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25화 (525/558)

제525화

“자, 받아.”

샬롯은 보따리에 가득 찬 과일을 바라봤다. 난처할 정도로 양이 많았다.

“이렇게 많이 안 주셔도 돼요.”

“쟁여두면 뭐 해. 얼른얼른 먹어야지. 아니다, 좀 더 줄까?”

“아니요,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오히려 제가 돈을 더 드려야 할 거 같은데…….”

“됐어. 사람들끼리 나누고 돕고, 그렇게 사는 거지.”

흐뭇하게 웃는 노파가 고개를 돌려 시계탑을 바라봤다.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여유를 가지면 이렇게나 풍요로운데 말이야. 유단 님의 말씀이 참 옳아. 그렇지 않니?”

“아, 네.”

샬롯은 억지로 웃음을 지은 다음 몸을 돌렸다.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향해 막대기를 휘두르는 게 보였다.

왼팔에 푸른 띠를 두른 아이들이 까르르 웃다가 잠시 멈춰 서서 입을 열었다.

“내가 유단 할 거야.”

“무슨 소리야, 이번에는 내 차례야.”

“넌 내 부하 해. 그리고 넌 나쁜 의원.”

“싫어. 착한 의원 할 거야.”

“착한 의원이 어디 있냐?”

“할아버지가 있다고 했어. 유단을 돕는 착한 의원도 많다고.”

“그래? 그러면 내가 착한 의원 할게.”

의견을 조율하더니 다시금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그중 한 아이의 몸에서 희미한 마나가 느껴졌다.

아이가 휘두르는 나뭇가지를 타고 마나가 뿌려질 때마다 희미한 레몬 냄새가 났다.

향기를 만드는 마법인가.

저 아이도 조만간 학회에 발견돼 루틴을 배우고 신인류로서 지녀야 할 책임 같은 걸 익히겠지.

툭, 나뭇가지를 휘두르던 아이와 부딪혔다. 피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멀뚱히 올려다보다가 휙 몸을 돌렸다.

“얘.”

샬롯은 아이를 불렀다. 레몬 향기를 뿌리는 아이.

“왜요?”

“그거 마법이야?”

“몰라요.”

“마법 같은데. 어른들이 안 알려줬어?”

“이런 건 마법이 아니에요. 냄새만 나고.”

“내가 보기엔 멋진데.”

“하나도 안 멋있어요. 진짜 멋있는 건 저기에 있는 어른들처럼 엄청난 마법을 쓰는 거죠.”

아이가 나뭇가지로 가리킨 곳에 학회 건물이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근데 왜요?”

“그 마법 말이야, 안 쓰는 게 좋아.”

“왜요?”

“나쁜 사람들한테 잡혀갈 수도 있거든.”

인상을 쓰며 말해도 아이는 킥킥 웃기만 할 뿐이었다.

“부러워서 그러죠? 내가 마법을 쓰니까. 난 앞으로 더 대단한 마법을 쓸 거예요.”

아이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말하자, 다른 아이들도 다가와 입을 열었다.

“맞아요. 찰스는 대단해요.”

“힘도 세요!”

“웃기기도 하고.”

샬롯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받으려 할 때였다.

“얼른 멋진 마법사가 돼서 유단을 도울 거예요.”

“야야, 유단이 아니라 학회장님.”

“왜? 그때 거리에서 만났을 때 분명 이렇게 말했어. 높고 낮음이 없으니 우린 다 똑같다고. 난 유단하고 친구 할 거야!”

“그래? 그러면 나도!”

“나도!”

“우리 모두 훌륭한 사람이 돼서 유단을 도와야 해. 다른 사람들처럼.”

또다.

샬롯은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렸다. 아이들이 다시금 나뭇가지를 맞대며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의 울음처럼 들려 소름이 끼쳤다.

마주 오는 사람들을 지나쳐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람을 일으켜 훌쩍 날아가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아저씨.”

문을 열며 타챠를 불렀다.

“아저씨?”

거실에 없었다. 오늘도 옥상에 올라간 걸까? 3층으로 올라가 자그마한 창으로 몸을 뺐다. 주변을 살핀 후 바람으로 몸을 띄었다.

옥상에 타챠가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푸른 깃발 옆에 타챠가 앉아 있었다.

“뭐 하세요?”

“기도.”

샬롯은 타챠의 꼬리에 걸터앉았다.

“무슨 기도요?”

“안식을 위한 기도.”

바람 없이도 펄럭이던 깃발이 한순간 축 늘어졌다.

“시궁창 냄새가 나는군.”

샬롯은 코를 킁킁거렸다.

“안 씻으셨어요?”

“넌 못 느끼는 거냐?”

“뭘요?”

“어제부터, 아니, 그전부터겠지. 지독한 냄새가 사방에 뿌려졌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주 거슬려.”

다시금 냄새를 맡아봐도 역하다고 느껴지는 건 없었다. 비유인가?

“악취가 아니라 어떤 기운이 느껴진다는 거죠?”

“아니, 냄새다. 인간들은 이 냄새를 못 맡는 건가. 아니면 이 냄새를 향기롭다고 착각하는 건가.”

타챠가 손을 까딱거렸다. 샬롯은 타챠 앞에 섰다.

“저길 봐라.”

타챠의 비늘 돋친 손이 샬롯의 정수리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사람 머리는 왜…….”

“잘 봐. 소리도 듣고.”

타챠가 가리킨 곳에 얻어맞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다리 한쪽이 없는 남자는 몸을 웅크려 다수의 폭력을 버텨내고 있었다.

폭력이야 흔하디흔한 일이라지만, 어린아이까지 껴서 발길질하는 게 보기 좋지는 않았다.

“왜 저러는 거예요? 뭘 훔치기라도 했어요?”

