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7화 (517/558)

제517화

-6번, 7번 정상 복구됐어요.

“애먹이던 게 드디어 끝났네요.”

가하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통신기 너머에 있는 엔엔도 맥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고 가동해 볼게요.

“저도 올라갈까요?”

쿵, 소리와 함께 트럭이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균열을 밟고 지나간 듯했다. 운전 중인 닥이 별일 아니에요, 라고 말했다.

-여긴 괜찮아요. 문제 생기면 그때 올라오면 되겠고, 밑에는 어때요?

“트럭은 문제없어요. 출력도 괜찮고.”

키가 작은 초목을 밀어내며 전진하던 트럭이 방향을 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을 빽빽하게 채우던 녹음이 사라지고, 평야가 반겨주었다.

-미개척지를 벗어났네요.

“하늘석 출력은 어때요?”

-괜찮아요. 2분 후에 고도 올릴게요.

“올하고 상의해서 정해주세요. 저도 밑에서 상황 봐볼게요.”

가하란은 달리는 트럭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거병이 실려 있는 트레일러에 올라 고개를 들었다.

땅에 닿을 듯이 저공비행하던 하늘석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통신기를 들어 올렸다.

“하단부 전송탑 수치 어때요?”

-평균 1.53이고 여섯 개 모두 안정화됐어요.

가하란은 착안을 열어 하늘석 하단부를 바라봤다. 뿌옇게 변하며 변형을 거부하던 하늘석이 점차 수많은 점으로 바뀌었다.

전송탑 주변을 살폈다. 휘몰아치는 마나가 커넥터를 통해 내부로 전해지고 있었다.

착안을 닫으며 말했다.

“일단 문제는 없어 보여요. 역류도 없고, 번짐도 없어요. 혹시 모르니까 차단 커널 확인해 주시겠어요?”

-안 그래도 보고 있어요. 이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마나는 없네요. 안정적이에요.

하늘석의 고도가 점점 높아졌다.

“300m 정도 올라간 거 같은데, 온도는요?”

-허용 범위 안에 있어요. 생산 시설에 공급되는 에너지도 문제없고요.

하늘석이 점점 멀어진다. 거대했던 동체가 이제는 손가락 하나에 가려질 정도가 됐다.

“공조 시설은 정상 작동 중이죠?”

-2층 식당 쪽이 살짝 문제인 거 같지만, 이건 나중에 손보면 돼요.

“된 거 같네요.”

휴, 하고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설비를 다 버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래도 잘 수습했네요.

“죄송해요. 제가 욕심을 부려서.”

-가하란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죠. 저도 신나서 내부 시설을 변경했으니까요.

“신이 만든 완벽한 작품. 그거에 손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생각해 봤어야 했는데.”

-알았더라도 결국에는 열어 봤을걸요? 가하란은 호기심을 못 참으니까.

“그건 엔엔 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작게 웃던 엔엔이 부유 장치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부탁드릴게요.”

통신기를 내려놓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아버지. 거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요.

닥이 말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들어갈 참이었다. 창문으로 몸을 집어넣고 조수석에 앉았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이제 막 시작된 봄.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산오투에게 건네받은 불꽃을 손안에서 피워냈다.

-아버지, 화재가 왜 일어나는지 아시나요?

닥이 한마디 했다. 눈을 슬쩍 돌리며 손안에 띄워놓았던 불꽃을 체내로 거둬들였다.

-해피가 43번 라인 배전함에 문제가 있다고 해요.

“그거라면 손 봐뒀어. 해피한테는 안쪽 퓨즈만 확인해 달라고 해.”

-네, 그렇게 전할게요.

팔짱을 끼고 정면을 바라봤다. 앞 유리 너머로 자잘한 균열들이 보였다.

“국경까지 얼마나 걸릴까?”

-하늘석에서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4시간 정도면 도착할 거예요. 거기서 볼로스까지 2시간 정도고요. 피곤하시면 주무세요. 도착 전에 깨워 드릴게요.

“아니, 봐야 할 게 몇 개 있어.”

