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22화 (522/558)

제522화

성능이 제한된 거병이 아군 거병 둘을 격파했다.

과정은 보지 못했으나 결과는 선명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키엘은 연락병에게 손짓함과 동시에 용병들을 노려봤다. 용병들이 장비를 챙겨 흩어졌다.

“포격반 준비 끝나는 대로 저거 날려.”

회색 거병이 양손에 쥔 단창을 가볍게 털어내며 전진했다.

“각기 현 위치 고수! 지원 병력 유무 확인 후 중앙지로 집결해.”

감시망에 구멍이 뚫렸을지도 모른다. 회색 거병이 미끼일 수도 있으니 수색 병력을 보존한 채 대응해야 했다.

“벨틴 방출까지 3분입니다!”

포격반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는 무기지만 신속한 사격은 불가능했다. 마나 보충이 끝난 상태라면 포신만 고정한 채 발사하면 되지만, 지금은 충전 도중이었다.

“2소대.”

-가고 있습니다.

중앙 집결지에 대기 중이던 거병 둘이 길목을 틀어막았다.

기준 출력 100 엘론인 H78 모델.

시가지 전투에 특화된 기체라 좁은 길목도 거리낌 없이 진입할 수 있었다.

-정확히 뭐에 당했는지 알 수 없으니까 거리 둬.

-그래도 간은 봐야지.

기사들 간의 대화가 통신 채널을 통해 들려왔다. 단거리 통신이라 잡음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목소리였다.

큼지막한 통신 장비를 맨 연락병이 고개를 틀며 말했다.

“4소대, 5소대에서 지원 병력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동쪽은 괜찮다는 건데.”

“방금 1소대에서도 보고가 왔습니다. 육안과 탐지 장치로 확인해 본 결과 다른 거병은 없다고 합니다.”

“정말 저거 한 대란 건가?”

키엘은 통신기를 손에 쥐며 저 멀리 있는 회색 거병을 바라봤다.

부센과 안면이 있는 자.

어떤 사이인지는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남편 말고 아내 쪽과 인연이 있는 듯했다.

설마 군 관계자인가?

아니, 그런 건 사소한 문제였다.

어떻게 기능 제한을 풀고 움직이고 있는 걸까. 보안팀에서 걸어둔 암호화 회로는 단시간에 풀 수 없는 장치였다.

불길하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다가오고 있는 회색 거병을 눈여겨보다가 입을 열었다.

“시민 50명 정도만 위치 이동시켜.”

“어디로 이동시킵니까?”

“여기로.”

연락병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통신기를 붙잡고 말을 쏟아냈다.

키엘은 입 안에 남은 담배 맛을 느끼며 회색 거병을 노려봤다.

우연히 휘말린 연합 도시 쪽 장사꾼일까, 아니면 부센이 초대한 군 관계자일까.

분명한 건 여기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신 채널 11번 유지해.”

연락병이 통신 장치를 조작하자 다시금 거병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나 탐지기 반응이 왜 이래?

-그쪽도 고장이야?

-두 개가 동시에 고장 날 일은 없잖아.

-그렇다는 건, 저 거병 안에 코어가 두 개 있다는 건데.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야.

코어가 둘?

오토마타가 두 개나 설치돼 있다는 건가?

키엘은 통신기를 붙잡았다.

“코어가 두 개라는 거 확실해?”

-예. 탐지기가 고장 난 게 아니라면 확실합니다.

“기준 출력은 몇으로 예상돼?”

-5 엘론에서…… 160 엘론입니다.

“뭐?”

상대 기체의 마나 혹은 마전기 분포도를 계측하면 기준 출력을 대략적으로나마 알아낼 수 있었다.

오차 범위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5에서 160은 측정 이상이라고 봐야 했다.

-가시화 패드에 나타난 수치가 계속 변화합니다. 가변 출력?

-저 역시 수치가 이상하게 표시됩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오토마타를 가동하려면 최소한의 에너지가 필요한데, 5 엘론은 한참이나 부족한 수치였다.

게다가 변화폭이 너무 컸다.

