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3화
키엘은 발치에서 기웃거리는 작은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마름모꼴 몸통에 다리가 네 개 부착돼 있었다. 기능이 무엇인지 유추하기 어려운 외관이었다.
용병들이 쓰는 물건인가?
위험 구역에 진입하기 전, 정찰용으로 쓰이는 기계인형이 있다던데.
“옵니다!”
날 선 외침에 고개가 돌아갔다. 작은 기계인형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회색 괴물이 접근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기술력으로 무장한 회색 괴물을 처리하지 못하면…….
전황을 확인하며 명령을 내리려 할 때였다.
키엘 눈에 다시금 납작한 기계인형이 밟혔다. 바쁘게 진형을 구축 중인 보병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서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도 기계인형을 목격했으나 키엘과 마찬가지로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고도화된 마법 공학이라 한들 자그마한 기계인형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니까.
눈앞에 거병 넷을 잡아먹은 괴물이 있는데, 힘주어 밟으면 으스러질 기계인형 따위가 눈에 들어올까.
위화감이 들었다.
키엘은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정체 모를 소형 기계인형이 여섯 대, 아니 일곱 대. 눈동자를 돌리며 숫자를 세는 도중에도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용병들이 쓰는 물건이 아니다.
판단을 내렸다.
“주변을 확인하고 초소형 기계인형이 보이면 제거해.”
통신기를 잡고 말했다. 곧바로 반응이 왔다. 진지를 구축한 보병 중 몇몇이 빠져나와 작은 기계인형을 잡으러 다녔다.
“이봐, 거기!”
때아닌 촌극이 벌어졌다.
자그마한 기계인형은 예상보다 빨랐다. 보병들이 다가서면 일정 거리를 두고 물러섰고, 돌아서면 슬금슬금 다가섰다.
거리를 유지하는 걸 보며 확신이 들었다. 뭔가가 있다. 이 작은 기계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다행히 마나 파장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나, 마전기를 사용하는 마법 공학품이 지닌 불변의 법칙.
강대한 에너지를 사용할수록 강한 파장을 발생시킨다. 소형일수록 기체에 내장된 에너지원이 작을 테니, 살상력은 낮을 것이다.
어쩌면 진형을 파악하는 용도로 적이 살포한 것일지도 모른다.
“21 특임대가 처리한다.”
신체술 사용자를 불러 모았다.
자존심 강한 놈들이라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신체술을 이용해 소형 기계인형을 붙잡았다.
순식간에 기계를 파괴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제거 과정에서 별다른 사고가 없는 걸 보면 관측용 기계인 듯했다. 자그마한 기체에 어떻게 운동 장치와 전송 회로를 넣었는지는 의문이지만.
툭, 툭, 툭.
키엘은 발밑을 내려다봤다.
처음 발견했던 기계인형이 발목을 계속 들이받고 있었다.
고장 난 건가.
“이든.”
부관이 기계인형을 붙잡았다. 기술팀에게 보내라고 지시한 후 회색 거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진을 멈췄다.
무얼 하려는 걸까?
시간을 주고 싶지 않지만, 놈은 벨틴의 포격을 튕겨낸 불가사의한 기술력을 지녔다.
접근전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상황.
외곽으로 빼둔 다른 거병들을 합류시킨 후 단숨에 제압해야 했다.
“벨틴 사격 준비 끝냈습니다!”
“대기해.”
쏴봤자 또 튕겨 나갈 것이다.
대응할 수 없는 거리까지 끌어들인 후 면전에 제대로 먹여야 했다.
-1W78 건물 위에 거병 발견. 생산 라인, 모델 확인 불가.
역시나 지원군이 있었나.
정면으로 시선을 유도하고 측면을 비집고 들어온다. 정직한 기본 전술이었으나 전력의 비대칭이 문제였다.
-뭐, 뭐야!
보고 중이던 거병 기사 쪽에서 연락이 끊겼다. 키엘은 손을 움켜쥐었다.
소수 정예였다.
어디지? 설마 호롬 쪽에서 뒤통수를 치는 건가?
한시적 아군은 언제나 적군이 될 수 있었다. 도시 이권을 나누기로 한 호롬이 배신하고 혼자 독식하려는 거면…….
