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9화 (519/558)

제519화

수신호에 따라 방책 안쪽으로 트럭을 몰았다.

오후 10시. 불빛이 꺼지고 잠들었어야 할 도시가 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안쪽으로 좀 더.”

창고로 보이는 건물 앞에 트럭을 세웠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트럭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차에서 내리자 부센이 다가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안쪽을 살펴봐야 해요.”

“물론 그러셔야죠.”

가하란은 트레일러에 실린 박스를 열었다. 누워 있는 로트와 벽면에 고정돼 있는 비앙크.

“이쪽은 완제품이군요.”

자신을 검사관 키엘이라 소개한 남자가 박스로 올라섰다. 부센이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적당히 해, 라고 말했다.

“그걸 결정하는 건 내 일이니까 자넨 신경 꺼. 이 시간에 검수하는 것만으로도 편의를 꽤 봐준 거니까.”

키엘이 말했다.

“하하, 평소에는 잘 웃고 넘기는 친구인데.”

부센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확인할 건 확인해야죠. 그런데 도시에 무슨 일이 있나요? 말씀하신 바로는 꽤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검수가 끝나면 설명해 드리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박스 안에 있는 키엘을 바라봤다.

“이거, 기준 출력이 어떻게 됩니까?”

“130 엘론입니다.”

“높네요. 용도는요?”

“마수 사냥용으로 개발됐습니다. 건축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긴 하지만…….”

“수지 타산이 안 맞겠죠. 이쪽 벽에 있는 건 몸통만 있네요? 다른 모듈은요?”

“조금 특수한 거병이라서요.”

“뭐, 허가증은 확인했으니까 넘어가죠. 시동키를 볼 수 있을까요?”

가하란은 박스로 올라가 시동키를 건네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게 연합 도시의 물건이니, 도심에 반입하려면 제한 조치를 거쳐야 합니다. 시연 목적도 있을 테니, 기능 제한만 걸어두죠.”

“상관없습니다. 외장갑만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되니까요.”

“그렇겠죠. 외장갑 전문 클랜이라고 되어 있었으니. 권한 설정 좀 풀어 주시겠어요?”

가하란은 감각기를 낀 후 시동키를 만졌다.

“풀어놨습니다. 설정을 변경하기 쉽도록 조치해 놨고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까다롭지 않은 분이라 좋네요.”

검사관이 시동키를 박스 밖 사람들에게 넘겼다.

“얼마간 체류하실 생각입니까?”

“정비를 끝내면 바로 떠날 생각입니다. 길어야 사흘이겠죠.”

“떠나다니, 어디로요?”

“둔으로 가볼 생각입니다. 거래처를 뚫으려면 역시 둔이 제격이죠.”

“그건 안 될 텐데요.”

키엘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라도…….”

“뭐, 이따가 알게 될 겁니다.”

밖에 대기하던 사람이 파일 하나를 키엘에게 넘겼다. 키엘이 쥔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체류 허가서입니다. 보증인에 부센이라 적힌 거 보이시죠? 문제가 생기면 저 친구가 책임지게 될 테니, 제발 문제 일으키지 말아주세요.”

검사관이 피곤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설정 끝냈습니다.”

시동키가 돌아왔다.

짧게 악수를 한 키엘이 박스에서 내려갔다. 부센과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다그치듯이 노려보다가 이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일이 많으신가 보네요.”

가하란은 멀어져 가는 검사관을 보며 말했다.

“책임이 막중한 자리니까요.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

부센이 집으로 초대하겠다며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다. 가하란은 트럭 바퀴 옆에 있는 밀레나에게 다가갔다.

“볼로스는 원래 폐쇄적인 느낌인가?”

방책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눈빛이 따가웠다. 특히 군복을 입은 자들은 적개심 어린 눈으로 트럭을 살피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아니, 이런 느낌은 아니었어. 전쟁 직후 모든 외교가 끊겼을 때도 볼로스만큼은 연합 도시와 교류할 정도였으니까. 정착민보다는 오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라 타지인을 배척하는 경우도 거의 없고.”

“따로 이유가 있다는 거네.”