기준 출력 100 엘론인 거병은 기동을 시작하고 나면 70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고, 배터리 한계치를 끌어다 쓴다고 해도 110을 넘지 못한다.

5에서 160은 설명되지 않는 수치였다.

-피에스!

비명이 통신기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키엘은 눈을 부릅뜬 채 통신기를 움켜쥐었다.

대치 중이던 회색 거병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누가 뒤에서 강하게 민 것처럼, 한순간 가속하더니 단창으로 아군 거병의 체임버를 꿰뚫어 버렸다.

-이 개새끼가!

“헤이런!”

키엘이 다급하게 통신기에 대고 외쳐봤으나 소용없었다.

헤이런이 탄 거병이 회색 거병을 향해 돌진했다.

시가지 전투에 특화된 거병. 날렵한 체형과 빠른 이동이 특장점인 거병인데, 이상할 정도로 느려 보였다.

순간 가속한 회색 거병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걸음마 수준이었다.

콰드드득!

밑에서부터 그어진 단창에 거병 전면부가 갈려 나갔다. 회색 거병이 든 단창은 얇았으나, 거병의 외장갑을 손쉽게 찢어발겼다.

불꽃이 튀어 올랐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쿵.

전면부가 갈려 나간 거병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11번 채널이 완전한 침묵에 잠겼다.

“헤이런, 피에스.”

쓰러진 거병을 바라보며 부하들의 이름을 불러봤으나 대답은 없었다.

회색 거병이 다시 움직였다.

쓰러진 거병을 짓밟고 살며시 뛰어오른 후 넓은 도로로 들어섰다.

집결지와의 거리, 이제 100여 미터.

“전 거병소대 집결지로.”

키엘은 모든 채널에 목소리를 퍼트렸다. 지원 병력이 없는 걸 확인했으니 화력을 모아 저 회색 괴물을 처리해야 했다.

“벨틴 사격 가능합니다!”

저 멀리서 포격반의 음성이 들려왔다.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키엘은 수신호를 줬다.

벨틴.

오라클에서 개발한 검은색 무기가 회색 거병을 겨누었다. 마전기 공급용 트레일러 세 대에서 강렬한 마나 파장이 흘러나왔다.

한 번 사격할 때마다 교체되는 카트리지 가격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이미 거병을 네 대나 잃은 시점이었다.

망할 회색 괴물을 노획해 분해, 연구하는 것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3, 2, 1. 발사!”

투우웅!

트레일러에 연결된 커넥터가 크게 흔들렸고, 곧이어 검은 포신 끝에서 보랏빛 에너지가 방출됐다.

키엘은 눈을 얇게 뜨며 정면을 바라봤다.

모든 걸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문명의 이기. 거병의 외장갑도, 탈로스도 보라색 줄기에 노출되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질 것이다.

끝났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죽음의 빛이, 아주 조용히 갈라졌다.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나가 경로상의 모든 걸 녹여버려야 할 빛이 회색 거병 코앞에서 방사형으로 퍼져나가 버렸다.

허공으로 치솟은 빛줄기는 얼마 못 가 밤하늘 사이로 녹아들었다. 양옆으로 뻗어나간 보랏빛은 영양가 없이 건물들만 갈라버린 후 사라졌다.

우르르, 건물이 내려앉으며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키엘은 가팔라지는 숨을 다잡으며 외쳤다.

“재사격 준비!”

쿠구궁, 트레일러 상단부의 카트리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카트리지가 교체되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자욱했던 먼지가 걷힌다.

그리고.

회색 거병이 보였다.

* * *

“유토니아, 손실률은?”

-2.762%입니다. 오차 범위 이내예요.

“하늘석의 지원이 없으면 어쩔 수 없나. 외장갑은?”

-문제없어요. 구동계 온도도 정상 범위고요. 다만, 충돌 순간에 마나 포집기 가동성이 낮아졌어요.

“고밀도 마나가 분사된 거니까 이해해야지.”

가하란은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감각 확장 7단계.

