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2화 (532/558)

제532화

아리엘은 한 박자 늦게 밀려든 먼지바람을 손으로 흘려내며 밀레나를 바라봤다.

“네 남편, 기계 조작 외에도 할 줄 아는 게 많나 보네.”

“오히려 마법 공학보다는 사냥에 특화된 애지. 그보다 몸은 괜찮아? 상황이 꽤 안 좋았었잖아.”

“한 달 정도는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 도마뱀 씨와 원로님이 아니었다면…….”

아리엘은 둔을 바라봤다.

“둔 땅바닥 어딘가에 잠들어 있었겠지. 그쪽은? 오는 길에 문제없었어?”

“말도 마, 끔찍했어. 시간이 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유단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나올 줄 몰랐어. 아니, 가하란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지.”

“일은 이미 벌어졌어. 남은 건 수습뿐이야.”

그나마 대비했기에 최악은 면할 수 있었다. 손도 못 쓰고 당했다면 둔 주변의 도시들은 괴멸했을 것이다.

“분배소 사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순 없어. 민간에서 항의가 빗발치고 있으니까.”

“구세주의 업적을 이용만 하고 막는다, 이렇게 소리치고 있겠네.”

“비슷해. 상황을 설명해도 납득하는 자는 많지 않아. 그럴 수밖에. 기득권이 그간 해온 짓이 있는데, 시민들이 순순히 말을 듣는 쪽이 이상하지.”

안 그래도 설득이 어려운데, 유단의 괴이한 심리 유도 장치가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둔에서 발생하는 파장부터 잡아야 하는데. 가하란 씨라면 방법이 있겠지?”

“모르겠어. 남편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나도 잘 모르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가하란이 안 된다면 마법 공학적으로는 방법이 없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오만한 평가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리엘은 단번에 수긍했다.

하늘석의 주인이 불가능하다고 결정을 내리면 그게 곧 사실이니까.

“단장님은?”

“단장님? 아, 총무님. 지금 여기에 없어.”

“저런 걸 앞에 두고 어딜 가신 거야? 이건 협회에서도 나서야 할 일인데. 틈새라 규정했으면 협회가…….”

“그래서야. 그래서 총무님이 떠난 거야. 사람을 찾아야 하니까.”

아리엘은 옅게 웃었다.

“협회장님?”

“어.”

“지금 어디 계시는데?”

“몰라. 하지만 총무님이라면 찾을 수 있어. 그 대단한 촉이 길을 찾아내 줄 테니까.”

“……촉?”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말해봤자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웃음으로 넘겼다.

“협회장님께서 도착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어. 그분께서 늘 하신 말씀이 있거든.”

아리엘은 랜더의 말을 떠올렸다.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죠. 베는 것이든, 지키는 것이든. 하지만 그게 전붑니다.’”

“비슷한 뉘앙스로 한 말을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아리엘은 회백색 반구체를 바라봤다.

“틈새든 무엇이든, 벨 수는 있을 거야. 하지만 벤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니까. 현상을 정리해야 해. 그걸…… 저 사람이 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

저 멀리, 이제는 티끌처럼 보이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랜더의 무력은 모든 걸 갈라낸다. 그게 무엇이 됐든, 랜더의 힘을 버텨낼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란 건 파괴만으로 해결되지도, 지속되지도 않는다.

길리우드를 처단한 힘이, 신에게 약속을 이어받은 그 힘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랜더 본인조차 그렇게 말했고.

하지만 분명 도움은 될 것이다.

그 도움이, 가하란에게 실마리를 제공해 주길 기대할 뿐이다.

밀레나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샬롯은? 계속 안 보이던데. 다른 쪽 일을 돕고 있는 거야?”

“아직 추정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저기 안에 있는 것 같아.”

“둔에?”

회백색 반구 안의 상황이 어떤지, 지금은 알아낼 수 없었다. 진입조차 불가능하니까.

“의원님!”

지휘소 쪽에서 부르고 있었다.

“가봐. 언니가 필요한 것 같으니까.”

아리엘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지휘소로 향했다.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로 쌓여 있었다.

