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8화
-더 접근하는 건 위험해 보여요.
“그런 거 같네.”
가하란은 기다리라고 말한 후 트럭에서 내렸다. 트레일러에 실린 박스로 가 잠금장치를 열었다.
반듯하게 누워 있는 거병이 보인다. 체임버 덮개 위로 올라가 목소리를 냈다.
“누나.”
잠깐 기다리자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쪽을 채웠던 웨이브 겔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밀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도착했어.”
“벌써?”
손을 내밀어 누워 있는 밀레나를 밖으로 끌어냈다. 체임버 밖으로 몸을 뺀 밀레나가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인지 통합이 이렇게 버거운 건 오랜만이야.”
가하란은 밀레나의 등을 받쳐주며 물었다.
“어때? 좀 친해진 거 같아?”
“아니. 난 이 시스템에 적응 못 할 거 같아. 블루아이에 적용하는 건 고민해 봐야겠어.”
“포기하는 거야?”
밀레나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기가 생기긴 하는데, 이건 안 될 거 같네.”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조금 더 생각해 봐.”
밀레나는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안쪽에서 모포를 꺼내 몸에 둘러준 후 조수석에 태웠다.
“정리하고 올게.”
박스로 돌아가 덮개가 활짝 열린 거병에 올라섰다. 짙은 회색이 감도는 외장갑을 바라보다가 체임버 안으로 들어갔다.
“유토니아.”
확장 코어가 가동하며 미니 비트와 연결됐다. 박스 안쪽으로 마나가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
-네.
“어땠어?”
-밀레나는 노력했어요. 감각 확장 5단계에서 최대한 버텼고요. 하지만 실사용은 불가능해요.
“학습 모델을 바꾸면 어떨까?”
-한계치를 낮출 거면 확장 코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죠.
“어렵네.”
발을 쭉 뻗으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박스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할 때였다.
-확장 코어는 가하란만 사용해야 해요. 다른 사람은 인지 통합 시에 뇌에 걸리는 부하를 버틸 수 없어요.
“블루아이의 사고 회로를 서포트 개념으로 사용하면?”
-블루아이는 유능한 친구예요. 우리보다는 조금 모자라지만, 그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죠. 제약을 걸면 장점을 뭉개고 단점만 살리는 꼴이에요. 가하란은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고요.
“방법이 없을까?”
밀레나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협응성을 확인해 봤는데, 수치가 예상보다 낮았다.
-가하란의 인지력은 특별해요. 그걸 자각하고 다른 사람을 대해야 해요. 자신을 기준으로 삼아버리면 사고가 날 수 있어요.
“충고 고마워.”
-뭘요.
“아, 저번에 읽었다는 동화는 어때? 마음에 들어?”
곧잘 대답하던 유토니아가 오랜만에 대답을 미뤘다.
“마음에 안 들었나 보네.”
-아니요. 좋았어요. 특히 왕자와 공주가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는 대목이 좋았어요.
“어쩔 땐 뻔한 게 가장 좋지.”
-네, 뻔해서 좋았어요. 그래서 고민이에요. 왜 다른 애들은 그 뻔한 걸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왜 기능적인 한계를 설정하고 그걸 만끽할까요?
“글쎄. 나는 유한하기에 무한한 너희들의 선택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건 무슨 선택을 하든 네 자유라는 거야.”
-영구히 지속하고 싶은 건 제 사고 능력이 그 애들보다 낮기 때문일까요? 모자라기에 유한함의 매력을 모르는 걸까요?
“의외네. 난 네가 그런 걸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닥이 너한테 물어봤을 때, 넌 영원한 게 좋다고 단호하게 말했으니까.”
-네. 그랬죠.
“그 결정이 후회돼?”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 단지 그 애들이 이해되지 않아서 살짝 불안해요.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연산의 문제니까요.
가하란은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대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아. 알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많아.”
-아는데 이해가 안 된다? 복잡하네요.
“복잡한 만큼 들여다볼 가치가 있지.”
몸을 일으킨 다음 체임버 밖으로 나왔다.
“깊이 생각하고 마음껏 고민해. 답답할 땐 날 찾아도 좋고, 애들을 찾아가도 좋아.”
