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9화
“여기도 분위기가 안 좋네요. 돌아갈까요?”
칼리고가 상자를 내려놓았다. 구치는 망원경을 꺼내 낮게 쳐진 방책을 바라봤다.
무장한 시민들이 방책을 사이에 두고 전투 중이었다. 빛이 번쩍이며 폭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군수품이 멋대로 돌아다니는군.”
“전쟁 물자야 쉽게 구할 수 있죠. 대놓고 홍보하는 클랜도 있었으니까요.”
“둔도 비슷한 상황일까?”
“글쎄요. 대도시는 큰 문제 없지 않을까요? 수습이 워낙 빠르니.”
칼리고의 말을 들으며 시선을 돌렸다. 망원경이 잡아낸 풍경 안쪽으로 거병이 진입하고 있었다.
“거병까지 동원했어.”
“그러게요. 이쪽은 더 심각한가 보네요.”
“자네 생각은 어때? 비노스 습지로 돌아가면 꽤 걸릴 거 같은데.”
“이것만 없으면 마을을 가로질러 갔겠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칼리고가 철제 상자, 레테를 툭툭 쳤다.
“그나저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너도나도 싸워대는군.”
둔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십여 개의 도시와 서른 곳 이상의 마을을 거쳤는데, 그중 절반이 타 도시와 분쟁 중이었다.
언쟁으로 그치는 곳도 있었으나 무력을 사용해 피를 보는 곳도 상당수 있었다.
“학회장이 들고 일어섰으니까요. 우리 황제 때처럼 시민들 눈이 회까닥 돌아간 거죠. 게다가, 비도시민들한테는 기회나 다름없으니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요.”
“남는 건 폐허가 된 도시일지도 모르는데?”
“분배가 적당히 이뤄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죠. 덤벼들었다가 쥐고 있는 걸 놓치면 큰일이니까요. 하지만, 지금 도시 외부에서 사는 사람들한테는 그 적당한 분배조차 없으니까요. 마수한테 시달리는 삶을 사느니, 반쯤 무너진 도시에서 사는 게…….”
칼리고가 말을 끊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기운이 머리 위를 지나갔다.
“자네도 느꼈나?”
“네, 뭔가 찝찝한 촉감이었죠?”
흔적 없이 사라진 기운의 행방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릴 때였다.
구치의 시선이 레테를 향했다.
“저거.”
약 두 달간 아무런 반응도 없던 상자에서 희미한 파장이 느껴졌다.
정체불명의 기운과 갑자기 반응하는 상자.
우연은 절대 아니리라.
칼리고가 상자 덮개를 열었다. 안쪽에 층층이 쌓인 엘리멘트 패널들이 희미한 빛을 냈다.
마력선 회로가 활성화된 것이다.
“비상용 배터리가 내장돼 있었나 보네요. 커넥터 없이도 작동하는 걸 보면.”
“왜 작동한 건지는 둘째 치고, 이 기계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짐작되나?”
“글쎄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마법 공학은 문외한이라.”
눈매를 좁히며 상자를 살필 때였다. 파장이 거세졌다. 뒤로 물러서기 직전 끈적한 감촉이 얼굴을 덮었다.
재빨리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손에 묻어나는 건 없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구치 씨, 괜찮아요?”
“괜찮네. 자네는?”
“저도 이상은 없습니다. 단지 얼굴에 뭔가 튄 것 같았는데.”
“나도 비슷한 촉감을 느꼈네.”
“하지만 얼굴에 묻은 건 없어요. 구치 씨 얼굴도 깨끗하고. 아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칼리고가 빙긋 웃었다.
“뭐 이상한 게 붙어 있나 했는데, 주름이었네요.”
“쓸데없는 소릴.”
“우리 둘 다 느꼈다는 건 뭔가 일어났다는 건데. 잠깐만요, 구치 씨 팔찌.”
구치는 손목에 감은 밴드를 바라봤다. 주법을 막아주는 법구가 옅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술 쪽인가?”
“결이 비슷한 것일 수도 있어요. 마법일 수도 있고요.”
“저건 기계야. 기계를 통한 주술이나 마법이라니?”
“구치 씨. 이미 수없이 많은 불가능을 목격해 왔잖아요. 상식은 깨트리라고 있는 거니 그렇다 치고, 저 뭐 변한 거 있나요?”
구치는 칼리고를 유심히 바라봤다.
“없네.”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건 아닌 것 같네요. 뭘까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칼리고가 눈을 씰룩였다.
