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12화 (512/558)

제512화

“저 쇳덩이가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

타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리엘은 타챠를 쏘아보다가 몸을 숙였다.

타앙, 어디서 날아온 건지 알 수 없는 쇳조각이 지면에 박혀 있었다. 거병의 외장갑 파편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한발 늦은 것 같군요.”

케스틴이 시의회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파된 거병이 불길에 휩싸이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사방에서 함성과 함께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정복 차림의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우리가 목소리를 낸다고 한들 저들은 듣지 않겠지요.”

“유단을 구세주로 치켜세운 대가죠.”

케스틴이 눈을 갸름하게 떴다.

“이 자리에서 휘말리면 입도 벙긋 못 하고 죽게 될 겁니다. 일단 각자 목숨 보전하고, 후에 뵙도록 하죠.”

중도파 의원들이 한데 뭉쳐 시의회 안쪽 정원을 가로질렀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나아가는 그들을 누구도 저지하지 못했다.

“학회장도 중도파는 건들지 않겠죠.”

옆에 서 있는 의원이 말했다. 투항 의사를 밝힌다면 중도파는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이다.

“우린 뒤쪽으로…….”

아리엘이 뜻을 함께하는 의원들을 모아 얘기할 때였다.

폐부를 찌르는 날 선 비명이 정문 쪽에서 났다. 아리엘은 입을 다문 채 정문 쪽을 바라봤다.

케스틴 의원이 쓰러지고 있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목은 이름 모를 군인 손에 들렸다.

“우리 것을 되찾아 오자!”

광기 어린 외침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학회장은 우릴 다 죽일 생각인가 보네요.”

레테만 건사할 수 있다면 다른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건가?

정말 기계다운 처리 방식이었다.

밀려드는 군인을 보며 생각했다.

언제부터 준비한 것일까?

오라클뿐만이 아니었다. 소속 불명의 군인들과 거병들도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단기간에 준비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공들여 배치해 놨을 것이다. 시의회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하게.

“제가 살던 집 2층 방 안쪽에 이중으로 된 서랍이 있습니다. 그 안에 아버지가 남겨주신 노트와 덴스 교수가 준 메모지가 있어요. 그게 유단의 치부입니다. 그걸로 쉽게 해결되면 좋겠지만, 아마 대비해 놨을 겁니다. 유단 역시 약점이 드러났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하늘석에서 가하란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선봉장으로서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실권을 잡아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유단에게 감화된 시민들은 정치가가 무슨 말을 한들 변명으로 들을 것이다.

학회장의 몸을 점거한 게 기계라고 말하면, 다들 헛소리라 할 테지.

당위성 확보.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그래서 법을 수단 삼아 압박하려 했으나, 하기도 전에 유단이 공세를 취했다.

옛 군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무력 진압이라니.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방법이었다. 수단으로 이용한 군 세력에게 자리를 빼앗길 게 확실하니까.

오판이었다.

상대가 기계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인간적인 욕심이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상정했다.

“저쪽으로!”

군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리엘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후 몸을 돌렸다.

“일단 지하 대피로로 빠져나가죠.”

다른 의원들을 먼저 보낸 후 여전히 우두커니 서 있는 타챠를 바라봤다.

“거기서 뭐 해요?”

“좁은 곳에서 날뛸 순 없으니 여기서 잠깐 놀겠다.”

“괜찮겠어요?”

“날 걱정할 시간에 네 목숨이나 염려해라. 광적인 인간들은 꽤 까다롭지. 눈먼 칼은 종종 죽지 않아야 할 운명마저 베어버릴 때도 있으니 목 관리 잘해라.”

“운명이란 게 사라진 시대 아니었나요?”

“아, 그랬지.”

“……조심하세요. 다치지 말고.”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라. 다친다? 나한테 그런 선택지는 없다.”

휘감겨 있던 깃발을 풀어낸 후 깃대를 움켜쥐는 타챠였다.

“가라. 오만한 축복을 받은 자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오만한 축복을 받은 자.

