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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26화 (526/558)

제526화

밀레나와 독립부대 생활을 하며 둔 학회도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배움의 공간이라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연구시설인 3동만큼은 언제나 출입금지였다.

“여길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샬롯은 안내 중인 연구원의 등을 바라봤다. 이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코가 썩을 것 같군.”

타챠가 말했다. 불쾌감이 얼굴 전체에 번져 있었다.

“냄새는 여전히 안 나지만, 저도 느껴지는 게 있어요. 근데 그게 정확히 뭔지 모르겠어요. 바람은 평상시와 다름없는데.”

“이전에 없었던 힘의 형태겠지.”

앞장서던 연구원이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샬롯은 눈을 씰룩였다. 몸을 훑고 가는 이질적인 감각. 타챠가 말한 악취가 이건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돌아가라.”

“아저씨는요?”

“만나봐야지.”

“그럼 저도 갈 거예요.”

호흡을 가다듬고 안쪽으로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은은한 어둠이 깔린 방.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샬롯은 눈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모든 게 흐릿하게 보였다. 빛 한 줌 없는 곳에서도 사물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눈인데.

“억지로 보려 하지 마라.”

타챠가 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샬롯은 타챠의 꼬리를 쫓아 움직였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샬롯은 손등으로 목에 난 땀을 찍어냈다. 고작 10분 걸었다고 땀이 나는 것도 이상하고, 3동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10분간 벽이 안 나타나는 것도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마음속이다.”

“네?”

“곧 나타나겠군.”

타챠의 말이 끝나는 순간, 캄캄했던 주변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샬롯은 반사적으로 바람을 찾았으나 응답하는 바람은 없었다. 메마른 공기 몇 줌만 주변에 맴돌 뿐이었다.

“이렇게 뵙네요.”

고개를 왼쪽으로 틀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샬롯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 유단을 바라봤다.

“……뭘 한 거죠?”

기능을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좌우에 배치돼 있었다. 기계에 연결된 호스는 유단의 귀와 코, 입, 그리고 배를 관통하고 있었다.

“하하, 고장이 났습니다.”

쩍쩍 갈라지는 음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있고, 얼굴은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처럼 탄력을 잃었다. 팔다리는 오랫동안 침상 생활을 한 환자처럼 얇았다.

말이 안 된다.

두 달 전만 해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타리움을 몰아내고 시민들 앞에서 승리를 선언했던 유단은 건강했고, 활력이 넘쳤다.

“누운 채로 손님을 맞이하는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일어나 차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요.”

유단이 힘겹게 고개를 틀자, 어디선가 바퀴 달린 기계인형이 나타났다.

쟁반을 든 채 매끄럽게 다가오더니 각종 음료를 내보였다.

-따듯한 차가 좋으세요? 아니면 시원한 음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이 넘어갈 리가 없다.

“포도주 있나? 값비싼 걸로. 기왕이면 병째로.”

타챠가 말했다.

“아저씨.”

“준다는 걸 거절할 이유는 없지.”

타챠의 말을 들었는지 유단이 탁한 숨소리를 냈다. 그게 웃음소리라는 걸 깨닫는 순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기계인형이 포도주를 가져왔다. 타챠는 병목을 부러트리더니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샬롯은 유단을 바라봤다.

“고장 났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 고장이 난 겁니다.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본 대가라고 할 수 있겠죠. 뭐, 다른 이유도 있지만.”

작은 기계인형이 다가와 유단 왼쪽에 설치된 정체불명의 기계로 다가갔다. 기계 안쪽에서 투명한 상자를 꺼냈는데, 안에 검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피 같았다.

“도시 사람들이 저렇게 된 거, 당신 때문이겠죠?”

“저렇게가 정확히 어떤 상태죠?”

“설명이 필요한가요?”

유단이 옅게 웃다가 기침을 시작했다. 속에 든 걸 다 게워 낼 것 같은 맹렬한 기침이었다.

기계인형이 달라붙었다. 연결된 호스를 통해 맑은 액체가 주입됐고 거뭇한 것들이 빠져나왔다.

“우린 마법공학이라 부르지만, 사실 마법과 마법공학은 완전히 다른 것이죠. 그래서 접목도 불가하고 연계해 무언가를 재탄생시키는 것 역시 힘들고요.”

침대가 서서히 들렸다. 유단의 비쩍 마른 몸이 세워지자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악의. 아니, 저걸 뭐라 표현해야 할까.

순수한 집념?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다른 방법을 알아봤겠으나, 돌아가는 형국이 마땅치 않더군요. 아리엘 의원…… 예상치 못한 수였어요. 어디서 그걸 구한 건지.”

“그래서 사람들을 이상하게 만들었나요? 왕국을 만들어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보호요?”

유단이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전 모르겠군요. 이걸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저는 그저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시간이 필요했기에 사람들의 등을 아주 살짝 밀었을 뿐이죠.”

그때였다.

타챠가 창대를 내질렀다. 창끝이 유단의 얼굴 앞에서 멈춰 섰다.

“각자의 정의야 알아서 할 일이다만, 이 고약한 냄새가 땅을 더럽히고 있다. 나는 그걸 용납할 수 없다.”

“사람의 목숨보다 땅이 중요합니까?”

“너희가 스스로를 땅의 주인이라 하지만, 땅은 한 번도 주인을 섬긴 적이 없다. 땅이 허락했기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 뿐이지.”

“그런 관점으로도 바라볼 수 있겠군요. 배웠습니다.”

타챠의 창을 앞에 두고도 유단은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아니, 감정을 드러낼 기운조차 없는 것 같았다.

“인간의 방식으로 싸워라. 땅을 끌어들이지 말고.”

“산의 전사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널 죽이고 멈추는 수밖에.”