“잠깐만요.”
눈을 감고 나무에 기대는 칼리고였다. 신중한 표정이었다. 구치는 주변을 경계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칼리고가 수첩을 꺼내 들더니 펜을 빠르게 움직였다.
“뭔가 짚이는 게 있나?”
“방금 우리한테 튄 거, 아무래도 행동 유도 계열의 마법인 것 같네요. 심층 의식에 스며들어 대상자가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는 착각을 일으키죠. 오래전 케아랑 우리 쪽 애들이 협력해서 비슷한 걸 실험해 본 적이 있는데…….”
중얼거리던 칼리고가 고개를 가볍게 털었다.
“어쨌든 심상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힘입니다. 강제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은연중에 작동하는 놈이라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어떤 행동을 유도하는 건가?”
“안 그래도 그걸 확인해 보려고 이렇게 정리해 봤어요. 의식을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후 기존의 사고 경향과 다른…….”
구치는 손을 들어 칼리고의 어깨를 붙잡았다.
“자네가 대단한 건 알겠으니 요약해 주게.”
“침투된 의식이 있어요. 저야 강철 같은 자의식을 지니고 있어 이런 게 표류한다고 한들 아무 문제 없지만.”
칼리고가 수첩을 보여줬다.
그곳에 적힌 건 단어 두 개였다.
“둔, 적의.”
“네. 이거 아무래도 우리 학회장님께선 대륙 규모의 전쟁을 원하시나 봐요. 이런 게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인간 머리에 스며들면…….”
쾅, 입으로 작게 소리를 내며 두 손을 들어 올리는 칼리고였다.
“학회장이 얻는 이득이 없을 텐데.”
“그거야 직접 가서 물어봐야겠죠.”
칼리고가 레테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작동 중인데, 계속 노출돼도 문제없는 건가?”
“이 정도 심리 조작에 놀아날 머리였다면, 진즉에 황제님께 충성을 다했죠. 제 몸에 이것저것 실험해 본 덕에 내성도 생겼어요. 이런 건 장난 축에도 못 낍니다.”
“자넨 정말 위험한 인간이야.”
“그런 사람과 함께 다니는 구치 씨도 만만치 않아요.”
이야기 도중에 폭발음이 들려왔다. 저 멀리, 외장갑 전체가 날아간 거병이 보였다. 마나 폭발을 일으킨 것 같았다.
전선을 구축한 채 대치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기를 들어 올린 채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이야, 성능 좋네요. 벌써 유도당해 날뛰는 인간이 보여요.”
“감탄할 때가 아닐세. 대륙 전역에 레테가 설치돼 있으니, 다른 곳도 난리가 났겠지.”
“취약한 인간들은 금방 호도돼 폭력적으로 변하겠죠. 옆집 개가 짖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요.”
“끔찍하군.”
칼리고가 검을 뽑아 들더니 철제 상자를 갈라버렸다. 그러고는 연구원이 알려준 규격이 약간 다른 엘리멘트 패널만 뽑아냈다.
“이것만 가져가죠. 구치 씨 말대로 서둘러야 하니.”
“죽어라 뛰어야겠어.”
“가로질러 갈 겁니다. 휘말리지 마세요.”
칼리고가 뛰쳐나갔다. 구치도 숨을 한껏 들이켠 후 달렸다.
고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진입했다. 방책을 뛰어넘고 둔으로 향하는 최단 루트를 잡았다.
뒤쪽에서 막아, 라는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달려들었으나 칼리고가 칼을 몇 번 휘두르자 추격을 포기했다.
구치도 이동하며 화살을 몇 발 쐈다. 발치를 노리고 쐈으니 맞은 사람은 없었다.
“멀쩡한 사람이 대다수긴 한데.”
“하지만 분위기라는 건 소수에 의해 결정되는 법이죠. 만약 지도 계층의 머리가 맛이 가버린다면…….”
“학회장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겠군.”
“동대륙 통일을 노리는 걸까요? 대도시들의 방위 체계만 무너트릴 수 있다면 꿈은 아닐 테니, 욕심을 낼 법하네요.”
“그놈의 지긋지긋한 대통령을 학회장도 원하는 건가?”
어지간해선 지치지 않는 육신을 한계치까지 몰아붙이며 뛰었다.
밤핀 산맥이 보였다. 저곳만 넘으면 둔이 보일 것이다.