용병들의 상황을 살폈다.
분주히 움직이며 회색 거병을 방해 중이었다. 각종 장비를 동원해 파괴 공작을 벌이고 있으나 회색 거병의 외장갑은 굳건했다.
용병은 작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호롬이 수를 썼다면 용병들도 다른 꿍꿍이를 보여야 했는데, 그런 낌새가 없었다.
호롬은 아니라는 건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 한 기의 거병 때문에 작전이 삐거덕거리다니.
“트레일러 옆에 붙여놓은 시민들, 저 거병 앞으로 보내.”
부관의 표정이 굳었다. 키엘은 눈을 씰룩였다.
“이제 와서 주민들 신경 쓰는 척하지 마. 내 명령을 네가 전했을 때 수백 명이 죽었어. 나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싶으면, 그래도 좋아. 근데 끝나고 나서 해. 끝나고 나서 추모하고, 슬퍼하고, 후회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죄송합니다. 바로 이행하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도시의 통제권을 가져오지 못하면 우린 끝이야. 지켜내서 도시의 새 주인이 될지, 아니면 성난 창칼에 찔려서 개죽음당할지 잘 선택해.”
부관의 어깨를 강하게 잡은 후 놓았다.
트레일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군인들의 지시 아래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 티를 막 벗어난 젊은 애들을 앞장세웠다. 돌아서면 창에 찔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 벌벌 떨면서도 회색 거병을 향해 나아갔다.
대치 중이던 군인과 용병들이 산개했다.
회색 거병과 오십여 명의 주민들이 마주했다.
“시간만 벌어. 그거면 돼.”
어디 소속인지는 알 수 없으나, 회색 거병은 주민들을 신경 썼다.
트레일러에 시민을 붙이자마자 공격이 멈춘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서서히 뒤로 물러서는 회색 거병이었다.
인간 장벽을 세워 길목을 막았다.
-제발…… 제발…….
통신기를 통해 최전선에 선 주민들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미간이 아려온다. 부관마저 멈칫한 명령. 대다수의 부하들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겠지. 끔찍한 작전이라면서.
전쟁 규약에 어긋난다는 것도, 인간의 도리를 져버렸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딴 걸 머릿속에 박아두고 신경 쓸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다.
염치가 주린 배를 채워주지 않는다. 갈증을 해소해 주는 건 악의가 곁들여진 상승 욕구뿐이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된다면 모든 게 해결된다. 속으로 욕하던 부하들도 서서히 잊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친구라 부를 수 있는 놈도 제거했다. 생면부지의 인간들을 앞세우는 거? 몇 번이고 할 것이다.
이번 한 번만 마무리 지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까!
티딕, 티딕.
또 그 소리였다.
신경질적으로 밑을 내려다봤다.
어디서 또 솟아난 걸까.
대체 몇 마리를 푼 걸까.
납작한 기계인형을 발로 짓밟았다.
키잉, 키잉, 키잉.
희미한 소리가 났다. 베어링이 긁힐 때 나는 쇳소리 같기도 했고, 어그러진 쇠바퀴가 구를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거슬렸다.
군화 굽으로 기계인형의 몸통을 내리찍을 때였다.
붉은빛이 보였다.
마름모꼴 몸통 중앙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끼이이이이!
정신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소음이 시작됐다.
키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무릎을 꿇어야 했다. 통신기를 집어 던지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날카로운 소리는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방향 감각이 사라진다. 귀 안쪽 깊은 곳에서 지진이 났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은 휘청거렸다.
시야마저 점점 어두워졌다. 커튼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양옆이 어둠에 잠겨갔다.
안 돼.
키엘은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재능이 없어 오랫동안 사용하지는 못하지만, 잠깐이라면.
지면에서 끌어당긴 마나로 몸을 보호했다. 몸이 안정화되며 상실했던 대부분의 감각이 돌아왔다.
재빨리 검을 뽑아 기계인형을 찍어버렸다. 벌레처럼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던 기계인형이 금방 정지했다.
“하아, 하아, 하아.”
