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3화 (513/558)

제513화

“이, 이게 뭐야!”

아리엘은 뒤쪽을 돌아봤다. 세 쌍의 다리를 지닌 작은 기계가 의원들 곁을 맴돌고 있었다.

구부러지는 다리로 의원의 다리를 기어 올라가기도 하고, 몇몇은 뛰어올라 머리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의원들이 기겁하며 기계들을 털어냈다.

이게 대체…….

아리엘은 발치로 모여든 기계들을 내려다봤다. 기괴한 생김새. 하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하늘석에서 종종 보던 녀석들이었다. 기계들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가하란은 이렇게 대답했다.

“뭐든지요.”

콰득!

타워 쉴드에 짓눌린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작은 기계들이 놀란 고양이의 털처럼 몸을 세웠다.

“치워버려! 별거 아니야.”

남자의 말대로 작은 기계들은 바닥을 기거나 벼룩처럼 살짝 뛰어오를 뿐 공격 기능은 없는 것 같았다.

“왜 여기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을 주려면…….”

아리엘이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작은 기계들을 바라볼 때였다.

기계들이 우르르 밀려들었다. 타워 실드에 찍혀서 분해된 기계 근처로 모여들더니 메뚜기 떼처럼 날뛰었다.

“치, 치워!”

“당황하지 말고 떼어내!”

아잔탄스의 생존자들이 날뛰는 기계를 무기로 쳐낼 때였다.

미약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설마 폭발하는 건가?

아리엘은 몸을 돌리며 의원들에게 외쳤다.

“도망쳐요!”

힘이 풀린 다리로 겨우 몇 걸음 뗐을 때였다.

끼이이익!

엄청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아리엘은 달리다 말고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엉거주춤 물러서던 의원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귀를 부여잡은 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신경을 가닥가닥 끊어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아리엘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자그마한 기계들이 파르르 떨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기계들에 둘러싸인 아잔탄스의 생존자들은 들고 있던 장비를 놓아버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살려줘!”

“눈이 안 보여! 눈이, 내 눈이!”

“케스슨! 어디 있어! 소리가 안 들려! 이봐, 이봐!”

지휘하던 남자가 손을 허우적거리며 외치다가 넘어졌다.

움찔대던 아잔탄스의 생존자들이 서서히 몸을 늘어트렸다.

2분 정도 지나자 파르르 떨던 기계들이 멈췄다.

아리엘은 귀에서 손을 뗐다. 웅, 하는 이명이 귓속에 맴돌았다.

“다들 괜찮아요?”

의원들을 바라봤다. 볼트에 맞은 의원만 실신했고, 나머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 앞이 안 보여요.”

딱 한 명만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며 울먹거렸다.

“진정해요.”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외상은 없는 것 같았다. 소리가 시신경에 무슨 영향을 끼친 건가?

걱정하며 시력을 상실한 의원을 바라볼 때였다.

“어…… 보여요. 보여요!”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눈동자가 되살아났다. 일시적인 현상인 듯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영구적 손상이 아닌 일시적인 방해라면, 지금 대처해야 했다.

끝이 부러진 검을 들고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걸었다. 기절한 아잔탄스의 생존자들이 눈 아래에 놓였다.

“휴, 휴아. 거기 있어? 눈이 안 보여. 거기 있는 거 맞아?”

대화를 주고받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 남자도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은 듯했다.

아리엘은 검 끝으로 남자의 목을 눌렀다.

남자가 움찔하더니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이미 둔은 점령됐어. 다 끝난 거야.”

“그건 두고 봐야 알겠죠.”

“이 끔찍한 기계도 네가 준비한 건가?”

“글쎄요.”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눈은 안 보이지만 소리로 방향을 찾아낸 듯했다.

“아잔탄스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영광이여, 영원하여라!”

아리엘은 칼을 휘둘렀다. 남자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정신을 차렸는지 몇몇 사람들이 일어났다. 손에 칼을 쥔 채 허공을 긋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시력을 잃은 군인을 죽이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장비 사용법만 익힌 사람들 같았다.