-혼자 생각해 볼게요.
“그것도 좋아. 단, 외롭게 있지는 마. 주변에 네 얘기를 들어줄 애들은 정말 많으니까.”
-알겠어요, 가하란.
유토니아는 아빠, 혹은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구별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취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측할 수 없는 성장.
그리고 발전.
가하란은 잠금장치를 걸며 작게 말했다. 너희들 덕분에 공부를 멈출 수가 없다고.
-전 뒤에 있을게요.
닥이 운전석 뒤에 있는 공간에 몸을 숨겼다. 가하란은 운전대를 넘겨받았다.
“유토니아가 뭐래?”
밀레나가 말했다.
“누나한테 적용하는 건 어려울 것 같대.”
“아깝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주무르며 목을 천천히 돌리는 밀레나였다.
“몸은 괜찮아?”
“어. 괴리감도 사라졌고 감각도 돌아왔어. 근데 직접 해보니까 알겠더라, 저걸 조종하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지.”
밀레나가 빤히 쳐다봤다.
“그 말이 안 되는 걸 해내는 그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걸까?”
“뇌랑 뇌수가 들어 있지.”
“으, 표현을 해도 꼭.”
어깨를 으쓱이며 트럭을 몰았다.
반대쪽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경계 신호였다. 꽤 느긋하게 접근했으니 공격해 오진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났을 때와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밀레나가 모포를 접으며 말했다.
“대마수가 사라지고 접경 지역 간 왕래는 꽤 활발했으니 크게 문제 되진 않겠지.”
1분 정도 기다렸다. 반대편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장한 사람이 셋.
“다녀올게.”
가하란은 기펠이 만들어준 허가증을 든 채 트럭에서 내렸다.
“이 시간에 뭡니까?”
맞은편에 있는 사람이 외쳤다.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밤늦게 이렇게 오게 됐네요. 경우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길바닥에 세워둘 수는 없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연합 도시 사람입니까?”
“예, 여기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허가증이 있습니다.”
양손을 들어 올린 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앞에 선 남자가 허가증을 받아 마법등으로 비췄다.
“헤토라 클랜.”
“아는 곳이야. 거병 하부 모듈이랑 경량갑 다루는 곳.”
오가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현지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번에 새로이 사업을 확장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 아는 얼굴은 없습니다.”
가하란은 옅은 웃음을 지은 채 말했다.
“거병 관련 물자는 연합 도시 내 길드가 관리할 텐데, 이런 식으로 호송 병력도 없이 오는 건 좀 의외군요.”
“길드와 클랜 사이에 여러 문제가 생겼거든요. 새로운 루트를 뚫어야 하는데 저희 쪽은 꽉 막힌 상황이라. 여하튼 문제가 있는 물건은 아닙니다. 보여드린 허가증에도 제대로 표시돼 있을 거고요.”
사내들이 다시금 허가증을 살폈다.
“맞긴 하는데, 아시다시피 그쪽과 우리 간에 제대로 된 조약이 없잖아요? 대마수가 사라지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끼리는 주먹구구식으로 무역 중이라지만, 그래도 거병 관련 물자는…….”
꺼림칙하다는 듯이 트럭을 바라보는 사내들이었다.
“근데 트럭이 엄청 크네요? 이런 사이즈는 본 적이 없는데.”
“저희 공장에서 이번에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물건입니다. 기존 해더 트럭보다 적재량이 네 배 정도 되죠.”
“좋네요. 이것도 들여올 수 있나요?”
“당장은 어렵지만, 물량이 확보되면 이쪽에도 얼마든지 팔 수 있죠.”
허가증을 든 사내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허가증을 돌려줬다.
“우리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들여보내 주고 싶은데, 요즘 마을 분위기가 좀 안 좋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외지인한테 길게 설명할 건 아니라, 아무튼! 날 밝으면 그때 다시 와요. 차량 검사도 제대로 해야 하니까.”
부탁한다고 해서 들어줄 상황은 아닌 듯싶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로트’를 가져온 게 잘못이었나?
