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24화 (524/558)

제524화

슬퍼할 시간이 없다.

은유적인 표현이라 생각했으나 실제로 경험해 보니 몸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날것의 말이란 걸 깨닫게 된다.

“여기 손 좀 빌려줘요!”

“이쪽에도 쓰러진 사람이 있어요!”

“저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혼란의 정중앙에서 부센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내의 이름을 되뇌며 슬픔에 잠기고 싶어도, 산 자들의 눈이, 산 자들의 외침이 허락지 않았다.

“이 개새끼들!”

누군가의 발길질에 군인의 입이 돌아갔다.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실신한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군인의 턱이 으깨지는 동안 부센은 수비 병력을 외곽에 배치했다.

2차 습격이 올 수도 있었다.

호롬에서 직접 손을 쓴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과장님.”

구금돼 있던 작전실 병사가 식별표를 잔뜩 들고 왔다. 군 간부들의 식별표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협력자 외엔 모두…….”

“지휘관급 중에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야?”

“예.”

지독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처리했다. 시의회가 뒤집힌 그날, 그 혼란 속에서 계획은 진행된 것이리라.

“남은 병력 최대한 모으고 자경단과 협조해서 시민들 안전 확보하자.”

“성인 남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진지를 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포로들은…….”

“관리할 수 있는 숫자만큼 살려둬. 나머진 죽이고.”

“예.”

이미 시민들 손에 수십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죽었다. 무고한 군인들까지 휘말려 큰일을 치를 뻔했다.

부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울음과 비명, 역겨운 탄내와 그을음, 그리고 불꽃.

몇 시간 만에 도시가 엉망이 됐다.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그 긴 15년 전쟁조차 버텨온 볼로스가.

부센은 정신을 차렸다. 혼란을 잠재워야 아이들을 안심하고 데려올 수 있으니까.

새벽녘이 되도록 쉼 없이 움직였다. 외곽에 피신해 있던 시민들도 중심지로 돌아와 일손을 보탰다.

클랜이 밀집된 동부는 타격이 없으니 건물이나 기반 시설 재건은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은?

“대위님.”

멍하니 서서 검은 연기를 응시하다가 왼쪽을 바라봤다. 밀레나였다.

“아, 상사님.”

“괜찮냐고 물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지금은 괜찮습니다. 근데 계속 괜찮을지는 모르겠군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털었다. 아내의 얼굴과 목소리를 지금 떠올려선 안 된다. 지금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움직여야 하니까.

“그보다 어떻게 감사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부센은 건물 잔해 밑을 수색 중인 자그마한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기계가 소리를 내면 어김없이 그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그렇게 찾아낸 생존자가 스무 명이 넘었다.

살아서 부모 품에 안긴 아이를 봤을 때 부센은 기쁘면서도 착잡했다. 저 행운이 아내에게도 허락됐다면.

“감사는요.”

밀레나가 거리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시의회의 생존자는요?”

“의원이 몇 명 계십니다. 호롬과의 조율 때문인지 살려 뒀더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지휘 계통이 완전히 마비되면 복구하는 데 한참 걸리니까요.”

부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쉬시는 게 어때요?”

“아니요. 지금 쉬면 안 될 것 같아요. 쉬면 계속 떠오를 테니까.”

“그렇겠네요. 아이는요?”

“외곽지에 맡겨 놨습니다. 지금쯤이면 이쪽으로 오고 있겠네요. 다들 소식을 들었을 테니.”

부센은 뺨을 툭툭 쳤다.

“상사님이야말로 좀 쉬시죠. 저는 마저 일을 봐야겠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동료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때였다.

“아, 대위님. 말씀드릴 게 하나 있어요.”

“예. 말씀하시죠.”

“분배소를 확인해 보려는데, 문제 될 게 있나요?”

“분배소를요?”

평소라면 복잡한 행정 절차 및 학회 관계자의 허락이 있어야 내부 확인이 가능하지만…….

“제가 학회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시설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려면 보안키가 필요하니까요.”