“그러게.”

얼마간 기다리자 부센이 돌아왔다.

“근무 중이신 거 아니었어요?”

밀레나가 물었다.

“책임자가 필요해서 나와 있긴 하지만 실무에서는 손을 뗐으니까요.”

“이거, 높으신 분을 제가 너무 편하게 대한 건가요?”

밀레나의 농담에 부센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자. 일단 가시죠.”

“늦은 시간인데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부센과 보폭을 맞추며 가하란이 말했다.

“제가 말씀드렸죠? 상사님께 빚이 있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마음 편하게 오세요. 그리고 아내도 손님맞이 하는 거 좋아합니다. 워낙 외향적인 사람이라.”

부센의 말이 겉치레가 아니었다는 건 집에 도착하자마자 알게 됐다.

부센의 아내는 간만에 손님이 와서 너무 즐겁다며 싱글벙글 맞아주었다. 2층에서 자고 있던 아이까지 깨워 인사를 시킬 정도였다.

아이도 구김살 없이 컸는지 인사 직후부터 온갖 질문을 던져왔다.

음식을 먹는 내내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자자, 너희는 이제 올라가서 자.”

“좀 더 놀면 안 돼요?”

“엄마한테 혼나고 올라갈래? 아니면 그냥 올라갈래?”

부센의 아내가 아이를 옆구리에 끼고 2층으로 올라갔다.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네요.”

가하란이 얼얼한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 하도 웃었더니 입술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점에 반해서 결혼했죠. 가끔은 좀 과한 거 같아서 힘들 때도 있지만.”

부센이 술을 내왔다. 애가 자러 갔으니 이제 어른의 시간이었다.

부센의 아내는 대화를 나누라면서 인사 후 거실을 비워줬다.

“평소라면 같이 마시면서 즐겼겠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웃을 만한 게 아니니…….”

부센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도시의 문제인가요? 아니면 동부 전체의 문제인가요?”

밀레나가 운을 뗐다.

“동부 전체가 난리입니다. 상사님, 제국이 멸망하던 그 당시를 기억하시겠죠?”

“네, 기억하죠. 어떻게 잊겠어요.”

“전 대륙에서 시민들이 일어났죠. 기존 토호와 귀족으로 이뤄진 의회를 철폐하고, 시민들이 주축이 된 시의회가 생겨난 것도 그때였고. 하지만 아시다시피 귀족은 명목상으로만 사라졌지 여전히 실권을 잡고 있었죠.”

가하란은 술잔 끝에 손을 대고 부센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많은 게 바뀐 것처럼 보였으나 그다지 바뀌지 않았죠. 하지만 괜찮았어요. 바뀐 것처럼 보였으니까.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이렇게 하나씩 차근차근 바꿔나가면 된다고 다들 생각했겠죠. 그런데…… 일이 갑자기 터져 버렸어요.”

부센이 목을 꺾어 술을 들이켰다.

“둔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정확히는 유단 학회장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봉기가 시작됐죠.”

유단이란 이름에 가하란과 밀레나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무슨 일이 있었죠?”

“두 달 전. 분배소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어요. 그게 유단 학회장임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학회장의 말은 단순했어요. 옛 귀족들이 우리가 일궈낸 분배소를 독점하려고 한다, 예전처럼 권력 중추로 힘을 모아 우리를 통제하려 한다.”

아니길 바랐지만, 아리엘의 실패는 기정사실이 됐다.

가하란은 생각을 정리하며 부센의 말을 들었다.

“대규모 음성 마법, 혹은 장거리 음성 전송 장치.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도 알게 됐죠. 아니, 볼로스뿐만이 아니라 동대륙에 사는 모두가 알게 된 겁니다.”

“얌전히 있을 수 없는 환경이 됐네요.”

밀레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죠. 그 음성이 들린 직후, 여기서도 한차례 난리가 났습니다. 시장을 죽여야 한다, 시의회를 해산시키고 진짜 시민들로 재구성해야 한다. 시의회의 결정이 조금만 늦었다면, 여기도 불바다가 됐을 겁니다.”

