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0화
구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빛이 수백 가닥으로 갈라지며 방사형으로 퍼져 나갔고, 달려오던 거병을 휩쓸었다.
쿠그그궁!
거병들이 나자빠졌다.
구치는 몸을 일으켜 한순간에 정리된 거병들을 바라봤다.
견고한 외장갑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체임버와 하부 모듈을 집중적으로 타격했는지, 움직이는 거병은 한 대도 없었다.
“벨틴이라고 하기엔…….”
유단 학회장이 개발하고 오라클을 거쳐 대도시 몇몇 방위군에 보급된 원거리 마나 방출 무기, 벨틴.
신무기의 막강한 위력은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극강의 강도를 자랑하는 거병의 뼈대, 탈로스조차 벨틴에 직격당하면 버텨내질 못했다.
하지만 벨틴은 일직선으로 마나를 방출하는 무기였다.
경로상에 놓인 목표물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성능을 보이지만, 고속으로 이동하는 적을 맞추는 건 꽤 어렵다고 들었다.
방금 본 마나 방출은 벨틴의 공격 단점을 보완한 무기 같았다. 한정된 경로가 아닌 전면을 모두 점유하는 방사형 무기.
에너지 소모가 막심하겠지만 다수의 거병을 제압하는 데는 이보다 효율적인 방식이 없으리라.
“아이고야, 칼랑의 후예들께서 위험한 걸 만드셨네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칼리고가 말했다.
초토화된 거병과 지면을 바라보다가 칼랑족, 엔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인간만큼이나 마법 공학에 몰두하는 종족. 칼랑이 마침내 전쟁 판도를 바꿀 무기를 개발해 낸 걸까?
엔엔이 털을 툭툭 털면서 다가왔다.
“우리 구면이죠? 처음 봤을 때도 숲 한가운데였는데, 또 엉뚱한 곳에서 재회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구치는 엔엔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칼리고, 협회가 움직이는 건가요?”
“아니요. 저희도 막 도착해서 이게 무슨 일인지 감도 못 잡고 있어요. 엔엔 님께서는 뭔가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아는 거야 꽤 있죠. 하지만 자세한 사정은 이따가 설명해 드리죠. 너무 긴 얘기라.”
“그렇다면 사정은 넘기기로 하고, 원인은 알고 계신 겁니까?”
칼리고가 회백색 반구를 보며 물었다.
“학회장이에요.”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더라니.”
엔엔이 잠깐만요, 하면서 특이하게 생긴 물건을 손에 쥐었다. 둥글넓적한 물체였는데 엔엔은 거기에 대고 말을 걸었다.
“정리하고 주변 살펴줘요. 위험하면 바로 알려주고요.”
호기심을 못 참겠는지 칼리고가 입을 열었다.
“엔엔 님, 그거 뭡니까? 군용 통신 장비처럼 보이는데, 군에서 쓰는 건 크기가 사람 몸통만 하거든요.”
“통신 기기 맞아요. 좀 작은 버전이지만.”
“칼랑의 기술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나 보군요. 저도 하나 주실 수 있나요? 알베르트를 통해 편지를 전하는 건 너무 답답해서.”
엔엔이 미안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건 제 마음대로 나눠줄 수 없는 물건이에요.”
“기술 유출이 걱정되시는 거라면…….”
“그게 아니에요. 전 그쪽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지만, 꽤 신용하고 있어요. 이걸 준다고 해도 기술이 유출될 일은 없겠죠.”
엔엔이 통신 장치를 들어 올렸다.
“못 주는 이유는 단순해요. 제작자의 허가가 필요하거든요.”
“칼랑족이 개발한 게…….”
“인간이에요, 이걸 만든 건.”
“이상하군요. 공방이나 클랜, 길드를 통틀어 그런 걸 개발했다는 정보는 입수 못 했거든요.”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인간이니까요.”
