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28화 (528/558)

제528화

“오랜 친구?”

되물었으나 카트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단은 붕괴 직전의 몸을 이끌고 제어판으로 향했다.

-하늘석이 멈췄어.

체시가 말했다.

비유도 은유도 아닌 실제적 현상이었다. 고도를 낮춘 하늘석이 머리 위에서 멈춰 있었다.

외부 감각 장치로 둔 시내를 살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죄다 고개를 들고 하늘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계면 간섭이 일어나는 중이야.

체시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심상 세계로 구현된 공간을 비집고, 무엇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마나도 차단하는 완벽한 차폐 영역에 한순간 틈이 생겼다.

“카트시.”

유단은 카트시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주황색 선이 한순간 내리꽂혔다.

저건 뭐지?

감지했으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유단, 너 뭘 보고 있는 거야? 너와 연결된 단자를 통해 인지 정보가 밀려들고 있는데, 이건 해석할 수가 없어.

“넌 저게 보이지 않는 거야?”

-시각 장치에 이상은 없어. 만약 내가 못 보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면, 둘 중 하나야. 네 몸이 한계에 도달했거나 혹은 내 인식 장치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형태의 정보거나.

번개처럼 내리꽂혔던 주황색 선이 한순간 사라졌다.

심상 세계에 생겼던 틈 역시 메워졌다.

정보가 오갔다. 유단은 방금 본 그것이 연결망의 시초임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체시.”

-지금 시작할 순 없어. 시간이 더 필요해. 그리고….

두드드, 강렬한 진동이 체시의 말을 집어삼켰다.

유단은 비틀거리다가 기계인형의 도움을 받아 몸을 지탱했다.

느껴진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

-유단!

체시의 외침과 동시에 몸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사라졌다. 잘게 나오던 기침도, 흉통도, 두통 역시 없어졌다.

몸이 완치된 게 아니었다.

한시적 영혼 세계로 관리하고 있던 에너지가, 몸에 부하를 주던 에너지가 한 올 한 올 풀려나며 대기로 흩어지고 있었다.

-마전기가 해방되고 있어. 이건….

“마나 증발.”

접경 지역에서 목격된 기현상.

그게 둔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하늘석이 현상의 원인인가?

-계획을 바꿔야겠어.

“아이러니하네.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상정하고 만들어둔 것인데.”

유단은 카트시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돼 있다라.

“레테는?”

-역전송 준비는 끝났어. 전송 직후 껍질을 만들 거야.

“이 몸도 이게 마지막이네.”

-실체를 잡아. 몸이 사라질 때 널 유지하지 못하면, 모든 게 멈출 거야. 그렇게 되면 알지?

“모든 게 네 장난감으로 변하겠지.”

이해관계가 맞았기에 협력한다.

그게 틀어지는 순간 체시는 조력자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또다시 모든 걸 날려버릴 생각이야?”

-네가 만든 결과물을 보고.

“내가 이룬 다음이라면… 네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

-그래. 그게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말이지.

기계인형이 다가왔다. 엘리멘트 패널로 제작한 스크롤이 사방에 배치됐다.

“파편화된 내 자아가 복구되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까?”

-그건 예측할 수 없어. 계산의 영역이 아니니까. 그래, 이럴 땐 인간의 격언을 빌려 와야겠지.

체시가 말했다.

네 의지에 달렸다.

“뒷정리를 부탁할게.”

-금방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면 내가 움직일 거니까.

유단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정면에 위치한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기계인형이 지름 20cm의 침을 들고 뒤쪽으로 이동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마지막 숨을 내뱉고 눈을 감는 순간.

콰직, 경추를 비집고 들어오는 쇠침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 * *

-공핍 영역 확장이 시작됐어요. 임계점까지 2분 21초 남았어요.

“전송탑 상태는요?”

엔엔은 날뛰는 마나를 느끼며 손을 움켜쥐었다.

-5번, 12번, 13번 퓨즈 교체 중이에요.

유토니아가 지휘하는 기계인형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석이 중심이 된 디졸브 필드.

가하란의 전용기인 로트가 없기에 마나 유도 작업이 더디게 진행 중이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앞으로 2분 후면 학회 건물을 중심으로 직경 3km 내의 모든 마나가 소멸할 것이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마나도 역분사체에 이끌려 대기로 흩어질 것이다.

유지 시간은 1시간.

그거면 충분했다.

학회 지하에 자리한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도 2분 후 임계점을 넘으면 순식간에 증발할 터였다.

근간이 되는 마나, 마전기가 사라진다면 유단은 평범한 인간이 된다.

인간 하나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고.

“카트시와 연결은?”

-비트를 활성화하는 건 이제 힘들어요. 디졸브 필드를 유지하는 데 올의 모든 능력을 할애 중이니까요.

“마나 폭발 속에서도 무사할 거라 했으니까 괜찮겠죠.”

엔엔은 지상의 상태를 관찰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마나 증발.

마법 공학으로 생활하던 모든 것이 멈추고 있었다. 신경에 연결돼 편의를 제공하던 의수와 의족은 단순한 쇳덩이로 변했고, 거리를 오가던 기계인형은 죄다 멈췄다.

생명 장치가 가동 중일 병원 역시 타격을 받고 있을 것이다.

길게 끌어선 안 된다.

공핍 현상이 길어지면 막대한 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활성화 단계에 돌입했어요.

됐다.

엔엔은 지상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유단이 모아둔 에너지가 증발하는 순간, 신속하게 제압 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도중에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시설을 재정비한 건 옳은 판단이었다.

