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31화 (531/558)

제531화

가하란은 트럭에서 내린 후 통신기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통신한 게 닷새 전이었다. 반가웠던 칼리고의 목소리, 다급하게 상황을 전하던 엔엔.

그 뒤로 통신이 끊어졌다.

둔으로 향하며 특수 대역을 계속 확인해 봤는데, 둔에 가까워질수록 통신 대역의 간섭이 심각해졌다.

알 수 없는 힘의 파장이 둔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착안으로 대기를 확인해 봐도 이전에 보지 못했던 패턴만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게 무엇인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지상으로 이동하며 정황을 파악하고, 유단이 설치해 놓은 레테를 무력화하려던 계획은 어그러져 버렸다.

유단이 인간으로서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도 동시에 사라졌다.

둔을 잡아먹은 거대한 반구체.

유단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계단에 올라선 것이리라.

파괴일지, 아니면 창조일지.

혹은 상상을 초월한 무엇일지.

“엔엔 님.”

통신기에 대고 말해봤다. 역시나 먹통이었다. 출력을 높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했다.

미니 비트가 아니라 비트를 온전히 다룰 수 있다면 왜곡과 간섭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연결할 수 있겠지만, 만물의 길인 비트는 여전히 위험하고 까다로운 존재였다.

“엔엔 님께 들은 것보다 상황이 심한데? 며칠 사이에 대체….”

옆에서 밀레나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니 비트에 드문드문 신호가 잡히는데, 잡음이 너무 심해요.

“일단 엔엔 님을 찾아서 자세한 상황을 들어야 해.”

트럭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가하란은 우측에 늘어선 나무 사이를 바라봤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착안을 열었다. 사물의 형태가 붕괴하며 점으로 변했고, 점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분석해 정보를 습득했다.

눈에 익은 패턴이었다.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무슨 일이야?”

밀레나의 목소리가 대기로 흩어진 직후, 강렬한 바람과 함께 기펠이 나타났다.

“원로님.”

“익숙한 냄새가 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봤는데, 역시나 석주였구려.”

기펠이 쥐고 있던 칼을 힘차게 뿌렸다. 상쾌한 공기가 주변을 덮었다.

“석주도 느꼈겠지요?”

“기분 나쁜 감촉이라면, 예, 오기 전부터 알아챘습니다. 유단의 짓인가요?”

기펠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고약하게 됐어요. 협력을 맺은 도시의 방위군이 접근을 막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늘 그렇듯 통일되지 않지요. 경고를 무시하고 접근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아니지, 그들 귀에는 경고가 들리지 않겠지요.”

기펠이 못마땅하다는 듯 둔 주변을 바라봤다.

“타국의 일이라지만, 안타깝기 그지없군요.”

혀를 찬 기펠이 상황을 설명해 줬다.

둔에서 발생한 정체불명의 마법, 혹은 주술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접근할수록 지배력이 강해져 대항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반쯤 미쳐버려요. 문제는 분배소를 타고 이 악독한 힘이 전 대륙에 퍼졌다는 점이고.”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둔으로 오는 길에 이동 중인 시민 행렬을 다수 목격했다. 심화된 도시 분쟁이 낳은 피난민인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둔으로 향하고 있는 거라면?

“대항력이란 건, 정확히 무엇입니까?”

“말 많은 친구가 이르길 정신력이라고 하더군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는 게 그 양반의 말이었고. 몸소 체험해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가 됐어요. 육체의 강함이나 마나의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쉽게 휘둘릴 수 있다는 걸.”

가하란은 곧바로 밀레나를 바라봤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평소와 다른 점이 없는지 물었다.

“난 괜찮아. 살짝 불쾌한 감은 있지만 이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지.”

다행히 누나는 문제없는 듯했다.

가하란도 자신을 되돌아봤다.

충동이나 근거를 알 수 없는 짜증 같은 건 없었다.

“말 많은 친구가 말하길, 둔과 적의. 이게 정체불명의 마법을 통해 전파된다고 하더군요.”

“적의.”

둔 주변에 벌어진 참상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즉각적으로 대응한 도시도 있지만, 유단을 믿고 따르는 곳도 많다고 들었어요. 나야 동부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허허. 답답할 노릇이죠.”

얘기하던 기펠이 눈을 찌푸렸다.

저 먼 곳에서 사람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손에는 조잡한 무기가 들려 있었다.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어요. 빨리 해결하지 못하면 막대한 인원이 몰려들 테죠.”

가하란은 다가오는 사람들 앞에 섰다.

“잠시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저리 꺼져!”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가볍게 피한 후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옅게 돋아나 있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심한 갈증을 겪는 것처럼 마른침을 계속 삼켰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말로 설득이 된다면 편하겠지만.”

옆으로 다가온 기펠이 검을 휘둘렀다. 뿜어져 나온 바람이 사람들을 훑고 지나갔다.

대부분이 나자빠지며 바닥을 굴렀다.

몇몇은 잠에서 깬 사람처럼 멍하니 앞뒤를 바라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도망쳤다.

하지만 대다수가 다시금 병장기를 쥐고 일어서서 달려들었다.

사람들을 어떻게 막을지 고민할 때였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무리 지어 달려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옆 사람을 찌른 것이었다.

기괴했다.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를 찌르는데, 어떤 목적성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있으니까 찌른다는 느낌이었다.

외력을 두르며 뛰쳐나갔다.

사람들 사이로 진입해 날붙이를 죄다 쳐냈다.

탕, 소리와 함께 단검이 튕겨 나갔다. 단검을 쥐고 있던 여자가 괴성을 지르며 옆 사람을 물어뜯었다.

“죽어! 죽어엇!”