가하란은 작업 노트를 꺼냈다.

안에는 하늘석 단면도와 함께 각 층을 잇는 커넥터가 그려져 있었다.

“켈트한테 흘러 들어가는 마나를 조금 건드린 대가가 너무 커. 하늘석 전체 시스템이 셧다운됐었으니까.”

-큰누나도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니까요.

큰누나, 올을 뜻하는 거였다.

아이들을 제작할 때 성별 같은 건 확정한 적이 없는데, 어느 순간 자기들끼리 정해버렸다.

기분이 내키는 대로 바뀌는 터라 큰 의미는 없지만.

“유토니아한테 생산 라인 상태 좀 물어봐 줘. 유기성은 회복됐는지, 시설 간 전력 분배는 괜찮은지.”

닥이 조용해졌다. 미니 비트 안에서 유토니아와 대화 중이리라.

가하란은 노트로 시선을 옮겼다.

만전을 기하고 준비했으나 가소롭다는 듯이 문제가 찾아왔다.

예정대로라면 두 달 전에 움직였어야 했다. 카트시한테서 연락이 오든 안 오든, 하늘석을 둔 근처에 대기해 놓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내부 시설 변경이 발목을 잡았다.

부유 장치가 한순간 정지해 버린 것이다.

내부 공장을 정비하며 동력 흐름을 살짝 바꿨는데, 그 살짝이 하늘석의 핵심인 켈트에게 영향을 끼쳤다.

올의 감수를 받으며 진행한 일이었지만, 올 또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추락은 면했으나 출력에 이상이 생겼다.

문제의 원인을 알고 있는 상태. 수습은 손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라는 게 으레 그렇듯, 들춰보고 나니 심각한 상황이 반겨주었다.

정교하게 설계된 에너지 전송 시스템이 반파된 것이었다.

-설비에 이상은 없대요. 3번, 4번 라인 점검할 때 켈트 반응을 살폈는데 문제없다고 해요.

“얌전히 자고 있나 보네.”

-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죠?

가하란은 펜 끝으로 ‘켈트’란 단어를 콕콕 찍었다.

“에너지 보급만 잘 제어하면 돼. 올은 오차 범위 내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켈트가 깨어났으니까.”

-잠깐 깨서 칭얼댄 게 그 정도라니. 전 켈트가 눈을 뜨지 않는 게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해요. 카트시 이모가 기능을 잠가둔 것도 깨우면 위험하기 때문이겠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단 3초였어. 3초 정도 에너지 보급에 지연이 생겼더니, 전송탑 통제권을 강제로 빼앗아서 마나를 끌어당겼지. 올의 명령으로도 멈출 수 없었고.”

-저를 비롯해 다른 애들의 탐지 회로가 그때 다 망가졌어요. 허용치를 초과한 마나가 흘러 들어왔으니까요.

“너희들 코어가 무사한 게 다행이었지.”

-안 그래도 저희끼리 보강하고 있어요. 이제는 죽음을 얻었으니까요. 한 번뿐인 인생, 조심해서 살아야죠.

유한함을 택한 기계들.

혹여나 끝을 체험하겠다고 죽음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속으로 앓으며 아이들을 지켜봤지만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안정적인 유한함을 위해 노력했다. 기체 기능을 보강하고, 내부 회로를 보완하고.

때때로 미니 비트가 아닌 음성을 통해 정보를 공유했는데, 내용이 궁금해 다가가면 놀란 참새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귀여운 반항기라 생각하며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상담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다가와 물어봐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이모는 괜찮을까요? 연락이 닿지 않아요. 고유 파장을 통한 미니 비트 연결도 안 되고요. 완벽하게 차단당한 상황인데…….

“예상했던 일이야. 로키라면 연결망을 대비해 놨을 테니까. 그래서 최대한 둔 가까이에 하늘석을 붙여 놓으려고 한 건데.”

하늘석은 퀸이었다.

세상이란 체스판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완벽한 기물. 공격과 방어를 한 몸에 갖춘 이상적인 건축물.