연합 전선에의 참가를 독려해야 하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처리 방안도 결정해야 하며, 반발 세력에 대한 제압 작전도 펼쳐야 했다.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었다. 수식의 해답처럼 하나의 깔끔한 대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들.

“의원님들, 다시 시작하죠.”

아리엘은 한데 모인 의원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 * *

-이거 교환해야 해요.

“벌써 터졌나요?”

엔엔은 억제기 모듈을 꺼낸 후 상태를 확인했다. 회로가 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손상된 상태였다.

수거팀을 호출해 모듈을 넘겼다.

-효율성이 떨어졌어요. 교체 시기도 점점 빨라지고 있고요.

해피가 억제기를 땅에 꽂으며 말했다.

“최선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해야 해요.”

둔에서 발생하는 특수 대역 파장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디졸브 필드를 가동해도 증발하지 않는 마나와 마찬가지로 대륙 전역으로 퍼지는 파장 역시 소멸시킬 수 없었다.

단순한 에너지가 아닌 마법이 얽힌 문제였다. 마법사 클랜 쪽에서도 해석을 서두르고 있으나 기대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심상 세계의 발현인 마법은 고유한 힘을 갖고 있고, 그 힘에 개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여겨지니까.

신인류인 어린 마법사들이 자신들의 마법을 통해 둔을 가둔 거대한 마법을 상쇄해 보려 했으나,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규모의 마법.

지금 하는 건 바다를 증발시키겠다고 모닥불을 던지는 꼴이었다.

안 된다는 건 다들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뭐든 해야 했다.

-잠깐만요. 엔엔, 엔엔!

해피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미니 비트에 잠깐이지만 닥이 나타났어요. 순식간에 사라지긴 했지만.

해피가 양팔을 높게 들더니 몸을 흔들었다.

“뭐 하는 거죠?”

-수신 상태를 조정 중이에요. 아, 됐다!

효과가 있는 게 더 놀라웠다. 가하란은 대체 어떤 설계를 해놓은 걸까?

-저번에 우리끼리 몸을 개조할 때 닥이 낸 아이디어예요. 미니 비트 역시 특수 대역을 사용하고, 특수 대역은 파장이죠. 파장에 노출되는 면적을 넓히면 수신율이 아주 조금이나마 높아져요.

“몸을 흔드는 건…….”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아무튼! 닥이에요, 그리고.

해피가 몸을 틀었다.

-아빠도 왔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둔에서 발생하는 파장이 강화된 이후, 하늘석과 연락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증폭기 근처에서나 통신할 수 있는 상황. 엔엔은 해피 곁에 섰다. 해피가 중계기 역할을 해줄 것이다.

“가하란.”

통신기에 대고 말하는 순간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엔엔 님.

통신 상태가 엉망이었으나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하란! 지금 어디죠?”

-둔 남부. 아웃라인에서 진입하는 길목에 있어요.

“어딘지 알아요. 바로 갈게요.”

엔엔은 해피에게 이후 작업을 부탁한 후 곧바로 몸을 날렸다.

둔에서 발생한 끈적한 파장이 몸을 휘감았다. 둔에 가까워질수록 털이 쭈뼛 서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멘탈 관리를 받지 않은 인간이 둔 가까이에 접근하면 이성을 잃게 되리라.

“가하란!”

저 멀리 가하란이 보였는데, 그는 반구체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고 있었다.

옆에 도착하자마자 가하란의 팔을 붙잡고 뒤로 당겼다.

“위험해요.”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확인해 봐야 했어요.”

가하란이 팔을 들어 올렸다.

“이물감 같은 것도 없고, 묻어나는 것도 없어요. 눈앞에 존재하는데 만질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손가락으로 회백색 벽을 훑는 가하란이었다.

“이 느낌,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니요?”

“다른 위상에 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동 시간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었으나 제가 만질 순 없었죠. 그들도 저를 인식하지 못했고요.”

“그 얘기군요.”

“이 회색 막은 유단이 창조해 낸 위상의 껍질 같아요. 같은 위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아니죠. 가까워 보이지만, 한없이 멀어요.”

