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0화
“아니야, 아니야…….”
부센이 길목으로 뛰어가려는 걸 밀레나가 붙잡았다.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독한 연기도 피어오르는 상태였다.
맨몸으로 뛰어들면 금방 죽게 되리라.
“대위님, 대위님!”
“안 돼! 안 돼!”
비명을 지르며 부센이 주저앉았다. 가하란은 부센의 손을 바라봤다. 찢어진 옷가지가 들려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매캐한 탄내, 번쩍이는 빛.
가하란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온갖 정보를 일시에 차단했다.
벌어진 일을 제대로 봐야 한다.
착안을 열었다. 세상이 무수히 많은 점으로 변해갔다. 고정된 정보들 사이에 희미한 파장이 느껴졌다.
“가하란?”
“잠깐만.”
외력을 몸에 두르고 불길이 일렁이는 길목으로 진입했다. 착안을 닫고 주변을 살폈다.
입구가 반쯤 날아간 건물 안쪽, 그곳에 아이가 셋 있었다. 그중 하나는 부센의 아들이었다.
세 아이는 울지도 못한 채 겁에 질린 눈으로 길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하란은 서둘러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엄마가.”
“나 여기 있으라고 했어.”
“아, 아니, 아빠가…….”
아이들은 떠듬떠듬 말하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가하란은 세 아이를 품에 안고 외력을 둘렀다.
열기와 연기를 차단한 채 밀레나가 있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아.”
부센이 아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가슴에 품었다.
“누나. 얘들 좀 부탁할게.”
“알겠어.”
“난 닥한테 가봐야겠어.”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은 후에 나도 따라갈게. 비앙크 준비해 줘.”
밀레나의 몸으로 마나가 밀려드는 게 보였다. 신체술을 사용하는 누나라면 포격에 휩쓸릴 일은 없을 것이다.
가하란은 통신기를 들었다. 닥을 불러봤으나 침묵만 돌아왔다. 하늘석을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특수 대역을 사용하는 미니 비트는 주변 마나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 거병이 사용한 무기가 마나 간섭을 일으켰다면, 당분간 통신은 어려울 것이다.
가하란은 부센을 바라봤다.
한순간 찾아온 악몽.
적의 포격이 더 넓은 범위를 휩쓸었다면 밀레나 역시 휘말렸을 것이다.
분노가 머리를 찌를수록 정신은 맑아졌다.
“조심해.”
밀레나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후 거리로 나섰다. 의족에 넣어둔 배터리를 활성화했다. 언제든 도약할 수 있도록.
거리는 엉망이었다. 응축된 마나가 할퀴고 간 자리에 남은 거라고는 검은 재뿐이었다.
“얌전히 지시에 따르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무장한 시민과 군인들이 다른 시민들을 줄 세우고 있었다.
“나 아니에요! 아니라고!”
시민 중 하나가 발악하다가 칼에 찔렸다. 내분인가? 아니면 부센이 말한 다른 도시 쪽 인간?
골목으로 움직였다. 방책 근처에 세워둔 트럭으로 가야 했다.
“거기.”
반대편 길목으로 가려고 할 때였다. 군복 차림의 남자 둘과 마주쳤다.
“이쪽으로.”
검을 까닥거리며 말하는 군인이었다. 표정은 무감각했다. 단련된 자들이었다.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죠?”
가하란은 겁에 질린 척 말했다.
“두 번 말 안 해. 저쪽으로 가. 확인하고 일반 시민이면 잘 보살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정말인가요?”
“그래.”
양손을 들어 올린 채 군인에게 다가갔다. 한 명이 단창을 내밀어 경계했다.
외력이 닿는 거리.
가하란은 손을 움켜쥐었다.
외력이 단창을 쥔 남자의 입가를 짓눌렀다.
의족으로 땅을 찼다.
순식간에 5m 거리가 좁혀졌다.
입을 벌리려는 군인의 턱을 올려 친 후 발목을 후려 찼다.