“개인이 그런 걸 만들어 내다니. 실로 놀랍군요. 혹시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그런 인재는 놓칠 수 없죠.”
구치도 궁금했다.
칼랑의 기술력으로도, 국가 단위의 개발 사업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한 물건을 대체 누가 제조한 것일까?
“그쪽은 이미 알고 있어요. 구치도 마찬가지고요.”
“예? 저희 둘이 아는 사람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혹시…… 학회장이 만든 걸 강탈한 건가요?”
칼리고가 맹한 웃음을 지을 때였다. 구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저 멀리서 자그마한 기계인형이 뛰어오고 있었다.
헤드 모듈에 뭔가 달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초록색 리본이었다.
-반가워요!
활기찬 목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기계인형 특유의 어색한 억양이 아니었다. 목소리 톤 역시 세심하게 만졌는지 이질감이 없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기운찬 여자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전 해피예요.
자신을 해피라 소개한 기계인형이 앞으로 다가왔다. 구치는 멀뚱히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난 구치라고 한다.”
-와! 악수 신청해 주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부드럽게 움직이는 기계손이 구치의 손을 붙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정밀하게 움직였다. 단순노동에 투입되는 기계인형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거병이에요. 크기는 작지만.”
엔엔이 속마음을 읽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말로 거병인가?
이 작은 몸체 안에 오토마타와 액상 근육이 들어 있다는 건가?
아니, 그전에.
사람을 태우지 않고도 독립적인 운용이 가능한 건가?
질문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올 때였다.
해피가 말했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이미 거병이란 단어 안에 크다는 뜻이 담겨 있잖아요? 그런데 초소형 거병이라니. 이건 난센스예요. 하지만 트집 잡진 않을게요. 편의상 쓰는 말이라는 걸 아니까요.
정합성을 띤 문장.
어휘 사용도 매끄럽다.
이 작은 기체 안에 정말 언어 학습 장치가 탑재돼 있구나.
구치가 속으로 감탄할 때였다.
“세상에! 이렇게 작고 귀여운 거병이라니. 해피라고 했죠? 전 칼리고예요. 혹시 나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요?”
칼리고가 무릎을 굽혀 해피와 눈높이를 맞췄다.
-네, 있어요. 아빠가 저흴 만들 때 참고한 인격체 중 하나죠. 저도 따로 조사한 적이 있고요.
“아빠? 해피를 만든 아빠란 사람이 날 잘 아나요?”
-아빠가 어릴 때 칼리고 씨한테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어릴 때라. 그 아빠가 대체 누구죠?”
-아빠라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 같아요. 체스에서 이기면 알려 드릴게요.
해피의 말에 칼리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장난을 좋아하지만, 도를 넘는 농담은 싫어해요. 해피가 말한 몇 가지 단서로 유추할 수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뿐인데……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면 그 애는 이제 만날 수 없거든요.”
-아니요. 칼리고 씨는 지금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요. 목격된 현상만이 진실이에요. 칼리고 씨는 아빠의 죽음을 직접 봤나요?
“아니요. 하지만 사망 말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건 잘 알죠.”
-그렇다면 상상해 보세요! 혼자서 이곳이 아닌 아주 외로운 곳에서 홀로 버텨온 아빠를.
“정말, 가하란이 살아 있다는 건가요?”
-네!
칼리고가 고개를 들어 엔엔을 바라봤다. 엔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엔엔 님. 둔 상황은 어떻게 됐나요? 이쪽은 사람들이…….
엔엔이 들고 있는 통신 기기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성숙해졌으나 특유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구치는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둔에서 만난 꼬맹이를 떠올렸다.
수줍음이 많아 눈길을 피하던 아이. 훗날 찾아갔을 때는 틈새에 휘말려 더는 만날 수 없게 된 아이.
칼리고가 통신 장치를 빤히 쳐다보자 엔엔이 손을 내밀었다.
“얘기해 보시겠어요?”