각종 기구의 작동법만 알면 사람을 쉽게 죽일 수 있는 시대.

차례차례 목을 베어낸 다음 마지막 사람과 마주했다. 여자였다. 석궁을 든 채 눈물을 흘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시력이 돌아온 듯했다.

“사, 살려주세요. 전 그냥 따라왔어요. 아잔탄스에서 돈을 준다고 해서 왔을 뿐이에요.”

“그랬겠죠.”

“정말이에요!”

“알아요. 이해해요.”

“그러면…….”

“근데 방금 날 쏘지 않았나요? 돈이 된다는 이유로.”

여자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볼트가 발사됐고, 아리엘은 상체를 숙여 피했다.

거리를 좁히고 갈비뼈 사이로 검을 찔러 넣었다. 개같은 년, 석궁과 함께 쓰러진 여자가 남긴 말이었다.

“피차 개같긴 마찬가지네요.”

머리가 핑 돌았다. 아리엘은 벽에 기대 기침을 토했다. 마른기침인 줄 알았는데, 피가 섞여 있었다.

숨이 부족했다. 전성기 때 신체술의 한계 시간이 6분이었다.

지금은 10분 정도 끌었나? 남용한 대가가 찾아오고 있었다.

몸에 붙들어 둔 마나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면서 몸의 열기를 빼앗아 갔다. 산개하는 마나를 붙들면 더 큰 일이 발생할 수 있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뒀다.

몸이 저절로 옆으로 꼬꾸라졌다.

으슬으슬 추위가 찾아왔다.

“아리엘 의원님!”

다른 의원들이 다가왔다. 다들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얼른…… 빠져나가요.”

부축을 받아 일어섰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이틀간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아리엘은 바닥에 널브러진 기계들을 바라봤다. 굉음을 낸 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회용인가?

가져가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회수하기에는 개수가 많았고.

비틀거리며 이동할 때였다.

“잠깐만요.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뒤에 선 의원이 말했다. 평소였다면 기감을 높여 주변을 확인했겠으나, 지금 몸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가까워지고 있어요.”

아리엘도 소리를 들었다. 젖은 땅을 밟는 소리. 적어도 다섯 이상이었다.

“추적대인 거 같네요.”

아리엘은 힘겹게 검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어쩌죠?”

아리엘이 고민하던 때였다. 볼트에 다리를 꿰뚫린 의원, 홉스가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 된 거죠?”

아리엘은 홉스의 손을 잡았다.

“홉스 의원.”

“네.”

“우리가 시간을 벌어야 해요.”

“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리엘은 사지가 멀쩡한 의원들을 바라봤다.

“최대한 빨리 둔을 벗어나요. 그리고 스파우로 가서 준비하세요. 율이 남아 있으니 상황 정리는 쉽게 될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 죽으면 도시도 넘어가요. 그렇게 되면 다음에 제거될 사람은 여기 계신 의원분들의 가족이 되겠죠. 그러니 목숨 걸고 탈출해서 스파우로 가세요.”

의원들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자, 잠깐만! 나도 데려가요! 나도!”

남겨진 홉스가 소리를 질렀다. 아리엘이 홉스의 손을 붙잡았다.

“늦었어요. 그 다리로는 여길 벗어날 수 없어요.”

“……시발, 왜 하필 내가.”

“재수 없게 맞았으니까요. 원래 전장에선 다치면 안 돼요.”

홉스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통로 쪽을 바라봤다.

“당신을 따른 내가 병신이었지.”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어요.”

“그러게 왜 학회장을 건드려서 이 꼴을 만들어요!”

“누구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지만, 정작 바라보는 건 이상적인 상황 아닌가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일이 잘 풀렸으면 그간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도전했죠.”

“……빌어먹을.”

“적당히 시간 끌다가 붙잡힐 거 같으면 죽여줄게요. 고문당하는 것보단 그게 나을 테니까.”

홉스가 흐르는 눈물을 팔로 닦아내며 연신 욕을 내뱉었다.