“그럴 필요는 없고요, 대위님은 안 된다고 한마디만 해주시면 돼요.”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책임 소재 때문에 절 걱정해 주시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지금 문제 삼을 사람도 없고요.”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대위님은 거절하신 거고, 저희가 억지로 연 걸로 할게요.”

밀레나가 연한 미소를 지은 후 몸을 돌렸다.

“근데 분배소는 왜…….”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고요. 죄송해요.”

“아닙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최대한 편의를 봐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가하란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 밀레나였다.

부센은 몸을 튼 후 포박된 의원들을 향해 걸어갔다.

“호롬에 편입되는 게 앞날을 생각하면 더 나은…….”

퍽!

나불대는 의원의 주둥이를 후려 찼다.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찢어 죽이고 싶지만 들어야 할 게 많았다. 부센은 검을 꼬나쥔 동료들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 듣고 나서, 그다음에.”

동료들이 시뻘게진 눈으로 의원을 바라보다가 등을 돌렸다.

“이 멍청이들아! 개별적인 도시로 남는 건 한계가 있어! 둔에서 일어난 불꽃이 곧 대륙을 덮칠 거야! 복속이든 연합이든 힘을 합치지 않으면…….”

부센은 고개를 쳐든 채 당당하게 말하는 비쩍 마른 의원한테 걸어갔다.

무엇 하나 잘못한 게 없다는 듯, 옳은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한 눈동자였다.

“의원님.”

“그래, 부센. 자네라면…….”

“의원님의 가족은 어디에 있습니까?”

“…….”

“어디에 있습니까?”

“이봐, 부센. 미래를 생각해.”

미래.

부센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의원의 팔뚝을 가볍게 찔렀다. 치명상도 아니고 소독할 필요도 없이 잘 붙들고만 있어도 나을 상처.

그런 상처에.

“아아악!”

의원은 죽을 듯이 비명을 질렀다.

자지러지는 의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의원님, 기도하세요. 의원님의 가족이 발견되지 않길. 눈에 띄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부센은 의원의 어깨를 강하게 쥐어짠 후 일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가하란이 타고 있던 거병과 밀레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배소를 찾아간 것 같았다.

그쪽은 그쪽, 나는 여기 일에 집중해야지.

“불길이 안 잡힌 곳부터 인원 투입하고, 병원은 포화 상태니까 부상자들은…….”

슬픔에 눈길이 가지 않도록 바쁘게 움직였다.

* * *

가하란은 감각기를 낀 후 잠금장치를 매만졌다. 떠오른 시그니처를 슬쩍 살핀 후 회로를 재구성했다.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밀레나가 마법등을 들어 올리며 안쪽을 비췄다.

“내부 시설은 괜찮네.”

“도시 병합이 목적이었을 테니까. 핵심 설비인 분배소는 건드리지 않았겠지.”

자연 상태의 마나를 마전기로 바꾸는 시스템. 아버지와 덴스 교수의 역작.

정교하게 설계된 장치를 하나하나 살필 때였다.

“이건가 보네.”

기존 설비에 추가된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용량이 제각각인 커넥터가 다발로 연결된 2m 크기의 철제 박스.

가하란은 왼쪽 착안을 열어 상자 주변을 살폈다. 연결된 무수한 점들이 느릿하게 물결치고 있었다.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장치야. 분배소가 기능을 정지해도 이쪽은 작동하도록 설계됐고.”

상단부 철판을 거둬냈다.

층층이 쌓인 엘리멘트 패널이 보였다.

익숙한 마력선 도안들이 패널에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 안정화를 위한 회로였다.

“이건…….”

가하란은 하단부에 연결된 패널 하나를 뜯어냈다. 외부에 새겨진 마력선은 마전기 전송에 필요한 규격 변화 회로였으나, 그 밑에 숨겨진 것이 있었다.

공학자들이 본다고 해도 알아낼 수 없는 회로.

짜맞춤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가하란은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복잡하게 엉킨 선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짜맞춤을 기반으로 집약률을 올린 회로였다. 설계한 사람은 아마 유단일 것이다.

