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5화
필은 엉거주춤 일어서서 낮게 나는 하늘석을 바라봤다. 곧 추락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낮았다.
하늘석이 왜 하늘석인가.
저 먼 하늘에, 닿지 않는 곳에 둥둥 떠다니기에 하늘석이었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하늘석은 아주 느릿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마음먹고 뛰면 앞질러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평소와 너무나도 달랐다. 한눈팔면 저 먼 곳으로 사라지던 하늘석이 막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느릿하게 움직이다니.
필은 뺨을 툭툭 친 다음 주변을 살폈다. 지금 중요한 건 하늘석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거병과 마수였다.
마수는 죽은 걸까?
처리한 거병은 어느 소속 용병인 걸까?
여긴 미개척지 한복판이었다.
맨몸으로 돌아다닌다면 10분이 채 안 돼 마수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것이다.
거병을 찾아 도움을 구해야 했다. 완파된 거병에서 곡도를 꺼내 허리에 찼다. 정신을 가다듬고 거병이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틀 때였다.
-그런 장비로는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겁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필은 곡도를 꺼내 들어 내밀었다.
뒤쪽에 자그마한 기계인형이 있었다. 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곡도를 내렸다.
“살았다.”
-네, 살아 계시네요.
“날 너희 주인한테 데려다줘. 혼자서는 여길 빠져나갈 수가 없어.”
-주인이란 표현은 적당하지 않지만, 그 점은 이해해 드리겠습니다.
말투가 매끄러웠다. 말하는 기계인형이야 도심지에 널려 있지만, 이렇게 다채로운 어휘를 구사하는 기계인형은 처음 봤다.
“말을 잘하네.”
-못하진 않죠.
말의 요지를 잡아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신기했다. 보통은 같은 말만 반복하던데.
-사냥꾼이신가요?
“어, 뭐, 그렇지.”
낯설었다.
앞에 있는 게 정말 기계인형이 맞는 걸까? 지금 보니까 기계인형치고는 겉에 덧댄 게 많았다. 단순 반복 노동에 특화된 기계인형은 필요한 부속품만 남겨두는 게 특징이었다.
앞에 있는 기계인형처럼 머리 부분을 만들 필요가 없는데…….
“거병 같네.”
툭 튀어나온 말에 기계인형이 대답했다.
-거병이니까요.
“뭐?”
-크기야 다르지만, 인식 체계나 구동 방식은 뒤에 있는 친구와 똑같습니다.
기계인형이 손가락을 들어 완파된 거병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접경 지역 어느 도시에 초소형 거병이 존재한다고. 인간이 탈 필요가 없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거병이.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토마타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거병이 운동 능력을 획득하려면 인간의 인지 능력을 빌려야 한다고 들었다.
인간의 두뇌 없이도 활동할 수 있는 기계라니. 그런 게 존재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거병이야?”
-분류법을 따른다면, 네, 거병입니다.
“이런 게 정말 있다니, 믿을 수가…….”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려 했다. 거병이 손을 들어 올렸다.
-전 당신의 소유물도, 애완 생명체도 아닙니다.
“아, 미안.”
단호한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사과가 튀어나왔다. 말해놓고 나니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기계한테 사과라니.
-사과하실 것까진 없습니다.
따지듯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뗄 때 거병이 먼저 말했다.
“……너 정말 사람 같구나.”
-전 기계입니다. 인간과 비슷한 사유 체계를 갖고 있지만, 사람은 아니죠.
“이것도 불쾌한 발언이었나?”
-아닙니다. 불쾌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간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신사적이시네요. 표정을 보면 알아요. 적어도 혐오하지는 않으니까.
“혐오? 신기해하지 왜 널 혐오하겠어.”
작은 거병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필은 잠깐만, 하고 외치며 작은 거병 뒤에 붙었다.
“그, 주인이란 표현이 이상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책임자? 만든 사람?”
-아버지요.
“……아버지. 그래, 네 아버지한테 날 좀 데려다줄래?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 상황이 좋지 않거든.”