아리엘은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여기서 신체술을 다시금 사용하면, 이틀 요양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잘못돼서 붙잡아 둔 마나가 체내를 헤집기라도 하면 다리나 팔을 잘라내야 할 수도 있었다.

가하란 씨한테 하나 맞춰달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살아남는 미래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반대편에서 오는 게 학회장, 혹은 아잔탄스의 추격자라면 죽음은 확정된 것이다.

“티안은 역시 지독하군.”

불빛과 함께 나타난 중년인이 말했다. 티안부터 꺼내드는 걸 보면 아잔탄스 쪽 같았다.

살길은 막혔다.

“뭐 방법 없어요? 시발, 뭐 없냐고요?”

홉스가 다그쳤다. 어떻게 해서든 수를 만들어 내라는 그의 말에 어깨를 으쓱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요.”

“……다 해낼 거라 했으면서.”

홉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굴러다니는 창을 들었다.

“어차피 뒤질 거 한 명이라도 데려가야겠어요.”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아리엘도 신체술을 사용해 일어섰다. 마나가 시작부터 날뛰었다.

이 몸은 끝났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앞을 바라볼 때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아잔탄스의 군인들도 고개를 돌리며 바람의 행방을 찾을 정도였다.

그리고.

콰직!

지하 통로 양쪽 벽면이 부풀어 오르더니, 사이에 놓인 사람들을 짓뭉개 버렸다.

한순간에 십여 명에 달하는 인간이 고깃덩이로 변했다.

홉스가 와들와들 떨며 창대를 떨어트리고는, 곧바로 상체를 숙여 속에 든 걸 게워냈다.

아리엘은 검을 든 채 반대쪽을 바라봤다. 부풀어 오른 벽면이 이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로 된 길 너머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서 좀 걸렸군. 석주가 말한 것보다 더 큰 게 문제였어.”

껄껄 웃으며 다가오는 집결 수도의 최고 원로였다. 피와 살점으로 덮인 길을 걷는데도 신발에 뭐 하나 묻질 않았다.

“……여긴 어떻게.”

“석주에게 실수한 게 있어서 이렇게 빚을 갚으러 왔네.”

기펠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리엘은 긴장감이 탁 풀리는 걸 느끼며 붙들어 둔 마나를 놓았다.

“일단 나가지.”

기펠이 등을 가볍게 밀어줬다. 샬롯이 다루는 바람과는 또 다른 성질의 바람이 몸을 지탱해 줬다.

아, 도마뱀 씨가 말한 사람이…….

아리엘은 오만한 축복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출구로 나왔다. 다행히 대기 중인 병사는 없었다. 먼저 나간 의원들도 무사히 탈출한 것 같았다.

아리엘은 저 멀리 있는 시의회 건물을 바라봤다. 순백의 깃발이 시의회 건물 상단에 걸려 있었다.

환호에 찬 사람들의 목소리가 늦겨울 바람에 실려 전해졌다.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한 기계는 무섭네요.”

“기계?”

기펠이 의문을 담아 바라봤다. 아리엘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유단에 관한 건 아직 기펠에게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동부, 나아가 협회의 일이니까.

“어디로 갈 건가?”

“스파우로 가야 해요. 염치없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늙은 몸이지만 걷는 걸 좋아하네.”

아리엘은 뒤쪽을 보며 물었다.

“혹시 샬롯은 어떻게 됐는지…….”

“그 아가씨라면 걱정할 거 없네. 무승과 함께 있으니까.”

“그렇군요.”

타챠와 함께 있다면 염려할 필요 없었다.

“그 기계들은…….”

“석주께 받은 물건일세.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는 들은 바가 없어요.”

“없겠지. 나한테 맡긴 거니까.”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이라고 해도 모든 수를 내보일 필욘 없겠죠.”

윽, 소리가 입을 비집고 나왔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졌다. 아리엘은 기펠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기절한 홉스가 거기에 있었다.

“최고 원로님.”

“왜 그런가?”

“저도…… 부탁 좀…… 드릴…….”

그 말과 함께 아리엘도 정신을 놓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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