하늘석을 역분사체로 삼은 디졸브 필드를 완성하지 못했으면, 둔 탈환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하 준비 마쳤어요.

지하 격납고에 도열한 거병들을 가시화 패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중앙에 놓인 블루아이를 바라보며 승리를 확신할 때였다.

-억제력 발생! 마나가 변환되고 있어요.

유토니아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엔엔은 상황판을 확인했으나 제대로 된 정보가 나타나지 않았다.

계측에 어려움이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땐 육안으로 봐야 한다.

통제실에서 벗어나 외부로 나갔다.

전송탑을 통해 분사되는 마나의 폭풍이 눈에 보였다. 가시화된 마나들. 노출되면 한 줌의 먼지로 변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전송탑을 피해 하늘석 끝으로 달려갔다. 고개를 아래로 빼 지상을 바라봤다.

눈에 보인 건.

“…어떻게 된 거야.”

회백색 반구로 뒤덮인 둔이었다.

대도시 둔이 회백색 반구에 잡아먹혔다. 엔엔은 둔의 북쪽 진입로를 바라봤다.

마차를 끌고 다가서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회백색 벽에 놀라고 있었다.

시선을 옮겼다. 날개를 곧게 펴고 비행 중이던 새 몇 마리가 회백색 반구에 접근했다.

부딪힐까, 아니면 튕겨 나갈까.

그것도 아니면….

새들이 정체불명의 반구 안으로 들어갔다. 진입은 가능한 걸까?

그렇게 생각할 때, 엔엔의 눈동자가 기이한 현상을 잡아냈다.

새들이 서쪽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도시 동부로 진입한 새가, 수 초 만에 도시를 가로질러 반대쪽에서 나타난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엔엔, 디졸브 필드가 활성화됐어요.

유토니아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정체불명의 장벽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마나 밀도는 어때요?”

-반구체를 제외한 지역에서 모든 마나가 계속 증발 중이에요. 하지만 저 지역은 마나 밀도가 변함이 없어요.

“분석할 수 있겠어요?”

-어떤 탐색 장치로도 읽어낼 수가 없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저건 의지란 필터를 거친 마나라는 거예요.

“마법이란 소리네요.”

대규모 마법.

이제는 전설이 된 마스터 아낙스가 선보였다던 대규모 보호 마법과 같은 원리인가?

마법은 지극히 개별적이며 헤아릴 수 없는 숫자로 존재한다.

저게 유단의 고유한 마법이라면, 해석하는 데도 막대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파훼 여부는 그다음에나 생각할 문제고.

“일단 내려가 봐야겠어요.”

하늘석이 고도를 낮췄다.

엔엔은 E30 한 대를 챙긴 후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쿵!

지면에 안착하자마자 회백색 벽으로 다가섰다. 높이는 300m 정도. 직경은 둔 아웃라인까지 일정 부분 덮었으니 4km 정도 되는 건가.

압도적인 크기였다.

한 인간이 이런 규모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건가?

엔엔은 가지고 온 E30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E30이 받은 모든 충격이 수치화돼 주 시스템으로 전해질 것이다.

“유토니아, 체크해 줘요.”

-알겠어요.

E30을 조심스럽게 전진시켰다. 네 개의 다리를 연신 움직이며 기계인형이 회백색 벽을 통과했다.

곧바로 유토니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신호가 소실됐어요.

“계속 연결해 봐요. 제 예상대로라면 금방 다시 잡힐 테니까.”

잠시 후.

-잡았어요. 위치는… 엔엔이 있는 곳에서 4.8km 떨어진 곳이에요. 정반대 쪽.

“역시나.”

물리적 거리가 단축됐다.

이 영역이 어떤 식으로 작용한 것인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안에 들어가도 무사한 걸까.

새들과 E30이 문제없이 통과한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진입해 볼게요.”

-위험해요. 외부에서 면밀하게 조사한 후 움직이는 게 옳아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다고 해서 무리한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에요. 엔엔, 내 판단을 믿어줘요. 지금 엔엔을 잃게 되면 제어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할 수 없어요. 가하란이 올 때까지 현장 책임자가 필요해요.

“…알겠어요.”

엔엔은 통신을 끊은 후 벽으로 다가갔다. 점성을 지닌 듯한 벽은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조금씩 출렁거렸다.

드라이버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벽 너머로 드라이버 끝을 찔러넣은 후 뽑아냈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모든 걸 통과해 버린다면….”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됐다.

-상태는 오히려 안정화됐어요. 분포도도 일정하고 파장 역시 균일해요.

“폭발 가능성은요?”

-이 상태라면 없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리고, 반구체가 나타나기 직전에 하위 대역의 마나 파장이 둔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 나갔어요.

“신체에 위협적인 수치인가요?”

-아니요. 안에 정보가 담긴 것 같은데, 해석 중이에요.

올과 유토니아가 달라붙었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건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필드는 해제해요. 전송탑을 무리해서 가동할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

-네, 그럴게요.

디졸브 필드로도 제어할 수 없는 마나의 형태.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마나 증발을 목격했으니 대응책을 마련해 뒀겠지.

엔엔은 회백색 반구를 노려봤다.

코앞에 있으나 다가설 수 없는 상태.

“가하란한테 상황을 설명해 줘요.”

그라면 해결책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때까지 다른 문제가 터지지 않도록 환경을 철저하게 제어해야 한다.

-엔엔!

“왜 그래요?”

-남동쪽으로 최대한 빨리 이동해요. 무장한 자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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