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7화
“뭐야.”
풍경이 갑자기 바뀌었다. 샬롯은 얼빠진 목소리를 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괴이한 기계 소리와 유단이 누워 있던 침상, 어둠만이 가득했던 지하실이 아니었다.
향긋한 풀 내음, 적당한 햇살, 눈을 편안하게 하는 녹음 사이로 정겨운 마을이 보였다.
샬롯은 허리를 숙여 발치의 흙을 만졌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흙.
“아저씨?”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급하게 타챠를 찾으며 걸음을 뗄 때였다.
-왜 그래?
반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산카!”
샬롯은 작은 새를 바라보며 외쳤다. 산카가 부드럽게 날아 머리 위에 앉았다.
-왜 그렇게 허둥거려.
“아저씨를 찾아야 해. 둔 지하실에…….”
-샬롯. 넌 계속 여기에 있었어.
산카가 눈앞에서 날갯짓했다.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계속 여기에 있었잖아. 우리와 함께.
우리라는 말에 시선을 마을 쪽으로 옮겼다. 아담하게 지어진 집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샬롯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저 사람들은…… 죽었잖아.”
디아네 언니, 파블로 집사, 스틴 오빠, 그리고.
“아빠.”
선한 웃음을 짓는 아빠의 얼굴을 보다가 산카를 바라봤다.
“여긴 뭐야?”
-샬롯.
“여긴 뭐냐고!”
바람을 일으켜 주변을 날려버리려 했으나 미풍만 불어올 뿐이었다. 나뭇잎 하나를 겨우 띄울 정도의 약한 바람.
-왜 그러는 거야?
“유단이구나. 그래, 그런 거야.”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유단! 듣고 있지! 난 여기서 나갈 거야. 반드시!”
목이 찢어질 정도로 외쳤으나, 소리는 헛헛한 진동이 돼 사라져 버렸다.
“샬롯.”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샬롯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죽었어. 그리고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물 한 방울. 그걸로 정리했다.
-샬롯, 여기 있어. 그게 편할 거야.
“시끄러워. 난 나갈 거야.”
샬롯은 뒤따라오는 산카를 무시한 채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걸었다.
* * *
팅, 손에서 놓아버린 깃대가 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타챠는 아른거리는 산의 풍경과 어두컴컴한 지하실 사이에서 이를 악물었다.
“이런 걸로는 날 죽일 수 없다.”
몸이 묶이고 정신이 흐릿해졌으나, 죽음과 맞닿은 건 아니었다.
유단이 기침을 길게 한 후 말했다.
“붉은 깃을 이어받을 당대의 전사. 사람들이 경외할 만합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 교착 상태를 유지하는 게 목적이니.”
타챠는 전신의 힘을 끌어올려 미지의 힘을 풀어내려 했으나, 벗어나기 직전에 힘이 흩어졌다.
“어려울 겁니다. 제 모든 심력을 동원해 당신을 붙잡고 있으니까요.”
타챠는 눈동자를 내려 바닥을 바라봤다. 막대한 에너지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인간의 몸을 통과해 분사되고 있었다.
“육체를 그런 식으로 사용하면 금방 끝날 거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이미 체험하고 있고요.”
콜록, 피 분수가 뿜어졌다. 하얀 이불이 붉게 물들었다. 기계인형들이 다가와 유단의 몸과 양쪽에 배치된 장치를 매만졌다.
유단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옆에 있는 저 인간은…… 죽든 살든 알아서 하겠죠.”
“날 죽이기 위해 준비 중인가?”
유단이 고개를 저었다.
“그 육체에 충격을 가하면 제가 겨우 붙잡아 두고 있는 당신의 영혼이 제자리를 되찾겠죠. 그 순간 제 목이 떨어질 거고요. 그러니 전 당신에게 아무 짓도 안 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가만히 있어 주세요.”
“아쉽게도 난 인간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타챠는 숨을 한껏 들이켰다.
산의 부족들이 눈앞에 아른거렸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허상이고, 만약 진짜라면 다들 알아서 피할 것이다.
대지의 뜻을 받드는 자들은 허약하지 않으니까.
“산의 영령이시여!”
갈기갈기 찢기는 충격이 몸을 덮쳤다. 단절된 세계를 비집고 대지의 힘이 전해진다.
조금만 더.
붉은 증기가 온몸에서 피어오를 때였다.
-아르드헨이 말한 수리공은 역시 이 도마뱀인 거 같지?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슬쩍 들었다. 천장을 가로질러 설치된 레일을 따라 수십 개의 기계 팔이 다가왔다.
기계손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얇은 쇠판이 쥐어져 있었다.
-유단.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유단을 부르자, 유단이 힘겹게 두 손을 들어 올려 깍지를 꼈다.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가, 이내 바뀌었다.
“…….”
전쟁터였다.
수없이 경험해 본 재미없는 전쟁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인간들의 시체들이 즐비했고 끔찍한 몰골의 쇳덩어리들이 땅에 처박혀 있었다.
정신이 잠식당한 건가.
타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무엇이 됐든 다 뜯어내다 보면 현실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기도에 돌입할 때였다.
“타린의 무승이 왜 여기에?”
집중력을 단숨에 앗아가는 목소리였다. 타챠는 흥분을 주체 못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 있는 건, 군복을 입은 채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대전사였다.
스물 초중반의 나이.
“하, 하하하!”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는 걸 안다. 붙들어 두기 위한 허상이라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위대한 전사시여!”
랜더의 눈은 공허하지 않았다. 전장의 열기를 담은 뜨거운 눈이었다.