-네. 내버려 두면 금방 죽겠죠.
작은 거병이 말없이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필은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막 그렇게 들어가도 되는 거야? 여기 미개척지야.”
-괜찮습니다. 주변에 마수는 없어요. 아니, 반경 2km 내에 마수는 없으니 안심하세요.
“2km? 감지 장치는 군용이 아니고서야 100m가 한계일 텐데.”
작은 거병은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필은 놀라서 곡도를 들어 올렸다.
“소리 들었지?”
-놀라지 마세요. 해체 작업 중에 나는 소리니까요.
“어, 어.”
대체 아버지란 자는 누구일까. 노련한 사냥꾼조차 장난감 삼아 놀던 마수를 단숨에 제압해 버린 자.
“아까 보니까 작살도 쏘던데, 팀이 있는 거겠지? 어디 용병단이야?”
-저흰 용병단이 아니에요.
“그래?”
-사냥꾼 조합에도 들지 않았고요. 굳이 분류하자면, 그래요, 공학자죠.
“공학자?”
작은 거병이 멈춰 섰다. 필도 걸음을 멈추고 앞을 보았다.
거병이 마수를 해체하고 있었다. 도끼날이 마수 외피에 닿자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어떤 처리를 했기에 저리도 쉽게 외피를 가르는 걸까?
최신 장비는 언제 봐도 탐이 난다. 이것도 인연인데 거래처를 알아둘 수 있을까?
작은 거병이 다시 움직였다. 필은 다급히 작은 거병을 불렀다.
“저기.”
-저는 저기가 아닙니다.
“아, 그렇지. 이름이 있어?”
-닥. 그게 제 이름입니다.
작은 거병, 닥이 속도를 높였다.
“잠깐만, 닥! 같이 가!”
닥과 함께 마수 근처로 향했다. 갈라진 외피 사이로 검은 살점이 보였다.
기괴하게 박혀 있는 잔뼈를 갈라내자 마나가 응축된 뼈가 보였다. 모노클이나 탐지기 없이도 알아볼 정도로 형태부터가 달랐다.
돈덩어리.
시장에 내놓으면 너도나도 사겠다고 경매용 팻말을 들어 올릴 것이다.
사냥에 성공했다면 저게 내 주머니로 들어왔을 텐데, 필은 입맛을 다시다가 도리질을 쳤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였다.
마수의 뼈를 뽑아낸 거병이 철제함에 뼈를 옮겨 담았다.
저 거병 안에 아버지란 자가 타고 있겠지.
필은 긴장한 채 거병을 바라봤다.
“이봐, 닥. 아버지란 분 성격이…….”
-처음 본 사람을 해코지할 그런 분은 아니에요.
“그렇지?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 인품이 아주 훌륭하실 것 같아.”
닥이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봤다. 기계라 표정이란 게 없는데, 왜 한심하게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머쓱해서 괜히 코를 긁적였다.
“저기.”
필은 흥건한 마수의 체액을 피해 거병 앞으로 갔다. 얼굴을 보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체임버가 열리지 않았다.
“선생님. 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염치없지만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만 동행할 수 있을까요? 원하신다면 제 거병을 가지셔도 됩니다. 아량을 베푸셔서 오토마타만 넘겨주신다면…….”
어설프게 웃으며 주절주절 말할 때였다.
-비켜. 나 바빠.
거병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필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성격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닥을 슬쩍 노려봤다. 말한 것과 달리 까칠한 아버지잖아.
그때였다.
닥이 몸을 틀면서 말했다.
-아버지. 데려왔어요. 이름은 필이고 말씀하신 대로 사냥꾼이에요.
필은 눈을 깜빡거리며 몸을 돌렸다. 뒤쪽에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얼굴에 연한 흉터가 보였다. 형태를 보건대 화상 자국 같았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이쪽이야?
거병을 한번 본 후 다시 아버지라 불린 청년을 바라봤다.
“몸은 괜찮으세요?”