검을 쥔 군인이 쿵 소리와 함께 옆으로 나자빠졌다. 미동조차 없는 걸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가하란은 단창을 쥔 군인에게 다가갔다.
“소리 지르지 마세요.”
“…….”
“어디 소속입니까?”
“여기!”
외력을 풀자마자 소리를 지르려 하는 남자였다. 왼손을 남자 입 안에 집어넣고 턱을 밑으로 당겼다.
어억, 남자가 고통에 찬 소리와 함께 몸을 비틀었다.
“다시 물을게요. 어디 소속입니까? 묻는 거 외에 다른 말을 한다면, 저 역시 다른 방법을 쓸 겁니다.”
눈동자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남자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왼손을 뺀 후 남자를 바라봤다.
“용병이다. 호룸에서 일을 받았고.”
부센이 말한 인근에 있는 도시였다.
“거기서 왜 여길 친 겁니까?”
“자세한 건 몰라. 제압 작전에 참가한 것뿐이니까.”
“동원된 거병 수는 몇입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어. 외부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현지에서 조달한 거니까.”
“현지에서? 내통한 사람이 있군요. 누구죠?”
“그것까지는…….”
용병의 눈동자가 왼쪽 위로 살짝 들리는 게 보였다. 가하란은 용병의 손을 낚아챘다. 손에 낀 반지에서 희미한 마나가 느껴졌다.
용병이 웃었다. 승리를 직감했다는 듯이.
가하란은 움켜쥔 손에 하얀 불길을 흘려보냈다. 무언가 일으킬 것 같았던 반지가 한순간 불길에 휩싸여 녹아내렸다.
용병의 눈이 부릅떠졌다. 손에 옮겨붙은 불이 서서히 팔 전체로 번져나갔다.
가하란은 외력으로 용병의 입을 틀어막았다. 3초 정도 파르르 떨던 용병이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가하란은 외력을 거두고 돌아섰다.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감정의 동요는 없었다. 10여 년간 계속해 온 사냥의 연장선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돌아서서 새카맣게 탄 시체를 바라봤다.
다른 위상에 있었을 때 갈등의 구조는 명확했다. 사냥하고자 하는 마수와 살아남고자 하는 나.
그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사람이 사는 곳.”
밀레나와 함께하며, 하늘석에서 원하는 공부에 몰두하며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은 흑과 백의 세상이 아닌 회색으로 물든 곳이라는 걸.
기펠에게 뜻을 밝히고, 석주라 불리고, 나아가 유단이 일으킨 문제에 개입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예견된 일이었다.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그랬듯 최악을 상정하고 움직였다.
하늘석에 설비를 갖춘 것도, 시간을 들여 육로로 진입한 것도 모두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준비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하늘석에서는 켈트가 말썽이었고, 이곳에서는 다른 도시와의 갈등이 발목을 잡았다.
신조차 모든 걸 예측하지 못했는데, 인간이 다 알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일.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병과 마주했을 때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아니, 주변 일대의 정보를 더 모은 다음 움직였더라면.
가하란은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 필요한 건 고민이 아니라 순발력이었다.
전지전능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고는 계속 터질 것이다. 최소한의 피해로 수습하고 나아가는 것. 그게 역량이자 노련함, 능력일 것이다.
도시 중심부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덕분에 외곽으로 돌아 방책까지 쉽게 갈 수 있었다.
가하란은 멀리 있는 창고를 바라봤다.
트럭이 안 보였다. 외부인이 시동을 걸 수 없을 테니, 닥이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다.
바닥을 살폈다. 일반 바큇자국과는 확연히 다른 자국이 보인다.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다, 건물에 처박혀 있는 트럭을 발견했다. 트레일러는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실린 박스는 떨어져 나가 옆 건물에 밀착돼 있었다.
“…….”
트럭 정면에 섰을 때 가하란은 쥐고 있던 통신기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운전석이 녹아내려 사라진 상태였다.
