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1화
“그래, 그래야지.”
잘게 떨리며 제멋대로 열리고 닫히던 착안이 한순간 진정됐다.
동시에 울음이 치고 올라왔으나, 그건 한숨을 내쉬며 꾹 눌렀다.
메마른 기침이 나왔다. 몸이 감정에 휘둘리며 반응했다.
그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닥, 해야 할 일이 있어.”
-말씀만 하세요. 준비는 돼 있으니까.
여섯 개의 다리를 신나게 흔들며 말하는 닥이었다.
* * *
“대위님.”
“……아, 상사님.”
“아시겠지만 정신 차리셔야 해요.”
“예, 그래야죠. 우는 건 나중에 할 일이니까요.”
침착함을 되찾은 부센이었다. 그 역시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과 마주한 군인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잠깐.”
밀레나는 창문에 붙어 바깥을 바라봤다. 군인들이 경계하며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미슨, 쉘.”
부센이 말했다.
“아는 사람인가요?”
“방위군 소속입니다. 토벌전에 참여해서 얼굴을 알고 있죠.”
“아무래도 내분인 것 같네요.”
“……불러 보겠습니다.”
“저 둘을요?”
“네. 사정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저 혼자 있으면 아마 안심할 테죠.”
부센이 카운터 뒤쪽을 가리켰다.
“상사님은 저쪽에 계세요. 제가 미끼가 되어볼 테니.”
“오랜만에 합을 맞춰보죠.”
아이들을 3층에 숨겨놓은 후 부센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부센이 건물 밖으로 나가 손을 흔들었다.
“이, 이봐.”
밀레나는 카운터 아래에 숨은 채 목소리만 들었다. 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다시금 문이 열리고 가게 내부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과장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살아 계셨네요.”
“그래, 어찌어찌 살았지. 근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부센이 말을 멈췄다. 밀레나는 카운터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군인들이 무기를 내밀어 부센을 압박했다.
“검사관님께서 말했을 텐데요. 오늘 통제실로 오라고.”
“듣기야 들었지. 하지만 사정이 생겨서…….”
“됐습니다. 이미 늦었어요.”
“뭘 늦었다는 건가? 이봐,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줘.”
“볼로스는 호롬에 병합될 겁니다. 불필요한 사람은 제거되겠죠. 과장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전투 장비를 갖춘 거병이 아무런 제재도 없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어차피 사람도 솎아내야 했고. 아시잖아요? 이미 포화 상태라는 거.”
“이 미친 새끼들이!”
부센이 외치면서 달려들었다.
밀레나는 몸을 일으킨 후 쥐고 있던 과도 두 개를 던졌다. 일직선으로 날아간 과도가 두 군인의 목에 박혔다.
목을 움켜쥐고 꺼억꺼억 헛숨만 내뱉던 군인이 이내 꼬꾸라졌다.
밀레나는 카운터를 벗어나 부센의 팔을 붙잡았다. 시체를 짓밟던 부센이 거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고작, 고작 그딴 이유로 메이사가…….”
“대위님.”
깊은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든 부센이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들을 대피시키고 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아니요. 도움이 필요할 겁니다. 빌어먹을 경험을 하는 건 나 하나로 족해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하세요.”
“상사님도 무리하지 마세요. 볼로스 일은 볼로스 사람이 해결할 테니까.”
“대위님이 엮인 일이잖아요. 그러니 제 일이기도 해요.”
건물 밖으로 나와 부센과 헤어졌다. 좁은 골목을 따라 움직이다가 건물 위로 올라갔다.
주변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스무 대 정도의 소형 거병이 주요 길목에 배치돼 있었고,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통솔해 중심지로 모으는 중이었다.
기습 포격 때 주요 방위 시설이 죄다 날아간 건지, 아니면 방위군 전체가 이번 일에 가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항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넘어간 것이다. 시의회가 해체되며 생긴 혼란을 틈타 일이 준비됐을 것이다.
그 옛날 영지전을 떠올리게 하는 양상이었다.
땅을 갖고자 싸우던 이들.
그라운드 제로 이후 격동 속에 잠들어 있던 욕심들이 살 만해지니까 고개를 쳐든 걸까?
밀레나는 잿더미가 된 거리를 바라봤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였다. 창칼로 우악스럽게 전투하던 시대는 끝나버렸다.
거병이 장비를 갖춘 채 거리로 진입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마법에 능통한 신인류가 살상력을 발휘하면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지, 이젠 명백해져 버렸다.
불현듯 소름이 끼쳤다.
기술 진보의 끝에 서 있는 것이 가하란, 남편이었다.
하늘석의 내부 설계를 바꾼 것.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으나 가하란은 필요한 설비였으니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했었다.
가하란이 바라기만 한다면…….
눈앞에 벌어진 참상은 애들 장난처럼 변할 것이다. 기술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줄 테니까.
밀레나는 주변을 살폈다.
가하란을 찾아야 했다.
신체술을 사용해 옥상을 건너뛰며 트럭이 있는 곳을 찾을 때였다.
저 멀리 트럭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트럭 앞으로 뛰어내렸다.
“이게…….”
오라클 거병 전용 무기.
벨틴에 당한 흔적이었다. 전면부가 전부 녹아내린 상태였다. 안쪽을 살폈다.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운전석 밑에 닥의 발 모듈이 남아 있었다.
가하란이 닥의 죽음을 확인했다면?
불길함에 휩싸여 고개를 돌렸다. 옆 건물에 처박혀 있는 박스가 보였다.
뒤쪽으로 다가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 있어야 할 로트는 보이지 않았다.