가하란은 박스 안에 누워 있는 거병을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여기서 기다려도 될까요?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
“그것까지 우리가 뭐라 할 수는 없겠죠. 날 밝으면 검사반이 올 겁니다. 그때 제대로 확인 절차 받고 들어와요.”
“예, 그렇게 하죠.”
몸을 돌려 트럭을 바라볼 때였다. 조수석이 열리며 밀레나가 내려왔다.
“부센 대위님 아닌가요?”
밀레나가 다가오며 말했다. 부센이란 이름에 반응한 건 오른쪽에 서 있는 남자였다.
“누구시죠?”
남자가 마법등을 들어 올렸다. 밀레나의 얼굴이 빛에 감싸이는 순간 아, 하는 탄성이 남자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
“밀레나 상사님!”
“오랜만이에요. 한 3년 됐죠?”
“데버라에서 본 게 마지막이니까 3년 정도 됐네요. 이런 곳에서 상사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대도시 방위군에 계실 줄 알았는데.”
부센이 낮게 웃었다.
“사람 일이란 게 쉽게만 풀리나요. 옛 중앙 군부의 연줄이 없으니 자리보전하는 것도 힘들더군요. 그래서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왔습니다. 그보다 상사님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1년 전쯤에 실종됐다는 소식을 접하긴 했는데.”
“연합 도시에 넘어가 있었어요.”
부센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쯤이면 대마수가 있던 시절인데, 그걸 피해서 연합 도시로 갔어요?”
“예. 만나야 할 사람이 거기 틀어박혀 있어서요. 어쩔 수 없이 갔죠, 정말 어쩔 수 없이.”
밀레나가 힐긋 바라봤다. 가하란은 모른 척 눈을 피했다.
“어찌 됐든 반갑습니다. 독립 3부대한테는 신세를 많이 졌죠.”
“오라클 때문에 저희 사이가 꽤 끈끈하긴 했었죠?”
“하하, 그놈들 놀리는 맛에 군 생활 했을 정도니까요.”
즐겁게 얘기하던 부센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복잡한 시기에 돌아오셨네요.”
“안에서 대충은 들었어요. 마을 분위기가 안 좋다고.”
“볼로스라 그나마 안 좋은 정도에서 그친 겁니다. 여긴 중앙 정치의 힘이 닿지 않는 곳이니까요. 아니지, 이제는 분배소 때문에 자유롭지도 못하네요.”
부센이 다른 두 남자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먼저 자리를 뜨는 두 남자였다. 방책 쪽으로 걸어가며 머리 위로 치켜든 마법등을 좌우로 연신 흔들었다.
“가시죠.”
“아침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밀레나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상사님을 기다리게 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요. 제가 책임진다고 했으니 곧 열릴 겁니다.”
부센의 말대로 길목을 가로막고 있던 방책이 좌우로 벌어졌다.
“근데 이분은…….”
“남편이에요.”
“결혼하셨어요? 이거 축하드립니다. 소식을 들었다면 제가 선물이라도 보내드렸을 텐데.”
“연합 도시로요?”
“축하의 마음도 선물의 일종이니까요. 마음은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죠.”
부센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부센입니다. 밀레나 상사님한테는 빚이 좀 있습니다.”
“가하란입니다.”
“그나저나 가하란 씨는 조심해야겠어요.”
“조심이요?”
“예. 옛 부대 사람들이 보면 아마 검증하려고 난리가 날 겁니다. 독립부대 쪽 남자들은 죄다 밀레나 상사님을 마음에 품었거든요.”
“아, 그러면 이참에 확실하게 말씀을 드려야겠네요. 결혼했으니 마음에서 놓아달라고.”
부센이 하하하 웃으며 악수한 손을 크게 흔들었다.
“거침없는 게 상사님과 잘 어울립니다. 들어가시죠, 가는 길에 사정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부센이 몸을 돌려 방책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인기가 정말 많았거든.”
밀레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가하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인기 많았어.”
“그래?”
“마수들이 어찌나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오던지. 근 10년간 구애를 받아내느라 힘들었어.”
“그것참 고생 많았네.”
밀레나와 눈웃음을 주고받은 후 트럭에 올라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