머리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의지와 상관없이 뇌가 일을 했다. 녹아내린 트럭의 형태를 기반으로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내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발사된 응축된 마나를 피하려고 핸들을 꺾었으나 폭이 좁은 길이라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하란은 손으로 자신의 뺨을 쳤다.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모습이 사라졌다.
“닥.”
차체에 올라갔다. 녹아내린 운전석 밑, 닥의 잔해가 보였다.
상체가 사라졌다. 하나뿐인 코어가 소실됐다. 죽음, 끝, 완전한 기능 정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이며 몸 안에서 날뛰려 했으나, 그 순간 착안이 반응하며 다시금 흥분이 가라앉았다.
불필요한 감정 반응은 제거하겠다는 듯이, 아니면 후회할 시간에 필요한 일을 하라는 듯이 몸은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가하란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동떨어진 세계에서 홀로 살아왔다.
그곳에서는 무뎌져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게 너무나도 익숙해진 걸까.
기쁨을 만끽할 때는 몸이 진솔하게 반응해 주나, 그 외 부정적인 감정은 지독할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사람이 맞는 건가.”
누나가 죽게 돼도 이런 식으로 감정이 끝나는 건가.
닥이 죽었다.
지식으로 낳은 자식이 티끌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눈앞에서 부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정신을 잃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본류에 있던 시절, 아직 어리던 시절, 나 역시 그러했다.
슬픔에 허덕이고 배신과 절망에 분노하며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런데 이게 뭐지?
착안이 불쑥 열렸다. 파괴된 트럭도, 엉망이 된 거리도 모두 점으로 변했다.
점으로 변한 세계에 슬픔 같은 건 없었다. 거기에 존재하는 건 ‘있음’과 ‘없음’, 그저 단순명료한 사실뿐이었다.
감정도 점멸하는 정보가 만들어낸 허상이야, 그러니 감정 같은 거에 휘둘려서 괴로워하지 마. 그저 즐거운 것만 취해. 행복만 가져.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니,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건 나였다. 착안에 익숙해진 나였다. 정보로만 세상을 보는 나였다.
머리가 멍해졌다.
무감각한 눈으로 운전석을 바라봤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런 위기의식조차 사라지겠지.
박스로 걸어갔다. 안에 든 거병을 꺼내야 했다.
‘로트’라면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고 나서, 무엇을 해야 할까.
닥을 쏜 인간을 찾아야 할까?
아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효율적이지 못하다. 마침 도시 중앙에 다 모여 있으니 모두 죽인다면 간편할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한 후 분배소에서 레테를 확인할 것이다. 유단이 무슨 장치를 해놨는지 알아본 다음에, 그다음에…….
하얀 불꽃, 백염(白炎)으로 벼려낸 배합철을 사용했기에 박스는 그을리고 살짝 우그러졌을 뿐 부서지지는 않았다.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일단 전부 정리하자.
간편하게.
그렇게 생각하며 로트의 체임버 덮개를 열 때였다.
-아버지, 표정이 왜 그래요?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구석에서 E30이 여섯 개의 다리로 바닥을 찧으며 나왔다. E30 위쪽을 바라봤다. 자그마한 코어가 그곳에 부착돼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보려 했는데 통신도 안 되고, 길도 모르겠고. 그러다가 거병과 마주쳤어요. 다행히 슬리피가 설계한 탈출 장치 덕분에 코어를 박스 쪽으로…….
가하란은 비틀거리며 닥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몸체를 들어 올렸다.
“너…….”
-멀쩡해요. 몸을 잃은 건 아쉽지만. 근데 아버지, 얼굴이 왜 그래요?
“얼굴?”
-아버지가 우리한테 그랬죠. 때론 감정을 마음껏 발산해야 한다고. 지금 아버지는 그 감정이란 걸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여요. 시각 장치의 오류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
-아버지. 힘든 일 있으면 말해요. 우리가 들어줄게요. 유토니아에게 말했듯이, 외롭게 있지 마세요.
타이르듯 말하는 목소리가 다정하게 귀를 감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