“시의회는 어떤 결정을 내렸죠?”

“항복. 전 시장도 귀족의 핏줄이었거든요. 아…… 상사님에게 불편한 얘기일 수도 있겠군요.”

“아니에요. 전 괜찮으니 말씀해 주세요.”

부센이 코끝을 매만진 후 말했다.

“아무튼 전 시장은 가족과 의회 구성원의 목숨을 보장받는 대신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시장을 따르던 사람들은 며칠 후에 볼로스를 떠났고요.”

“잘 마무리됐네요.”

“네. 그렇게 보였죠. 하지만 곧이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무진들이 부족해졌거든요. 기간 시설을 담당하던 자들 중 태반이 시의회와 관련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나자 도시 상태가 엉망이 됐습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는 듯 부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랴부랴 인선을 새로이 하고 현장 담당자들의 조언으로 어찌어찌 구색을 갖췄지만, 이곳저곳에서 여전히 문제가 터져 나왔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가하란은 피곤해 보이던 검사관을 떠올렸다.

“그러던 와중에 외부 문제도 터졌어요.”

“외부요?”

“호룸,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죠. 그쪽은 여기와 상황이 달랐어요. 시의회가 도시를 점령했죠. 그쪽 시민들은 체제를 뒤엎기보다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래서…….”

이야기 도중이었다.

허리 뒤쪽에 매달아 둔 통신기에서 신호가 왔다. 통신기를 들고 귀에 가져다 대는 순간.

-아버지!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콰아아앙!

날카로운 폭음이 집을 덮쳤다.

식기가 떨어지며 깨져나갔고, 천장에 박아놓은 장식등이 떨어졌다.

부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2층으로 향했다.

가하란은 집 밖으로 나왔다.

폭발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릴 때였다.

밤하늘을 가르며 섬광이 그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챘을 때, 두 번째 폭발음이 거리를 뒤흔들었다.

“아아악!”

“도망쳐!”

붉은빛이 거리를 휘감았다. 폭발과 함께 치솟은 불꽃이 어둠을 밀어냈다.

살랑거리는 주홍빛이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비명에 비명이 겹치며 침묵에 잠겨 있던 거리가 불안하게 깨어났다.

“가하란!”

밀레나가 나왔다. 부센과 부센의 아내 역시 아이를 안은 채 따라 나왔다.

“이쪽으로!”

폭발이 일어난 곳과 반대쪽으로 달려 나갔다. 거리로 뛰쳐나온 수백의 사람들이 좁은 길목에 들어섰다.

“비, 비켜!”

“이쪽에 아이가 있어요.”

“밟지마, 시발!”

대로로 나아가는 길목이 저 멀리 보였다. 사람들이 허겁지겁 발을 움직이던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길목을 막아섰다.

길쭉한 검은색 봉.

그리고 거병.

순간 주변이 느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거병이 검은 봉을 들어 올려 어깨에 이었고, 봉에 연결된 커넥터를 따라 마나가 옮겨지는 게 보였다.

“오라클…….”

누나의 경직된 목소리가 들린 순간.

“피해!”

섬광이 그어지기 직전, 가하란은 밀레나를 잡아당겼다. 밀레나 역시 손을 뻗어 부센을 잡아챘다.

세 사람이 엉켜 샛길로 엎어지듯이 빠진 순간, 아무런 소리도 없이 보랏빛 줄이 그어졌다.

강렬한 열기와 함께 시력을 앗아갈 듯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 직후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가, 뜨거운 공기가 온몸에 내려앉았다.

파아앙!

뒤늦게 소리가 덮쳤다.

온갖 잔해들이 골목 사이를 휘저은 후 잠잠해졌다.

눈을 살며시 뜨며 조용해진 골목을 바라봤다. 붉게 달아오르다 못해 녹아서 쇳물이 된 잔해들이 보였다.

길목은 노랗게 빛나다가 금세 식어 새카맣게 변했다.

“……아, 아…….”

가하란은 고개를 돌렸다. 부센이 멍한 눈으로 골목을 보고 있었다.

백여 명의 사람이 밀집돼 있던 길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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