“유단을 욕했다.”

“네?”

“의족 하나 보급해 주지 않는 유단이 야속하다, 그렇게 푸념 한마디 했을 뿐이다. 그 결과가 저거고.”

“설마요.”

샬롯은 바람이 이어준 소리를 들었다.

“감히 학회장님을 욕보여?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도시에서 사는 인간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죽어, 죽어!”

엉성한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연극이라면 나을 텐데,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건 현실이었다.

한참을 분풀이하던 사람들은 남자가 울면서 빈 다음에야 흩어졌다.

샬롯은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타챠가 붙잡았다.

“기다려라.”

잠시 후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이 튀어나왔다. 눈에 익은 아이가 하나 있었다. 레몬 향기를 뿌리던 아이.

“이 아저씨야?”

“그런가 본데?”

“끌고 가자. 이런 새끼는 벌을 받아야 해.”

아이들이 저항하는 남자를 질질 끌었다. 남자가 손을 크게 휘두르자, 몇몇 아이는 씩씩대며 남자의 하나뿐인 다리를 밟았다.

비명이 거리를 채웠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몇몇 사람이 의아해하며 쳐다보다가도 옆 사람이 무언가 속삭이면 얼굴을 찌푸린 채 외면했다.

“학회장님을 욕했어.”

“세상에, 몹쓸 인간이네요.”

바람이 가져다준 대화 내용을 들으며 샬롯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지금…….”

“냄새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거리에 뿌려졌겠지. 내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옅게.”

샬롯은 학회 건물을 바라봤다.

아리엘의 작전이 실패로 끝난 건 두 달 전.

예정대로였다면 도착했어야 할 하늘석은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둔에 남아 상황을 살펴야 했으니, 샬롯과 타챠가 남았다.

두 달간 도시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상 징후를 찾았으나 특이점은 없었다.

그렇게 관찰을 이어 나갈 때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이 행복해한다는 점이었다.

자유를 내건 투쟁에서 승리했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그 모습을 보고 나니, 무언가 크게 엇나갔다는 느낌을 받았다.

왜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냄새.

샬롯은 코를 붙잡았다.

“넌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 거다. 너를 아끼는 기특한 아이들이 널 위해서 힘을 썼을 테니까. 물론 어느 정도는 노출됐겠지.”

타챠가 말했다.

“새로운 무기일까요? 냄새로 사람을 조종하는?”

“알 수 없다. 내가 냄새로 느끼는 이 힘이 정말 냄새인지, 아니면 어떤 마법인지, 그것도 아니면 치가 떨리는 마법 공학의 힘인지.”

와아아!

함성이 들려왔다.

샬롯은 남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무장한 거병들이 일렬로 들어서고 있었다.

트레일러에는 군인들이 타고 있었고, 그들을 마중 나온 시민들은 열광 어린 환호를 보냈다.

“이겼나 보네요.”

둔과 최단 거리에 있는 중소 도시 피리움. 병합설이 나돌고 군대가 움직이더니, 승전보를 남기며 군인들이 돌아왔다.

평화로운 연합 체제가 꾸려진 걸까, 아니면 무력으로 진압해 복속시킨 것일까.

알 수는 없었다.

알 수 없음에도 사람들은 기뻐했다.

새파란 광기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전쟁 중이다. 도시 간에 전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예견된 일이었지만 너무 빨라.”

“유단이…….”

“확신할 수는 없다.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책략인지, 아니면 마땅히 일어났어야 할 일이 조금 앞당겨진 것인지.”

타챠가 창대를 쥐며 일어섰다.

“아저씨?”

“유단을 만나야겠다.”

“네?”

“인간끼리 무슨 짓을 하든 난 상관치 않는다. 하지만, 이 냄새는 정도에서 벗어났어. 이건 인간이 아닌 대지를, 산을 더럽힐 것이다.”

훌쩍 뛰어 옥상에서 내려가는 타챠였다. 샬롯도 재빨리 따라붙었다.

“지금 가겠다고요? 작전도 없이?”

“작전?”

코웃음 치는 타챠였다.

하긴.

아저씨의 존재 자체가 작전이고 전술이고 전략이었다.

샬롯은 타챠가 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딱 한 사람, 랜더 아저씨를 빼면 이 거친 도마뱀 아저씨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했다.

상대는 알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인간인지, 기계인지.

아니면 둘을 초월한 무엇인지 예측할 수 없었다.

샬롯은 타챠의 앞을 막아섰다.

“가지 마요.”

“땅이 오염되기 전에 가야 한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아저씨가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위험하다는 말에 타챠는 오히려 반갑게 웃었다.

“위험이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바와 가깝지.”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고집이 더럽게 센 아저씨.

“그러면 같이 가요.”

“넌 여기 있어라.”

“왜요?”

“아리엘이 네 안전을 부탁했다. 그러니 넌 여기 있어야 한다.”

“아저씨도 제 말 안 들을 거죠?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챠가 몸을 틀었다.

“네 몸은 네가 간수해라.”

“그럴 생각이에요.”

“그리고, 나한테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라. 나는 정을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싸늘하게 식은, 세로로 찢어진 눈과 마주했다. 샬롯은 긴장감에 눌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인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멀게 느껴지던 학회 건물이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

“근데 어쩌실 생각이에요?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인간은 아닌데.”

두 달 전 도시 전복이 끝난 후, 유단은 학회 건물에 칩거했다.

종종 거리로 나와 사람들과 만났으나 한 달 전부터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두드리면 나오겠지.”

“머릿속에 싸울 생각만 있죠?”

타챠가 학회 단지 앞을 지키는 경비병에게 다가갈 때였다. 경비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방문 목적도 묻지 않았다.

“지하에 계십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군.”

타챠가 코를 씰룩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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