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4화 (514/558)

제514화

탄내는 익숙하다. 살점이 익어가며 내는 냄새도 익숙하다.

하지만 여긴 전장이 아니라 도시였다. 도시에서는 나선 안 될 냄새가 하늘을, 땅을 덮고 있었다.

“대체 뭘까요.”

샬롯은 건물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유, 평등, 그리고 진보.

각자의 외침은 강렬했으나 어쩐지 공허했다. 소리는 넓게 퍼져 나갔으나 누굴 위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샬롯은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였다. 이름 모를 남자의 시체 위쪽으로 반파된 거병이 보였다.

폭발에 휩쓸린 가게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자주 들렀던 디저트 가게인데, 주인은 괜찮을까?

“너희 인간이 계속해 온 일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흥, 하고 콧김을 내뿜는 타챠였다. 창대를 어깨에 이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리엘 언니, 괜찮겠죠?”

“그자가 합류했다면 문제없을 거다.”

“못 만나면요?”

“죽겠지.”

눈을 찌푸리며 떠날 준비를 하자 타챠의 꼬리가 눈앞을 막았다.

“안 죽었으니 걱정 마라.”

“기펠 할아버지랑 못 만나면 죽을 수도 있다면서요.”

“만났다. 꼬마가 준 괴상망측한 기계가 찾아냈을 테니까.”

꼬마와 기계. 누굴 말하는 건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가하란이 만든 신비로운 기계라면 분명 언니와 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줬을 것이다.

“이제 어쩌죠?”

“당분간 내 곁에 있어라.”

“스파우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상황을 살펴야 한다. 막아낼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그때 몸을 뺄 거다.”

샬롯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몰래 가서 유단을 죽이는 건 어때요?”

“할 수 있으면 해라. 하지만 불가능할 거다.”

“아저씨가 가도요?”

농담거리도 안 된다는 듯 쿡 웃는 타챠였다.

“조잡한 기계들로 보호한다 한들 산이 내린 창을 막아낼 순 없다.”

“그러면 도와줘요. 이거 협회와도 연관된 일이잖아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난 대전사의 부탁을 받았을 뿐이다. 아리엘을 도와달라는 부탁. 그 아리엘이 널 맡겼으니, 당분간 널 지킬 뿐이다.”

샬롯은 몸을 띄운 후 타챠와 눈높이를 맞췄다. 양손을 내밀어 긴 주둥이를 붙잡았다.

“정 없는 아저씨. 언니랑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안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세월로 따지면 더 오래된 자들이 있다. 그들이 원하면 너희를 죽여도 합당한 일인가?”

“그건…… 아니지만.”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 내 눈에 들어오면 도울 것이다. 하지만 당장 보이는 건 인간들의 욕심뿐이다. 추잡한 욕심이 득실거리는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강자와의 정당한 싸움뿐이다.”

고집불통 도마뱀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바람으로 띄워서 데려가고 싶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타챠가 눈을 부라리면 바람들도 겁을 먹고 도망치니까.

“저 사람들은…….”

시의회에서 사람들이 일렬로 줄지어 나왔다. 다들 뒤통수에 양손을 대고 있었다.

선두에 선 남자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곧바로 날아든 창대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쓰러진 남자에게 발길질이 가해졌다. 거리에 있는 시민들은 그 광경을 지켜볼 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되레 통쾌하다는 듯 외쳤다.

“쓰레기 같은 놈들!”

“매번 우리 걸 빼앗기만 하지!”

샬롯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처형이 시작됐다. 재판대에 세우지도 않고, 죄목을 말하게 하지도 않고 그냥 죽여버렸다.

“여기! 타리움의 개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골목으로 진입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뛰었다. 뒤쪽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여자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전 그냥 의회에서 청소를…….”

여자가 말을 쏟아냈으나 군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샬롯은 바람들이 전해준 얘기를 듣다가 눈을 찌푸렸다.

지나치다.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휘말리고 있었다.

샬롯은 발밑에 있는 군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좁은 골목을 가득 채운 바람들이 군인들의 발걸음을 막았다.

그사이 여자가 일어나 다른 길로 도망쳤다. 안심하며 바람을 거둬들일 때였다.

아악, 비명이 들려왔다. 군복도 안 입은, 일반 시민의 손에 여자가 죽었다.

“내가 잡았어! 내가 잡은 거야.”

전리품을 챙기듯 여자의 옷에 붙어 있던 의회 표식을 떼 손에 쥐었다.

샬롯은 옥상으로 내려왔다.

“아저씨.”

“왜?”

“차라리 마수와 싸우던 전선이 낫겠어요. 거긴 치열하지만, 추잡하진 않거든요.”

샬롯은 예리한 눈으로 중년인을 노려봤다. 조금 멀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람을 쏘아 보내면 죽일 수 있었다.

손가락을 겨누고 숨을 살짝 머금을 때였다.

중년인 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기뻐하며 죽은 여자를 욕했다. 의회의 개, 시민의 적, 불평등의 상징 등등.

“업을 쌓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스치듯 왔다가 가는 너희들은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일 테니까.”

“…….”

샬롯은 손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저씨,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요?”

타챠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약자의 잘못이다.”

따라오라며 턱짓하는 타챠였다. 샬롯은 승리를 자축하며 환호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다가 건물 아래로 내려갔다.

* * *

필은 랍파에게 인정받은 자신의 눈이 언제나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랍파보다는 사냥꾼이 되고 싶었기에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

어릴 때는 동물을, 그라운드 제로 이후에는 마수를.

거병을 다루며 마수를 사냥하는 건 보람된 일이었다. 보수도 좋았고, 사람들이 일의 고됨도 알아줬으며, 무엇보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얻었다. 가정이 한 폭의 그림처럼 완성돼 가는 동안, 뜻이 맞는 동료들과 만든 용병단도 덩치가 커졌다.