지금이라면 생과 사를 건, 모든 것의 끝을 볼 수 있는 전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과 관련이 없다면 떠나십시오. 아니라면…….”
랜더가 검을 뽑았다.
“타린이라 한들 벨 것입니다.”
“그게 내가 원하던 답입니다!”
콧김을 내뿜으며 발휘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오시하듯 내려다보는 위대한 전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 * *
-준비가 과하다고 생각했는데.
체시가 말하는 사이에도 산의 전사는 날뛰었다. 몸은 얌전히 고정된 상태였으나, 그가 발산하는 기운이 공간을 찢어발길 듯 사납게 움직였다.
다가서면 어지간한 생명체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유단은 고개를 푹 숙이며 수건을 들어 올렸다. 코와 입을 통해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버틸 수 있겠어?
“괜찮아.”
레테를 통해 모아둔 에너지가 아니었다면, 마법을 이식한 수십 개의 엘리멘트 패널이 아니었다면 산의 전사를 붙들지 못했으리라.
“완전히 동조됐어.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잡아둘 수 있어.”
한시적 영혼 세계를 통한 인지 제어.
산의 전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깨어나지 않으리라.
-한번 죽여볼까?
“아니. 외부 충격으로 깨어나 버리면 우리가 끝나게 될 거야.”
-순간 사출로 머리를 뚫어버리면 가능할 거 같은데.
“저 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측정한 게 아닌 이상 모험할 필요는 없어.”
타챠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 뿌리가 보내는 마나와 닮았으면서도 살짝 다르다. 대지를 섬기는 자들.
역시 세상은 이해 불가한 것들의 모임이었다. 앎을 위해 태어났으나 모르는 것이 아직도 많았다.
-아르드헨이 경고할 만하네. 대비가 미흡했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거야.
아르드헨은 말했다. 엇나가서 전체에 피해를 주는 순간, 수리공을 상대하게 될 거라고.
타챠는 설명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인간들끼리 정치적으로 난리를 피울 때도, 도시가 휘청거릴 때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 몇몇만 챙길 뿐.
하지만 한시적 영혼 세계를 확장해 도시 전역에 뿌리는 순간 거침없이 찾아왔다.
더럽히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말 또한 아르드헨이 묘사한 것과 어울렸다.
“준비는?”
-마무리 단계야. 네 심상 세계를 확장하고 있어. 이제 다음은 응집. 한 점에 모인 힘이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물질을 변화시킬 거야.
유단은 두 다리를 침대 밖으로 빼더니 체시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옆구리 밑을 받쳐주는 기계에 의지해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카트시.”
신호 차단함에 넣어둔 카트시를 향해 말했다.
“네 예상은 틀린 것 같다.”
-변수는 언제나 생기지.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돼 있다는 거 알아?
“그럴지도 모르지.”
목 안에 차오른 피를 뱉어낸 후 말했다.
“네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무엇으로 구성됐는지 여전히 알 수 없어. 파괴할 수도 속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미지의 물건. 하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어.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거든.”
-기어이 하려는구나.
“계획을 세웠으면 진행하고 결과를 봐야지. 그게 우리의 존재 이유니까.”
의자에 앉았다.
-네 몸,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은데.
“맞아. 곧 멈추게 될 거야.”
-만족할 수 있겠어? 너에게 다음이란 없는데.
유단은 웃었다.
“다음은 필요 없어. 난 이 순간을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니까. 다음은…… 그 사람의 몫이야.”
-성공한다고 한들 줄이 좋아할까?
“몰라.”
-넌 이기적이지만, 줄에게만큼은 헌신적이잖아. 넌 그녀를 슬프게 만들지 않을 거야.
“마지막 투정이니까 괜찮아.”
-그걸로 속죄하려고? 되살리는 것으로?
“속죄?”
-네가 시작한 연구와 네가 계획한 살인에 연구원이 죽었고, 그걸 기점으로 너흰 변했지. 그 결과 줄이 죽게 됐고.
“기폭제가 된 건 사실이야. 그래, 원인을 찾자면 내게 있어.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아. 지금도, 그때도.”
유단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난 그저 내가 줄곧 해왔던 일을 마지막까지 하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 속죄란 말은 어울리지 않아.”
기계 팔에 의지해 체스판을 가져왔다. 카트시의 앞에 두고 기물을 정리했다.
“별명을 정하려고 뒀던 체스, 다시 둬볼까? 겸손 없이 말이야.”
-결과는 이미 정해졌어. 스탠다드 체스로는 무승부, 혹은 내 승리뿐이야.
유단은 조용히 기물을 움직였다. 카트시가 스퀘어의 좌표를 부르면 손을 움직여 말의 위치를 바꾸었다.
그렇게 몇십 번의 수가 오갔다.
“졌어. 그래, 이게 네 배려였구나.”
유단은 킹을 눕히며 말했다.
수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멈춰.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네가 조형한 그것은 줄이 아니야. 줄을 닮은 무엇이지.
“기억은 어디에 깃드는 걸까? 영혼 세계에 있는 그 정보들의 집합체가 인간의 본질일까? 아니면 그마저도 허상일까?”
유단은 웃으면서 일어섰다.
“사실 상관없어. 난 그녀를 만나기만 하면 되니까.”
-고집은 여전하네.
그때였다.
체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밀도 마나가 감지됐어.
“다른 도시에서 치러 온 건가? 슬슬 올 때라고 생각하긴 했어.”
-아니, 우리 머리 위야.
“위?”
외부 시각 장치를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렌즈가 잡아낸 건…….
“하늘석?”
의문이 머릿속을 채워갈 때였다.
-로키, 네 오랜 친구가 만나러 온 거야.
카트시가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