시그니처를 착안으로 바라봤다.

엉킨 선들이 점으로 변하며 골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각 영역을 건드리며 반응을 살폈다.

“어때?”

밀레나가 물었다.

“특수 대역 마나 파장을 이용한 에너지 이동. 마나 포집기와 유사한 형태야. 단지 이쪽은 에너지를 특정 방향으로 무한히 방사할 뿐, 이 설비에 따로 모으지는 않고 있어.”

“그렇다는 건…….”

“유단은 이미 정제된 마전기를 상당량 보유한 것 같아.”

계산이 필요했다. 분배소의 출력과 전송체의 송수신 제원, 레테가 작용한 시일을 어림잡아 수치를 내면.

가하란은 눈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위험한 상황이야?”

“유단이 뭘 원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요충분한 에너지원은 확보했을 가능성이 커. 단순 계산만으로도 하늘석의 부유 장치를 6개월 정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야. 손실 없이 저장해 놨다면…….”

가하란은 여전히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리를 보며 말했다.

“둔 정도는 지도에서 지울 수 있을 거야. 아니, 방식에 따라서는 범위가 더 커질 테고.”

“폭발을 목적으로 마전기를 모은 걸까?”

“아닐 거야. 그런 거였다면 공들여 학회를 차지하고 정치적으로 활동할 이유가 없어.”

가하란은 통신기를 허리춤에 찬 후 분배소 첨탑을 올랐다. 밀레나가 밑에서 외쳤다.

“뭐 하려고?”

“벨틴이 남긴 마나 간섭 때문에 장거리 통신에 장애가 생겼어. 통신기로는 하늘석에 연락할 수 없으니 이걸 이용해 보려고.”

공구함을 장착한 H-33 세 대가 뒤따라 첨탑 위로 올라왔다. 밀레나는 혹시 모르니 주변을 살펴보겠다며 건물 옥상을 옮겨 다녔다.

모노클로 마나 분포도를 확인한 후 송신 모듈을 손봤다.

끊겼던 미니 비트가 금세 활성화됐다.

-가하란. 계속 연락이 안 됐어요. 무슨 일이에요?

엔엔의 목소리였다.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그보다 둔에 도착하려면 어느 정도 남았죠?”

-지금 속도라면 사흘 후에 도착해요. 내부 정비 때문에 고도를 낮춘 상태라 조금 느려요.

“둔에 도착하면 도심지의 마나 분포도를 살펴봐 주세요. 연구 단지 혹은 학회 쪽을 중심적으로. 예상치를 초과하는 고밀도 반응이 보이면 카트시와 연락한 후 디졸브 필드 생성을 준비해 주세요.”

-바로 사용하는 건가요?

“카트시가 판단해 줄 거예요. 만약 현장에서 예측할 수 없으면, 저한테 연락해 주세요.”

-많은 문제가 발생할 거예요. 알고 있죠?

가하란은 통신기에 대고 예, 라고 작게 대답했다.

하늘석 내부 설계에 손을 댔던 이유, 외부 전송탑 배치를 바꾸고 추가 설치를 한 이유.

시행착오를 겪으며 예정일보다 늦어지게 됐지만, 그럼에도 서두를 수 없었다.

유일무이한 대응 수단을 갖춰야 했으니까.

-로트가 없어도 한정된 지역이라면 마나 공핍을 유도할 수 있겠죠.

“부탁드릴게요. 자세한 건 이동하면서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몸조심해요.

“엔엔 님도요.”

통신기를 허리에 찬 후 첨탑에서 뛰어내렸다.

“지금 가야 하는 거지?”

“당장 문제가 터지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유단이 시의회를 정리한 걸 보면 계획 실현까지 머지않은 듯해.”

레테가 담긴 박스를 부순 후 트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부센이 보였다.

작별 인사를 하고 싶었으나 눈짓으로 대신했다. 부센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게요.

HH32에 코어를 옮긴 닥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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