막힘 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밀려나기 전까지만 해도.

돈이 필요했다.

안전이 보장된, 차원이 다른 편의가 제공되는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큰돈이 필요했다.

“대마수가 사라지고 나서는 근처에 심도 3 이상의 마수가 안 보여. 이래서는 용병단 유지비도 안 나와. 그리고 페스티 녀석도 이번에 용병단을 나가기로 했어. 여기선 돈을 벌 수 없다고 하는데 막을 수가 없네.”

친구의 말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미개척지로 가자. 가서 큰 거 하나 낚아 오자.”

심도 6 이상, 고품질 배터리에 사용되는 마수 뼈는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고 있었다.

분배소가 늘어나며 배터리 사용처 역시 늘어난 덕이었다. 심도 6 이상의 마수를 사냥해 뼈를 얻을 수만 있다면 재정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될 것이었다.

위험한 만큼 돌아오는 것도 크다.

필은 자신이 있었다. 심도 7의 마수도 사냥해 본 적이 있었다.

노련함으로 무장한 동료들이라면 희생 없이 사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시작은 좋았다.

부상자도 없었고 거병이 파괴되는 일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필은 이번에도 일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도망쳐!”

필은 동료들을 향해 말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심도 4 마수를 잡았을 때 그냥 돌아갔어야 했나? 아니면 마나 측정기가 심도 5 마수라고 예측했을 때 다음을 기약하고 물러섰어야 했나?

그것도 아니면…….

쿠궁.

필은 눈을 부릅떴다.

어느새 붙잡혀 있었다.

4m 크기의 마수. 인간의 체형을 닮은 마수는 네 개의 팔을 휘두르며 용병단을 유린했다.

-필!

동료의 음성이 들려왔다.

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내가 붙잡고 있을 동안 최대한 멀리 도망쳐!”

붙잡고 있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눈앞의 마수는 악력으로 트레일러를 우그러트렸다. 예비용 외장갑이 종잇장처럼 뭉개지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앞으로 펼쳐질 일이 그려졌다.

언젠가 집에서 기르는 개한테 오래된 솜 인형을 던져준 적이 있었다. 개 입에 물린 솜 인형은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터져서 솜을 토해냈다.

나도 그렇게 인형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내의 얼굴도, 딸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그저 살고 싶다는 것뿐. 고개를 돌렸다. 거병의 목도 돌아갔다.

보이는 건 쿵쿵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는 동료들의 거병이었다.

“아.”

끝났다.

콰드드득!

팔이 뜯겨 나갔다. 아찔한 통증이 머리를 때렸다. 감각 확장을 최소치로 낮추고, 인지 통합도 끊을 준비를 했다.

거병을 던져주고 도망치면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체임버 덮개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마수의 눈이 보였다. 보라색 점이 무수히 박힌 눈이 마치 웃는 것처럼 휘었다.

그리고.

끼기기긱, 체임버 덮개가 짓눌렸다. 놈은 알고 있는 것이다. 거병 안에 사람이 탔고, 덮개를 망가트리면 내릴 수 없다는 걸.

사냥꾼이다.

이놈은 인간 사냥꾼이다.

시대가 바뀌었음에도, 소형 거병이 보급됐음에도 미개척지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은 이유.

“젠장, 이게 아닌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잘 그려왔던 인생이란 그림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찢겨나간다.

분배금은 아내한테 전달되겠지?

도중에 해먹을 놈들은 아니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되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이상하게 나른해졌다. 지금이라면 마음 편하게 오줌을 싸도 될 것 같았다.

오토마타가 경보음을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왼쪽에 붙은 가시화 패드에는 ‘심도 5’의 마수가 표시됐다.

필은 실웃음을 흘렸다. 심도가 강함의 척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심도가 높은 마수는 강했다.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무시한 게 문제였던 걸까.

묵직한 소리가 위쪽에서 났다.

내려앉고 있었다.

찌부러진다. 옴짝달싹 못 하고 거병 안에서 죽게 되는 것이다.

“으아아악!”

마지막 힘을 짜내 조종간을 잡아당겼으나 거병은 반응하지 않았다. 인지 통합이 끊긴 거병. 커다란 쇳덩어리에 불과한 거병.

“아.”

탁한 신음과 함께 두 손을 놓을 때였다. 소리가 멎었다. 쇠가 짓이겨지며 내는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소리가 멈춘 것이다.

인지 통합이 해체된 상태라 바깥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쿵, 충격이 등 뒤를 덮쳤다. 거병이 뒤로 나자빠진 것 같았다.

동시에 소름 끼치는 울음이 체임버 덮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콰앙!

강렬한 진동과 함께 폭음이 일어났다. 동료들이 돌아온 걸까?

안전띠를 풀었다. 몸을 일으켜 세워 구겨진 체임버 덮개 사이로 바깥을 바라봤다.

낯선 거병이 있었다.

새하얗게 달아오르는 도끼날.

거병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마수가 네 팔로 돌과 부러진 나무를 던지며 거리를 벌렸다.

두려워하는 건가?

저 거병을?

네 팔로 땅에 대고 몸을 잔뜩 웅크린 마수가 그대로 도약했다. 도망치는 것이다.

파아앙!

귀를 저리게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 밖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거대한 작살이었다.

관통당한 마수가 지면으로 꼬꾸라졌다.

필은 벌어진 틈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여기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못 들었는지 거병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필은 두 발을 덮개에 대고 있는 힘껏 밀었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덮개가 들썩거릴 때였다. 발밑이 훅 꺼지는 느낌과 함께 덮개가 열렸다.

“……저게 뭐야.”

필은 마른침을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땅이 머리 위에 있었다.

그것이 하늘석임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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