목덜미를 낚아채 거리를 두게 했다. 입가가 피로 물든 여자가 허공에 손짓했다. 입에서는 연신 욕설이 흘러나왔다.

기펠이 말한 대로 설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외력을 사방으로 뿌렸다. 거미줄처럼 뻗어나간 외력으로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닥.”

-예, 아버지.

닥이 그렘린 한 기를 들고나왔다. 사람들 가운데에 놓고 그렘린을 작동시켰다.

삐이이이익!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소음이 뿜어졌다.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웅크리다가 이내 실신했다.

출력을 낮췄는데도 효과가 금세 나타났다. 심신이 망가진 사람들이라 버텨내지 못한 듯했다.

줄을 가져와 일단 묶었다.

“이런 자들이 계속 몰려드는 터라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아리엘 의원이 백방으로 힘쓰고 있지만, 뾰족한 수는 안 보이더군요.”

기펠이 손짓하자 지면이 들썩거렸다. 요동치던 땅이 누워 있는 사람들을 외곽으로 옮겼다.

“저 정도로 감화된 자들은 다리를 잘라도 기어서 둔으로 향하죠.”

가하란은 거대한 반구체를 바라봤다.

분배소 전송탑과 연결망, 그리고 마법을 접목한 방식인가.

그래, 넌 멈출 줄 모르는 놈이었지. 가하란은 다른 위상의 로키를 떠올렸다.

뛰어난 지능, 거짓말을 발견해 낸 지혜, 과단성과 집념. 그 모든 것의 집합체인 기계가 공들인 작품이다.

해답이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석주께선 지휘소로 가세요. 난 주변 정리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으니.”

기펠이 알려준 방향으로 트럭을 몰았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가하란 씨!”

지휘소에 있는 아리엘과 만났다. 율도 곁에 있었다. 반가움을 담아 얘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볍게 포옹만 했다.

“원로님께 전후 사정만 대강 들었어요.”

“좋아요. 그러면 작전판 보면서 상황 설명을 해줄게요.”

탁자에 놓인 지도에는 여러 표식이 놓여 있었다.

“이건 연합 전선을 짠 도시들의 군사. 이쪽은 마법사 클랜.”

둔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며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마법사 클랜을 나타내는 표식은 초록색 원이었다. 지휘소 바로 옆에 있었다.

“우린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 후 바로 움직일 수 있었어요. 유단에게 당한 타리움의 지도자들도 같이 움직였죠. 하지만, 도시 전체로 보면 10분의 1 수준이에요.”

“나머지는….”

“소극적 협력만 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죠. 유단이 연관된 일이고 무엇보다 마전기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압박을 받고 있으니까요.”

분배소 설치와 관리는 모두 학회에서 담당했다. 유단과 척진다는 건 학회를 적대시하겠다는 뜻이고, 그건 곧 분배소 정지를 뜻하니까.

그라운드 제로 이전 시대라면 모를까, 현재 도시는 마전기 위에 건설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전기 공급이 중단되면 생활 자체가 무너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마법공학파 쪽이 대규모로 움직였어요.”

“명분이 생긴 거네요.”

“그런 거죠. 지원이 절실한데 온갖 문제가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어요. 유단을 핍박하는 자들이 둔에 몰려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걸 성전이라 표현하는 사람도 생겨났고요. 덕분에 막아내느라 다들 고생 중이에요.”

성전.

구세주를 구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나선 건가?

적의와 둔, 두 가지 개념이 심층 세계를 파고들어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한다고 했다.

성전이니 반마법공학이니, 전부 유단이 발생시킨 특수 파장의 영향이리라.

“마법사 측에서는 대응책이 나왔나요?”

“저 압도적인 규모의 마법을 틀어막을 방법은 없다고 해요. 연합군의 멘탈을 보호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어요. 그마저도 시간이 흐르면서 힘들어지고 있고요.”

아리엘이 손가락으로 거대한 반구체를 가리켰다.

“안쪽에서 뿜어내는 마법적 기운이 강해지고 있거든요.”

“안으로 진입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한가요?”

엔엔에게 설명은 들었다.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으나 막상 회백색 벽으로 진입하면 둔 시내가 아닌 반대쪽으로 나와 버린다고.

“예. 몇몇 팀을 꾸려서 시도해 봤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그냥 지나칠 뿐이죠. 분명 눈앞에 있는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아리엘은 회백색 벽을 물리적으로, 마법적으로 공격해 봤다고 말했다.

“그마저도 효과가 없었어요.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저 흘려버릴 뿐이에요.”

아리엘의 눈이 얇아졌다.

“우린 저걸 거대한 틈새라고 규정했어요.”

틈새, 혹은 위상.

양자 간 간섭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

“하지만 가하란 씨라면, 위상에서 무사히 귀환한 당신이라면….”

“방법을 찾아볼게요.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유단이 발생시킨 마법적 파장을 방치하면 온 대륙의 사람들이 둔으로 몰려들 것이다.

위력이 점점 세지고 있다고 하니 그것부터 처리해야 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아리엘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마법사 클랜과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다리를 놔주세요. 그리고 저걸 가까이서 보고 와야겠어요. 확인할 것도 있고. 아, 그리고 엔엔 님은 어디에 계시죠?”

“마에스트로 두 분과 주변을 탐사 중이에요.”

“알겠습니다.”

지휘소 천막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아리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호위 병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잠깐 다녀오는 거니까요.”

가하란은 곁에 있는 밀레나와 눈빛을 교환한 후, 의족 뒤꿈치로 바닥을 툭툭 쳤다.

배터리가 활성화되며 형상화된 마나 파장이 추진력을 발생시켰다.

파아앙!

살짝 꺾였던 상체를 다잡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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