함락될 일 없는 요새에 필수 설비를 갖춰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퀸의 어깨에 폰, 룩, 나이트…… 모든 기물이 올라탄 상태가 됐다.

퀸의 기동성이 망가지는 순간 모든 게 정지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을 진행해야 했다.

“킹인 켈트가 말썽이라서 문제지만.”

-네?

“아니야, 아무것도. 그리고 카트시는 걱정할 거 없어. 파괴하는 것도, 분해하거나 회로에 간섭하는 것도 불가능하니까. 오히려 문제는 둔의 상황이겠지.”

카트시가 고립된 순간 아리엘이 움직였을 것이다. 아리엘을 돕기 위해 타챠와 기펠에게도 따로 말해둔 상태였다.

정치적으로 로키를 압박해 백기를 얻어내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였다.

가능성도 충분했다.

로키는, 아니, 유단은 인간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할 뿐만 아니라 직접 참여해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신변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 이상 일단은 순응할 것이었다.

그간 수없이 겪어온 정치적 압박이라 느끼게 해놓고, 재빠르게 유단의 기반을 제압하는 게 첫 번째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틀어졌을 가능성이 커졌다.

성공했다면 카트시가 연락해 왔을 테니까. 아리엘 또한 소식이 없었다.

만약 아리엘이 죽었다면, 기펠은 복귀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펠 역시 소식이 끊겼다.

기펠이 지닌 무력을 생각해 봤을 때 그가 제압당할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타챠도 곁에 있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하나.

아리엘은 실패했고 기펠, 그리고 타챠와 함께 둔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타챠는 둔에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리엘이 상황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을 테니까.

가하란은 노트에 둔이라 쓰고 동그라미를 쳤다.

“타리움 분열, 혹은 일원화일 텐데.”

-유단의 목적에 따라 방향성이 갈리겠네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분열을 일으켜 시간을 벌 테고, 마무리 단계라면 통일해서 계획에 박차를 가하겠죠.

“그 반대일 수도 있고.”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가하란은 창밖을 가리켰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국경을 넘으면 윤곽이 보이겠지. 그전까지는 모두 영양가 없는 추론일 뿐이고.”

펜으로 분배소라고 적었다.

“유단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분배소야. 정치적인 목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고, 실질적인 위협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아버지 말대로 볼로스에 도착하면 어떤 상황인지 보이겠네요.

아리엘이 말하길, 유단은 ‘레테’라는 새로운 분배소 설치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유단의 목적과 레테는 맞닿아 있을 것이다.

생각을 이어가던 중 통신기 수신부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들어서 귀에 가져다 댔다.

“말씀하세요.”

-가하란, 상시 출력도 확보했고 시스템도 안정권에 진입했어요. 정상 고도 유지한 채 먼저 진입할게요.

“둔 상황이 어떤지 확인해 주세요. 저흰 예정대로 육로로 들어가 볼 테니.”

-알겠어요.

상황 파악이 끝나기 전까지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유단 곁에 있는 체시.

유단도 걱정이지만 체시는 걱정 수준을 뛰어넘었다.

국가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유사 정령. 극단적인 상황에 몰렸을 때 체시가 무슨 선택을 할지, 예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동대륙을 잇는 레테.

에너지는 확보된 상태일 것이다.

로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가하란은 소멸하는 위상과 그 안에 남은 로키를 떠올렸다.

그때는 가까웠고, 지금은 멀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만남은 이뤄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너는 너로 살게 되는 결말이 찾아올까?

“로키가 아닌 유단으로 살아가겠다면…….”

길게 이어지던 생각을 자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흔들리며 전진하던 트럭이 멈췄다. 가하란은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흩뿌려진 빛들이 보였다.

-아버지, 볼로스예요.

볼로스.

아버지가 숨을 거둔 땅.

“방책까지 천천히 접근해 줘. 신호가 오면 멈추고.”

-네.

가하란은 모자를 눌러썼다.

동부.

타리움, 구세주 유단의 영토에 진입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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