키엘은 주변을 돌아봤다. 사방에서 정신을 갉아먹는 소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최전선으로 내보낸 민간인들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 군인들과 용병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신체술을 사용할 줄 아는 몇몇과 마나의 혜택을 받은 신인류 정도가 소리에 저항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럴 순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고작 소리였다. 소리를 들었다는 것만으로 제압을 당하다니.
무엇보다 저 작은 기계인형 안에 어떻게 이런 기능을 담은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기계인형은 크기가 작아질수록 삽입할 수 있는 회로 역시 작아지고, 에너지원도 작아진다.
사족 보행으로 이동하며 주변을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자원을 썼을 텐데, 거기에 소리 증폭기와 감각을 망가트리는 장치까지?
레거시.
그런 게 가능한 건 잊힌 마법 공학품이라 불리는 레거시뿐이었다.
키엘은 눈앞에 보이는 작은 기계인형의 수를 헤아렸다.
서른 대가 넘어갔다. 아니, 그보다 더 많았다.
하나 구하기도 힘든 레거시가 저렇게 쏟아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저건 제작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시선이 천천히 회색 거병 쪽으로 향했다. 기절한 주민들을 피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악마다.
존재해선 안 될 것이다.
쿵!
키엘은 뒤쪽을 돌아봤다.
새하얀 팔과 다리를 늘어트린 기괴하게 생긴 거병이 보인다.
하얗게 빛나는 팔. 저건 또 뭐지? 외장갑 없이 무엇으로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거지?
티딕, 티딕.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바닥을 내려다봤다. 초소형 기계인형들이 네 개의 다리를 흔들며 주변에 모여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기계인형들이 다리를 굽히더니 뛰어올랐다. 키엘은 필사적으로 그것들을 쳐냈다.
하지만 몇 마리가 다리에 붙었다. 밀착한 그놈들은 몸을 타고 올라왔고 이내…….
키이이이잉!
목덜미 밑에서 굉음을 냈다.
키엘은 안구 안쪽에서 무언가 녹아내리는 걸 느끼며 검을 놓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 * *
비앙크에서 내린 밀레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쓰러진 사람들을 바라봤다.
“실제로 보니까…….”
실험실에서 몇 번 체험해 봤으나 이 정도로 효율적일 줄은 몰랐다.
귀에 꽂아 넣은 기기를 잠깐 빼자 아찔한 소음이 고막을 때렸다. 신체술 사용자라 한들 장시간 노출되면 신체 감각 기관이 엉망이 될 것이다.
기기를 다시 귀에 꽂아 넣었다. 그렘린이 내는 소음을 중화해 주는 장치. 이게 없으면 그렘린한테 접근하기 힘들다.
“이쪽은 대충 정리했고.”
수뇌부로 보이는 자들을 포박한 후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또 다른 기계인형과 함께 돌아다니는 가하란이 보였다.
저건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가하란이 개발한 기계인형이 워낙 많은지라 제작명을 기억하는 것도 일이었다.
HH32였나? 인간 손 타입이면 맞는 거 같긴 한데.
가하란의 지시를 받은 기계인형들이 바퀴를 연신 굴리며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을 챙겼다.
군복을 입은 자들을 따로 분리해 줄로 묶었고, 용병으로 예상되는 자들도 격리했다.
사람은 죄다 쓰러져 있고 기계들만 신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종종 마법사로 보이는 어린 친구들이 가하란의 앞을 막았으나, 외력에 농락당하고 얌전해질 뿐이었다.
신인류라 해도, 마법적 루틴을 갈고닦지 않은 어설픈 전투 마법사들은 노련한 보병보다 약하니까.
애초에 재능 있는 자들은 전부 둔에 있는 학회로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 개인 기량을 개발할 수 있으니까.
밀레나는 주변으로 몰려든 그렘린을 바라보다가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너희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배운 전투 기술이 무의미해지는 거 같아.”
그렘린한테는 언어 학습 장치가 없다고 들었다. 말을 들어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유토니아 커넥톰으로 모든 게 연결돼 있으니, 관리 주체인 유토니아한테는 목소리가 닿지 않을까?
그렘린을 내려놓고 손을 툭툭 털었다.
가하란 한 명, 로트 한 기, 각종 지원 기체가 담긴 트럭 한 대.
“도시 하나를 상대하기에 충분하다는 거네.”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