칼리고가 통신 장치를 손에 들었다.
“내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기억력이지. 한 번 들은 목소리는 절대 잊지 않아. 그리고 사람은 변성기 이후의 음성이 크게 변하지 않지. 조금 성숙해졌다고 한들 억양은 그대로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반가움과 의아함이 뒤섞인 미묘한 얼굴이었다. 칼리고는 그 아이와 추억이 많았던 걸까?
“너 정말 가하란이구나.”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니지, 본 건 아니니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그러게. 그나저나 너 살아 있었구나.”
-예, 살아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 약속 기억하니? 내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한 약속.”
-이상하네요. 제가 기억하기론 아저씨가 체스에서 진 후…….
“그런 건 좀 잊어도 되는데.”
칼리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키는 좀 컸냐?”
-꽤 컸죠.
“컸다니 됐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밀레나 양도 그쪽에 있니? 내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받은 게 누굴 찾겠다며 떠난 거라.”
-네. 여기 있어요.
“그 아가씨도 참 포기할 줄을 몰라.”
되도록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구치는 칼리고의 어깨를 붙잡아야 했다.
“또 오고 있어.”
저 멀리 거병 세 대가 보였다. 무장한 사내들도 꽤 있었는데, 군인인지 용병인지 아니면 성난 시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꼬마야, 나중에 또 얘기하자.”
칼리고가 통신 장치를 돌려줬다. 엔엔이 가하란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사이, 해피는 아군 거병이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둔으로 진입하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러게요. 이런 규모의 문제는…….”
둔을 뒤덮은 회백색 반구.
항상 명쾌한 답을 내놓던 칼리고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저 양반들, 엔엔 님하고 면담하러 오는 건가요?”
칼리고가 손가락을 들어 접근 중인 자들을 가리켰다.
“모르겠어요. 방금 처리한 거병들은 오라클 소속이었지만, 저쪽에 있는 건 학회와 관련이 없어 보여요. 엠블럼도 둔이 아닌 다른 도시 것이고.”
말하던 도중 엔엔이 귀를 쫑긋거리더니 고개를 틀었다. 그와 동시에 통신 장치에서 소리가 났다.
-엔엔. 둔 주변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요.
“전투요?”
-네. 인간들끼리 싸우고 있어요.
낯선 목소리에 집중할 때였다.
구치는 몸을 휩쓸고 가는 기분 나쁜 감촉을 느꼈다. 레테가 내뿜던 파장과 똑같았다.
아니, 차이가 있었다.
더욱 진득했고 더 역겨웠다.
손목에 찬 밴드가 검은색에 가깝게 변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위험한 주법에 노출된 수준이었다.
“칼리고.”
재빨리 칼리고의 얼굴을 확인했다. 주먹 쥔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둔에 가까울수록 심층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것 같네요. 순간이었지만, 구치 씨 등을 찌르고 싶었어요.”
“둔, 그리고 적의.”
“예측한 대로 방향성인 것 같네요. 노출된 자들은 둔으로 향할 겁니다. 자기 의사라고 여기면서.”
의지력이 뛰어난 칼리고조차 잠시 흔들릴 정도라면, 보통 사람이 둔 근처에 오게 되면…….
콰아앙!
접근하던 거병 중 하나가 불꽃을 뿜어내며 폭발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선명한 외침만큼은 확실하게 들려왔다.
“다 죽여!”
그리고.
-엔엔, 인간들이 더 몰려오고 있어요.
통신 장치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개미지옥이 따로 없네요.”
칼리고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 * *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좁은 균열 위를 벗어난 트럭이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버지. 이제 곧 도착해요.
트럭이 불에 탄 나무를 밀어내며 전진했다.
시야를 가리던 수풀이 사라지고, 이내 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
가하란은 눈을 찌푸렸다.
시야를 틀어막은 거대한 반구체 주변에 반파된 거병들과 훼손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