창끝이 유단의 이마를 눌렀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주름진 피부와 함께 두개골이 으깨질 것이다.

샬롯은 조심스럽게 타챠의 팔을 붙잡았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죽인다고 해결될 일이었다면, 저 녀석이 저러고 있겠어요?”

타챠가 창을 거두었다.

“기쁨만이 가득하군. 해탈한 수도승처럼.”

“제가 그렇게 보이나요?”

유단이 웃었다.

“널 죽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의 전사께서는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주변 일대가 제 심상세계의 일부라는 걸.”

“무엇 하나 없는 네 마음. 그래, 그건 알고 있다.”

“복잡한 설명은 두 분 다 이해하지 못할 테니 쉽게 말하죠. 저는 제 마음을 둔에 뿌렸습니다. 마법과 마법공학을 접목해서요.”

“심리조작?”

샬롯은 과거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조작이라면 조작일 수도 있겠죠. 샬롯 씨도 남자에게 끌린 적이 있겠죠? 아니, 꼭 이성이 아니더라도 어떤 대상에게 마음이 간 적이 있을 겁니다.”

“그게 왜요?”

“인간은 시각적, 청각적 정보 말고도 감각되지 않는 화학적, 전기적인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죠. 저는 제 심상세계를 마전기화해 사람들에게 선물했습니다. 기계의 회로를 바꾸는 정도의 완벽한 인식변화를 끌어낼 수는 없으나, 강력한 동조성을 유발할 수는 있어요.”

유단이 갈라진 입술을 끌어올렸다. 징그러우면서도 무서운 웃음이었다.

“저라는 구심점을 통해 모두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게 된 거죠.”

“그런 식으로 사람을 조종하면 재미있어요?”

“재미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에요. 계속 말했듯 전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십수 년간 혼자서 진행해 왔는데, 더는 늦출 수가 없게 됐어요.”

힘겹게 물을 마시는 유단이었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자잘한 사고들이 발생하죠. 최남단에 설치해둔 레테에서도 문제가 생겼고, 며칠 전 볼로스 쪽에서도 뭔가 일어났어요. 목표는 저인 것 같고요.”

유단이 흐릿한 눈으로 타챠를 바라봤다.

“절 죽이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고 물으셨죠?”

유단의 눈동자가 밑으로 내려갔다.

그 순간, 샬롯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가 감지됐다.

타챠가 못마땅하다는 듯 바닥을 내려다봤다.

“잔뿌리, 아니, 그 이상이군.”

“여러분이 무얼 걱정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전 정복욕이 있는 것도, 권력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전 그냥 제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해왔던 일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떨렸다.

만약 바닥 밑에 잠들어 있는 힘이 사방으로 분출된다면…….

“지금 널 죽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이 몸으로 겨우 힘을 제어하고 있습니다.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하세요.”

“내버려 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겠지. 오히려 시간을 주는 꼴이니.”

샬롯은 떨리는 눈으로 타챠를 바라봤다.

“아저씨?”

“위에 있는 인간들에게 도망치라고 해도 어차피 듣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

“방치하면 온 땅이 더럽혀지겠지.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창이 움직였다. 샬롯은 타챠의 앞을 막아섰다.

“미쳤어요? 사람들 다 죽는다고요!”

“지금 여기서 저자를 내버려 둔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진다는 보장은?”

“없죠, 없지만 최소한 생각은 해봐야죠.”

“저자의 몸을 봐라. 이미 막바지에 다다랐다.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 직전이란 뜻이겠지.”

타챠가 밑을 내려다봤다.

“바닥에 있는 저 힘은 그저 순수한 덩어리일 뿐이다. 폭발하면 주변에 피해를 주겠지만 그게 끝이지. 하지만 저걸 가공해 원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면?”

“…….”

“타린의 뜻을 이어받은 자는 그 무엇보다 대지를 숭상해야 한다. 개인의 업인 무승으로서의 삶도, 타린의 뜻보다 앞설 순 없다. 대전사와 싸우다 죽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나, 이 또한 나쁘지 않겠지.”

이 아저씨는 정말로 할 생각이다.

연구동으로 진입하기 전에 타챠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라. 나는 정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샬롯은 온 힘을 그러모아 바람을 불렀다. 바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수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아저씨도 죽게 된다고요.”

“넌 날 막을 수 없다.”

“좀 진정해요!”

“망설임이 언제나 최악의 결과를 낳지.”

창이 다가온다.

샬롯은 전력을 다해 바람의 벽을 쌓았다.

하지만 타챠의 창은 어떠한 저항감도 못 느끼겠다는 듯, 부드럽게 벽을 찢고 들어왔다.

코앞에 번뜩이는 창끝이 있었다.

샬롯은 눈을 질끈 감으며 버텼다.

몇 초가 지났을까.

슬며시 눈을 떴다.

“미숙했을 때도, 지금도 넌 쓸데없이 고집만 세지. 난 그래서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챠가 창대를 거뒀다.

“나가서 설득해 봐라. 1시간 주겠다. 대다수가 널 미친 사람 취급하겠지만, 영향을 받지 않은 몇몇은 도망쳐 살겠지.”

“아저씨.”

“정확히 1시간 후, 난 저자를 죽일 거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는 타챠였다.

설득할 수 없다.

아저씨는 여기서 죽을 생각이다.

“같이…….”

“샬롯.”

다정한 목소리였다. 타챠가 따스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준 적은 처음이었다.

“선택은 어느 한쪽을 포기하는 것이다.”

발밑에 잠든 거대한 힘.

아무것도 모른 채 생활 중인 도시 사람들.

압박감에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아저씨의 말대로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멀리 가라.”

“싫어요.”

바깥을 향해 몸을 틀 때였다.

“그 선택,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유단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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