에게 중요한 건 가하란의 생존 여부 정도겠지. 가하란이 살아 있어야 거병의 몸을 빌려 현신할 수 있으니까.

“최대한 노력해 봐야죠. 그러니 사슴 씨도 우릴 도와줘요.”

-안 그래도 돕고 있잖아. 날뛰는 인간들 잡아다가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어. 인간 사냥도 나름 재미있더라. 가끔 체임버 열어서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면 기겁하면서 도망쳐. 마법 때문에 미쳤는데도 이런 건 무섭나 봐.

“……하, 하하.”

휙휙 돌아가는 거병의 시야에 가하란이 걸려들었다. 엔엔도 곁에 있었다.

착륙 중인 하늘석을 올려다보는 둘. 거병이 속도를 높여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하늘석에 문제가 생긴 거야?”

음성 장치를 통해 목소리가 밖으로 나갔다. 가하란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급히 말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

“그걸 아는 사람이 나한테 몇 마디 말도 없이 혼자 갔어?”

변명할 거리가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는 가하란이었다.

“내 걱정은 마. 사슴 씨가 그 이상한 기운을 차단해 주고 있으니까.”

-받았으면 보답해야 한다는 거 알고 있겠지, 꼬마야?

확실하게 못을 박는 사슴이었다.

“알겠어요. 하부 모듈 쪽은 나중에 봐 드릴게요.”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있네. 역시 눈치가 빨라.

쿠구구, 땅이 잘게 떨렸다. 하늘석이 지면에 안착하고 있었다.

지면에 내려앉았다는 건 부유 장치를 정지시켰다는 뜻이다. 재가동에 필요한 에너지가 커 어지간하면 착륙을 안 한다고 들었는데.

“하늘석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야.”

가하란이 하늘석을 향해 걸어갔다. 거병도 속도를 맞춰 움직였다.

“아무 문제 없어. 디졸브 필드도 정상적으로 작동시킬 정도로 정비는 완벽했으니까.”

“그렇다면 하늘석을 내린 이유가 뭐야?”

“이제부터 문제를 일으킬 거니까.”

“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늘석 관련해서 문제라고 하면 ‘켈트’가 먼저 떠오른다.

“켈트와 관련된 거야?”

가하란이 놀랐다는 듯 거병을 올려다봤다.

“누나도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생각이랄 것도 없어. 하늘석의 문제라고 하면 켈트 외에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려고?”

켈트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물체였다. 아니, 생명체라고 해야 하나?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는 미지의 거인.

마법 공학의 탐구자인 가하란조차 켈트에 대해 알아낸 것이 없었다.

켈트의 머리인 카트시 역시 스스로 기억을 잠가뒀기 때문에 정보는 전무했고.

알지 못하는 걸 이용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깨울 거야, 켈트를.”

“깨우다니!”

밀레나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지금부터 마나 응축봉이 가득 쌓인 창고에 마나 폭발을 일으킬 거야.

아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마나 폭발은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니까.

“잊은 건 아니지? 켈트가 움직였을 때 하늘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잊을 수 없지. 하마터면 동력원을 잃을 뻔했으니까.”

가하란이 멈춰 섰다.

“근데 이번에는 그걸 역으로 이용해 볼 거야.”

“역으로?”

에너지 전달에 문제가 생겨 켈트가 잠깐 깨어났고, 그로 인해 하늘석 내부 시스템에 심대한 문제가 생겼다.

밀레나가 이해한 사건의 경위였다. 하지만 마법 공학적으로 어떠한 오류가 있었으며, 무엇이 어떻게 말썽을 일으킨 건지 세밀하게 파악하지는 못했다.

가하란과 엔엔이 주고받는 대화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그거, 위험한 거지?”

“켈트가 깨어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악하고 있어. 그건 규명된 현상이야. 중간에 복구시키는 것 역시 알고 있고. 그러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아. 물론, 하늘석 자체에 대미지가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너한테 소중한 것이잖아.”

“소중하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들 천지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가능하다면 끝까지 지켜내고 싶어. 하지만…… 내 우선순위 최상단에 있는 건 하늘석이 아니야.”

가하란도 인간이었다.

물욕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지고한 가치를 지닌 하늘석을 담보로 일을 진행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리라.

그럼에도 가하란은 결정을 내렸고.

“언제나 그렇듯 최악은 발생할 수 있어.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 막을 거야. 하늘석도 보전하고, 이 문제도 해결하고. 그러니 누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

손을 잡아주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들었다. 안은 뒤 넌 할 수 있다고 속삭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병에서 내릴 수 없었다. 정신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나, 가하란의 말처럼 최악은 언제나 급작스럽게 찾아오니까.

괜스레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힘들면 말해. 알지? 난 어떻게든 해결한다는 거.”

내려온 하늘석으로 다가갔다. 사전에 무언가 지시해 놨는지, 개방된 하단 격납고를 통해 기계인형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가하란의 아이들, 초소형 거병도 섞여 있었다.

-유토니아의 코어는 분리 작업 중이야. 큰언니는 마지막에 회로 단절 끝내고 분리할 거고.

나른한 목소리, 슬리피였다. 가하란에게 보고를 끝낸 슬리피가 거병 앞으로 걸어왔다.

-아슈펜트. 그 안에 밀레나 있지?

슬리피가 말을 걸었는데 사슴은 대답이 없었다. 밀레나가 계기판을 툭툭 치자 그제야 반응했다.

-음성으로 그 이름을 듣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곱씹고 있었어.

-나도 사슴이라 부를까?

-그만둬.

-아무튼 밀레나 안에 있지? 내 목소리 들려?

밀레나는 “어, 들려”라고 경쾌하게 말했다.

-블루아이 정비 끝냈어. 그 애도 우리처럼 학습하느라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이제 지연 없이 완벽하게 대응할 거야.

“고마워. 신경 써줘서.”

-엄마니까, 신경 써야지. 근데 더는 못해. 올해 쓸 에너지 다 쓴 거 같아.

저벅저벅 가하란 옆으로 걸어가더니 털썩 주저앉은 슬리피였다. 가하란이 수고했다는 듯이 슬리피의 머리를 다독여 주었다.

밀레나는 대열을 갖춰 이동하는 기계 무리를 바라봤다.

하늘석 내부에서 생활하며 봐오긴 했지만, 이렇게 정렬해 놓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수가 많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기초 정비 기계, E30만 해도 수백 대는 되는 것 같았다.

생산 라인에서만 볼 수 있는 정밀화 기계 장치 역시 운반 트럭에 실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최악을 대비한다.

그 말의 실체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외부인이 보면 좀 곤란해지겠네요. 제국의 군사력이 가장 높게 평가되던 시절에도…… 기계인형을 이 정도로 보유하진 못했으니까요.”

엔엔이 한 말이 감각 장치를 통해 전해졌다. 밀레나는 괜스레 주변을 둘러봤다.

가하란이 하늘석의 주인이라는 건 조만간 알려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아리엘이나 기펠을 통해 수뇌부급은 알고 있으리라.

하늘석과 헤아릴 수 없는 기계 장치를 보유한 인간.

기펠 원로가 바란 중재자로서의 품격을 가하란은 이미 갖춰놓은 것이다.

-잠깐만. 낙인찍힌 아이가 오고 있는데?

사슴이 말했다. 밀레나는 시각 정보를 공유받았다.

저 멀리서 기펠이 날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축 늘어져 있던 슬리피가 말했다.

-대규모 병력이 둔을 향해 움직이고 있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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