쿵.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밀레나는 건물 위로 올라갔다.
도시 중심지를 향해 걸어가는 회색 거병, 로트가 보였다.
“안 돼.”
무어라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하란을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체술을 끌어올리며 뛰쳐나갈 준비를 마칠 때였다.
타닥타닥, 귀를 간질이는 소리에 밑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기계인형이 다리를 들어 올려 흔들고 있었다.
E30.
가하란이 공구 운반용으로 자주 쓰던 기계인형.
일반적인 모습이었다면 무시하고 로트를 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계인형 위에 부착된 코어가 눈길을 끌었다.
저건 초소형 거병에 사용되는 코어일 텐데?
밑으로 내려갔다.
-음성 장치 출력이 워낙 작아서 안 들릴 것 같더라고요.
“……닥이야?”
-네, 맞아요. 닥입니다. 외형은 바뀌었지만.
밀레나는 닥을 들어 올려 안았다.
“너 진짜!”
-아버지도 그렇고, 왜 안는 걸까요?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비앙크 기동 준비 끝내 놨어요. 아, 그리고 아버지한테서 전언도 있고요.
“뭔데?”
닥이 다리를 흔들며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닥 덕분에 정신 차렸어. 금방 정리할 테니까 뒷수습 부탁해. 이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하란은 괜찮아 보였어?”
-네. 조금 무서운 표정이었는데, 다시 괜찮아졌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는 단단한 분이니까.
“그렇게 단단한 애는 아니야.”
-그런가요?
밀레나는 닥을 데리고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벽면에 부착된 비앙크의 체임버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 로트 기능 제한돼 있는 건?”
-아버지가 만든 회로에 그런 잡스러운 건 끼어들 틈이 없어요.
“그렇긴 하겠네.”
-곧 로트가 깨어날 거예요. 난폭한 친구니 시끄러워지겠죠. 아니, 어쩌면 조용해질지도 모르겠네요.
밀레나는 체임버 덮개를 닫고 조종간을 잡았다. 의지에 반응한 비앙크가 깨어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거병 안에 거병. 색다른 체험이네요.
“좀 거칠게 움직일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괜찮아요. 지금은 감각 장치 대부분이 소실돼 제대로 느낄 수 없으니까요.
“……농담이었어.”
-저도 농담이었어요.
밀레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인지 통합을 시작했다.
* * *
“3E2 쪽도 정리했다고?”
“예.”
“……그 친구 죽었겠군.”
“어쩔 수 없죠.”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키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부센, 꽤 마음에 드는 친구였는데 아쉽게 됐다.
“확인 작업은?”
“남동부 몇몇 곳만 남겨둔 상태입니다.”
“사람들은 협조 잘하고 있고?”
“예. 본보기로 몇 명 처리했더니 군말 없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 서로 좋은 게 좋은 거지. 어차피 정리될 인생인데.”
기왕이면 편하게 살고 싶다.
다들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키엘은 생각을 실천했을 뿐이다. 중앙 통제가 맛이 가버린 이때, 새롭게 세력을 구축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남은 건 호롬의 시의회와 상의해 관리 감독 인원을…….
“2W7 거리에 미확인 거병 출현!”
연락병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키엘은 눈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2W7이면, 고개를 트는 순간 저 멀리서 접근 중인 거병이 보였다.
외장갑이 회색이었다.
보자마자 어디서 솟아난 거병인지 깨달았다.
“연합 도시 쪽 손님이군. 저 친구도 딱하게 됐어.”
뒷머리를 매만진 후 부대원을 불렀다.
“성능이 제한된 거병이다. 걷는 게 전부야. 제압해서 가져와.”
“탑승자는 제거할까요?”
“얌전하게 말 들으면 죽이진 마. 그쪽이랑 거래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용병들이 기웃거리는 게 보였다. 얼른 계산하라고 눈치 주는 것 같았다.
성질도 급하시지.
키엘은 담배를 물었다. 회색 거병을 향해 다가가는 아군 거병 둘이 보였다.
오라클에서 흘러들어온 벨틴의 성능은 정말 대단했다. 거병의 외장갑마저 단숨에 녹여버리는 파괴력.
저런 게 활보하고 다니면 인간은 고기 방패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의 전쟁은 원거리 마나 방출 무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 그것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다.
-신원 미상의 거병은 신속히 정지하고, 탑승자는 체임버 안에서 나오도록.
아군 거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성기 성능이 어찌나 좋은지 쩌렁쩌렁했다.
키엘은 담배를 깊게 빤 후 바닥에 버렸다. 얼른 치우고 뒷정리를 해야 했다.
“저것만 치우고 난 후에…….”
상황을 지켜보던 키엘은 눈을 찌푸렸다. 정지 명령을 내렸는데도 회색 거병이 멈추지 않았다.
살길을 열어줘도 거부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군 거병 두 기가 거대한 창을 앞세우며 전진했다.
운동 능력 대부분을 상실한 회색 거병은 이제 팔다리 모듈이 절단돼 바닥을 뒹굴 것이다.
저쪽 일은 알아서 마무리하도록 내버려 두고, 키엘은 포박한 군 관련자들을 향해 걸어갔다.
“간단하게 끝낼 겁니다. 저항하지 마시고 묻는 것에…….”
콰앙!
굉음이 들려왔다.
키엘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부러진 거병의 창날이 지면에 박혀 있었다.
날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병 쪽으로 옮겼다.
제압당했어야 할 회색 거병이 여전히 걸어오고 있었다.
회색 거병 뒤쪽으로 머리가 없어진 거병 두 기가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