낮은 산이라 주파에 어려움은 없었다. 능선을 타고 올라 꼭대기에 도착했을 때였다.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이런, 구치 씨한테도 보이는군요. 제가 헛것을 보고 있길 기대했는데.”
크기를 짐작할 수 없는 회백색 반구체가 눈앞에 드리워졌다.
구치는 크게 숨을 고른 후 말했다.
“자네가 유추한 단어 두 개. 둔과 적의. 적의는 아까 확인했고, 둔은 뭐지?”
“방향성 아닐까요?”
“그렇다는 건…….”
거대한 회백색 반구를 응시할 때였다. 압도적인 크기에 시선을 빼앗겨 눈치채지 못했는데, 반구체 위쪽에 하늘석이 있었다.
“자꾸 헛것이 보여.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늙지도 않으시면서. 그나저나 멈춰 있는 하늘석이라니, 오늘 진귀한 구경을 많이 하네요.”
둔을 삼켜버린 회백색 반구와 정지한 하늘석.
마법 공학의 첨단 도시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저기.”
칼리고가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무리 지어 움직이는 거병이 보였다. 제대로 보기 위해 망원경을 들었다.
거병들이 산개했다. 움직이는 방향으로 보아 포위망을 펼친 것 같았다.
턱을 살짝 당겼다.
“칼랑족?”
땅을 박차며 이동 중인 칼랑족이 보였다.
“아는 분입니다.”
“나도 아네. 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거든.”
칼리고가 움직였다. 구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둔과 가까워질수록 하늘 높이 솟은 회백색 반구의 압도적인 크기가 실감됐다.
누가 만든 것인가?
정황상 학회장인 것 같은데.
“엔엔 님!”
칼리고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거병을 꼬리에 단 채 도망치던 칼랑족이 몸을 홱 틀었다.
이쪽으로 달려온다.
구치는 인상을 확 쓰며 곧바로 뒤로 돌아섰다.
“자네 말이야!”
“반가운 사람을 어떻게 무시합니까. 이참에 인사도 좀 하고요.”
“에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칼랑족이 따라붙었다.
“칼리고.”
“반갑습니다, 엔엔 님. 근데 무슨 일입니까?”
“안 반가운 사람인데 오늘 보니까 반갑네요. 저 좀 도와주시죠.”
“칼랑의 후예께서 요청하시는데 무시할 순 없죠. 대신 이자는 두둑하게 받겠습니다.”
구치는 이 악물고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늙지 않는 몸.
향상된 근력과 지구력을 얻게 됐지만, 신체술을 사용하는 전사와 비교하면 모자란 감이 있었다.
전속력으로 다가오는 거병을 피해 도망치는 건 힘든 수준.
“구치 씨는 여기서 잠시 헤어지죠. 몸 사리고 계세요.”
“자, 자넨 어쩌고?”
“일손 좀 돕고 올게요. 엔엔 님을 쫓는 중이니 갈라서면 괜찮을 겁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리고와 칼랑족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치는 왼쪽으로 몸을 이동했다.
풀숲으로 들어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쿵, 쿵, 쿵!
산개한 거병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자세를 낮추고 기척을 죽인 채 멀어져 가는 거병을 바라봤다.
“마나 탐지는 안 켠 것 같네.”
땀이 쭉 났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 멀어진 거병을 살폈다.
칼리고는 크게 원을 그리며 회전하더니, 다시금 둔 쪽을 향해 뛰었다.
“왜 저기로…….”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칼리고가 향하는 방향에서도 거병이 나타났다.
그런데 무장 상태가 독특했다.
거대한 도끼나 창이 기본 무기일 텐데, 새롭게 나타난 거병은 삼각뿔 형태의 기괴한 물체를 들고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거병 발치에서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는 작은 기계인형들이었다.
생긴 게 꼭 거병 같았다.
기계인형은 ‘인형’이란 단어가 붙지만 사람의 형태를 띠지 않는데, 저 작은 기계인형들은 비율만 다를 뿐 사람의 모습이었다.
1m 남짓한 기계인형들이 피뢰침 같은 길쭉한 쇠를 바닥에 꽂았다.
칼리고와 칼랑족이 이끌고 가는 거병과 곧 맞닥뜨릴 텐데, 뭘 준비하는 거지?
이윽고 양측 거병이 마주했다.
한데 모여 달리던 칼리고와 칼랑족이 한순간 양옆으로 찢어졌다.
그와 동시에.
파아아아아!
삼각뿔 물체 끝에서 새파란 빛이 쏘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