민감해진 신경계에 불쾌감이 들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쉴드 회수했어요. 2번 코어는 병렬 연산 잠시 중단 후 재기동할게요.

“카트리지 교체까지 시간 남았으니까 서두를 건 없어.”

가하란은 거병의 오른팔을 바라봤다. 흠집 하나 없는 매끈한 외장갑이 보인다. 기대했던 것보다 내구성이 좋았다.

-쉴드 재기동까지 13초 남았어요.

“에너지 소모는 감당할 만한 수준인가?”

-네. 하지만 보완이 필요해요. 연이은 사격에 노출되면 손실률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국소적 마나 차폐 기기, 쉴드의 성능도 검증을 끝냈다. 실험실에서 수없이 확인했으나 실전은 처음이었다.

-민간인이 전투 지역으로 진입했어요. 예상한 대로 벽을 세울 거 같아요.

“‘그렘린’은?”

-침투해 놨어요. 명령만 보내면 돼요.

“상황 보고 제압하자.”

-네.

가하란은 오른손에 쥔 단창을 머리 뒤로 뺐다.

저 멀리 보이는 트레일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도움닫기 후 단창을 던져버렸다.

쐐애액!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단창이 트레일러를 꿰뚫었다.

단창에 내장된 배터리가 과반응을 일으킴과 동시에.

쾅!

소규모 폭발을 일으켰다.

트레일러의 잔해물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민들이 트레일러 쪽으로 가네요.

“한 대 날렸으면 됐어. 그보다 보정 없이도 나름 운동 수행력이 괜찮네.”

-저변에서 가하란의 뇌를 이용해 연산 중이에요. 2코어가 담당 중이죠.

“부하가 거의 없는데. 지연도 안 느껴지고.”

-가용 자원이 남아 있다는 뜻이죠. 가하란의 뇌는 아직 밑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너무 쥐어짜지는 마.”

-해보다가 위험하면 멈출게요.

경고음에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야가 옮겨졌다. 장창을 쥔 채 접근 중인 거병 세 대가 보였다.

“식별된 거병이 총 몇 대지?”

-하늘석의 지원이 없기에 범위가 한정적이지만, 일단 식별된 건 총 열두 대예요.

상당한 수였다.

하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로트에 집약된 기술과 내구성, 유토니아의 지원이 있으니까.

“확장 코어 재가동하고, 커널 최대로 열어줘. 포집으로 끌어모은 마나는…….”

-분사 장치에 분배할게요. 육탄전에는 기동력을 우선시해야 하니. 그렘린도 작동할까요?

“진입과 동시에.”

준비를 마친 후 상체를 숙일 때였다.

-4시 방향은 나한테 맡겨둬.

밀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앙크의 식별 코드가 가시화 패드에 나타났다.

“부센 씨는?”

-일단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어. 다시 돌아온다고는 했는데…….

“그래.”

아내를 잃고 절망하던 모습이 눈앞에 스쳐 갔다.

-가하란.

“어.”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모든 걸 다 해결할 수는 없어. 그러니…….

잠깐의 침묵.

“누나, 다치지 마.”

-그래.

밀레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기에 가하란 역시 말을 안으로 삼켰다.

“일단 이것부터 정리해야지.”

유토니아가 그렘린들을 일깨웠다.

그것이 신호였다.

가하란은 밀집한 거병들을 보며 달려 나갔다.

* * *

“트레일러를 보호해!”

민간인으로 트레일러를 둘러싸자 공격이 멈췄다.

키엘은 개인 장비를 챙긴 후 회색 거병을 바라봤다.

매끄러운 걸음으로 전장 한복판에 진입 중이었다.

다음 포격까지 4분.

지원병과 함께 둘러싸 제압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벨틴을 어떻게 막아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코앞에서 발사하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3소대는 제압용 머신을…….”

용병들과 통신을 나누며 지휘 계통을 확립할 때였다.

티딕, 티딕.

기괴한 소리가 발밑에서 났다.

“……이건 또 뭐야.”

사족 보행하는 납작한 기계인형이 어느새 발밑에 와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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