가하란이 회색 막에 손을 올렸다. 저항감 없이 안쪽으로 스며들어 사라지는 손이었다.

“위상 격리. 완벽한 피난처네요.”

“이게 유단의 목적일까요?”

“아니요.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일 거예요. 로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목적 안에는 줄리어스가 담겨 있을 거예요. 로키는 언제나 줄에 대해서만 말했으니까요.”

가하란이 뒤로 물러서라고 말했다. 엔엔은 가하란 뒤에 섰다.

열기가 느껴졌다.

안을 바짝 마르게 할, 나아가 털을 모두 태워버릴 것 같은 열감.

하얗게 일어난 불꽃이 가하란의 손가락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불꽃이 웅덩이처럼 고이더니, 이내 회백색 막을 향해 퍼져나갔다.

화아악!

아찔한 불길이었다.

엔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하란이 하얀 불을 쓰는 걸 수없이 봐왔다. 특수한 배합철을 만들 때 꼭 필요한 게 백염이었니까.

백염은 언제나 용로 안에서만 춤을 췄다. 그게 바깥으로 분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통제된 위험이었기에 곁에서 봐왔음에도 위험도를 실감하지 못했다.

가하란이 마음먹고 뿌려댄 불길은 엔엔이 상상한 것보다 더욱 위험하고, 무서운 것이었다.

엔엔은 가하란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불꽃을 다루는 게 쉽지만은 않은지, 인상을 쓰며 집중하고 있었다.

“가하란, 괜찮아요?”

“네. 이런 식으로 써보는 건 처음이라 버겁긴 하지만, 못 다룰 정도는 아니에요.”

가하란이 지닌 특수한 힘, 외력과 백염이 서로 뒤엉켜 회백색 막을 살라먹었다.

엔엔은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렸다.

막에 손상을 줄 수 있을까? 나아가 전부 거둬내는 게 가능할까?

영원히 꺼질 것 같지 않던 백염이 한순간 사라졌다.

가하란이 거친 호흡과 함께 비틀거렸다.

엔엔은 가하란을 부축하며 눈앞에 드리워진 회백색 막을 바라봤다.

찰나였으나 일그러짐이 보였다.

거병의 첨단 무기로도, 노련한 마법사들의 강력한 마법에도 반응조차 없던 회백색 반구체가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언제 충격을 받았냐는 듯이 일그러짐은 사라지고 매끈한 표면으로 돌아왔다.

작은 돌이 일으킨 파장 따윈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예상은 했어요. 위상이 다르다는 건 그 어떤 물리적 개입도 허락지 않는다는 거니까.”

“위대한 정령에게 받은 힘으로도 안 된다면…….”

엔엔은 반구체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층 너머로 현신해서 본래 힘을 쓸 수 있다면, 아니, 그래도 안 되겠죠.”

긴 호흡과 함께 어깨를 펴는 가하란이었다.

“위상을 거둬내는 건 뒤로 미루죠. 지금 당장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보다, 유단이 뿌려대는 이 마법을 해결해야 해요.”

“비슷한 대역대를 발산해서 억제하고 있긴 한데, 그것도 한계예요.”

“역시나, 엔엔 님이라면 저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방법은 틀리지 않았어요. 규모에서 밀릴 뿐이지.”

“억제기의 크기를 키운다고 해도 이쪽은 에너지를 충당할 수 없어요.”

“맞아요. 그게 문제죠. 하지만 엔엔 님.”

가하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시선이 향한 곳에 하늘석이 있었다.

“디졸브 필드라면 얼마간 상쇄할 수 있겠지만, 오래 지속할 수는 없어요.”

“저희가 설계한 장치로는 안 되죠. 유단이 만들어낸 이 위상은 마법 공학과 마법의 합작품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도 다른 걸 이용하죠.”

“다른 거요?”

난관이 앞을 막고 있었으나, 가하란은 왠지 즐겁다는 듯이 옅게 웃었다.

“엔엔 님. 설계 미스를 통해 배운 게 하나 있잖아요.”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