다가온 청년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장갑 낀 그 손을 잠깐 바라보다가 살며시 쥐었다.
“덕분에 건사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동료분들도 무사히 숲을 벗어났어요.”
“그렇군요.”
거병이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먼지가 잔뜩 피어올라 눈 앞을 가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작게 기침하자 청년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거친 분이라 이해 좀 해주세요. 조종이 익숙하지 못한 것도 있고.”
“아니요, 아니요. 안에 계신 분의 실력은 이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대단하시던데요?”
은퇴한 거병 기사거나, 소형 거병이 막 생산됐을 때부터 탄 노련한 사냥꾼일 것이다.
-꼬마야, 너무 멀리 가지 마. 네가 근처에 없으면 이 몸뚱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몸뚱이?
필은 거병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표현이 독특했다. 몸뚱이라니.
“그러게 절 안에 태우면 편하다니까요.”
-네가 안에 있으면 뭔가 이상해. 거치적거려.
“언제는 저랑 노는 게 좋다고 하셨으면서.”
-이젠 사냥하는 게 더 좋아. 내 몸을 움직여서 뭔가를 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이야.
“그러다 평생 여기 눌러앉겠어요.”
-좋지!
거병이 철제함을 들고 움직였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는 거병을 바라봤다. 정비팀은 저쪽에 있는 건가?
“가시죠.”
청년이 움직였다.
초소형 거병, 실력 좋은 거병 기사, 아버지라 불리는 청년. 기묘한 집단이었다.
“전 가하란입니다.”
“아, 네. 필입니다. 사냥으로 밥 벌어먹고 있죠.”
완파된 거병으로 돌아왔다. 처참하게 망가진 거병을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모듈을 교체하는 것보다 새로 하나 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돈 빠져나가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쨍하게 울렸다. 살아남은 기쁨은 옅어지고 막막한 지갑 상황만 떠올랐다.
“오래 타셨나 보네요.”
가하란이 뭉개진 거병으로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공학자라고 했지. 필은 가하란 옆에 붙으며 말했다.
“3년 정도 같이했죠. 처음 클랜에서 인도받았을 땐 정말 반짝거렸는데.”
필은 흠집으로 가득한 외장갑에 손을 올렸다.
“저기, 정말 염치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것도 같이 옮길 수 없을까요? 안에 든 오토마타가 제 단짝이거든요. 버전이 낮아서 종종 이상한 소리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손발을 맞춰온 친구라서.”
가하란이 허리 뒤쪽으로 손을 옮겼다. 둘둘 말린 공구 주머니를 들더니 체임버 쪽을 바라봤다.
“좀 봐도 될까요?”
“아, 네. 그러세요. 근데 상태가 엉망이라 뭘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가하란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필도 자세를 낮춰 체임버 안 상황을 살폈다.
“이거.”
가하란이 팔을 뒤로 돌려 사진을 건넸다. 아내와 딸이 찍힌 사진이었다. 꽤 비싸게 주고 맞춘 사진.
“하마터면 잊고 갈 뻔했네요.”
필은 사진을 받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 기본형이 코튠 쪽인 거 같은데.”
“맞을 겁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라인 이름이 그랬을 거예요.”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뭘 살피고 있는 걸까.
“상태 괜찮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떼어낼게요. 액상 근육의 잔류 마나가 살짝 위험해 보이니까.”
“떼어 낸다고요?”
“예.”
“가능한가요? 오토마타를 건드리려면 전문 장비가 있는 정비고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렵지는 않아요.”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초소형 거병도 만들어낸 사람인데 뭔들 못 할까.
뒤로 물러서자마자 하얀 빛이 번쩍였다. 필은 놀라서 목을 움츠렸다. 분명 자그마한 공구만 손에 쥐고 있었는데, 저 강렬한 불빛은 어디서 나는 걸까?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니까.
닥이 말했다.
어색하게 불꽃이 이는 체임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석은 여전히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수를 사냥한 그 거병은 어디로 간 걸까? 근처에 정비팀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됐어요.”
가하란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