말을 곱씹으며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한나벨 의원이 다른 의원을 밀치며 앞서가는 게 보였다. 단련도 안 된 늙은 몸인데 기이할 정도로 재빨랐다.

“굼뜨게 걷지 말고 빨리 움직여!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다 죽은 목숨이야!”

한나벨이 다그치자 의원들이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우린 이쪽으로 가겠네.”

한나벨이 오른쪽 출구로 몸을 틀었다. 아르드헨을 따르는 의원들은 정면 출구로 향했다.

“우린 왼쪽으로 가죠.”

마법등을 앞세우며 걸어 나갔다.

학회장도 지하 대피로는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인원을 배치해 뒀을지.

“아리엘 의원님, 저희 괜찮을까요?”

시의회에 막 들어온 친구가 불안에 떨며 목소리를 냈다. 몇 달 전만 해도 둔 시내에서 평범하게 장사하던 사람이었다. 이런 일에 내성이 없는 게 당연했다.

“내가 최대한 막아볼게요.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면,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요. 아마 끝까지 쫓지는 않을 테니까.”

아리엘은 걸음을 멈췄다. 맞은편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커진다.

이내, 얼굴이 식별될 정도로 가까워졌다.

“아리엘 의원.”

낯선 남자가 반갑다는 듯이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얼굴.

눈빛을 보건대 마중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반갑게 맞아야 할 사람은 아닌 듯하네요.”

“그런가요? 나는 무척이나 반가운데. 내려오면서 기도까지 했어요. 내가 있는 곳에 그 작은 아이가 오길.”

“놀랍네요. 일면식도 없는 분이 이토록 절 반기시다니.”

“아리엘 의원은 어렸기 때문에 날 기억 못 할 겁니다. 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어떻게 잊겠습니까? 본토 귀족, 아리엘 베아 티안을.”

힘주어 이름을 말하는 남자였다.

살며시 미소가 나왔다.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니 이상하게도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불려보는 것도 오래간만이네요. 하지만 티안은 잊혔고, 베아는 버린 지 오래예요. 이젠 귀족이 아니니까. 전 그냥 아리엘입니다.”

“티안가의 여식이라면 평생 그 이름을 뗄 수 없죠. 평생의 업을 어떻게 스스로 뗄 수 있겠어요?”

“업이요?”

“그래요, 업. 증오스러운 이름.”

맞은편에 선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 들었다. 앞줄에 선 자들은 하나같이 기세가 날카로웠다. 뒤쪽에 있는 자들은 자세가 엉성한 걸 보니 훈련받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아리엘도 검을 쥐며 물었다.

“증오요?”

옛 사정, 사연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으나 시간을 벌어야 했다.

우선 뒤에 있는 일곱 의원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의원들은 칼자루 쥐는 법조차 모른다. 전투가 시작되면 짐이 될 테니 미리 떨어트려 놓아야 했다.

좁은 통로가 그나마 이점이 됐다.

둘 이상이 한 번에 달려들지는 못할 테니 침착하게 대응하면 승산이 있었다.

신체술을 살며시 끌어 올리며 싸움을 준비할 때였다.

“사실 아리엘 의원은 당사자가 아니니 아무것도 모를 테죠. 하지만 티안가의 사람이라면 책임을 져야 해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아니요. 그쪽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저…… 얌전하게 죽어줘요.”

쐐애액!

검면을 사선으로 치켜들었다. 탕,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아리엘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둠 저편에서 볼트가 날아왔다. 석궁이었다.

공간의 이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소모전으로 가면 불리하다. 재빨리 판단을 내리고 돌진하려 했다.

하지만.

“아악!”

연이어 날아온 볼트가 의원을 노렸다. 아리엘은 뒤쪽 상황을 살폈다.

종아리를 관통당한 의원이 숨을 껄떡대며 쓰러졌다. 격렬한 고통이 익숙지 않은 자라 금방 실신할 것이다.

“버리고 도망가는 것도 방법이에요. 의원님의 신체술이면 가능하잖아요?”

타아앙!

날아오는 볼트를 다시금 쳐냈다.

땀이 찔끔 흘러내렸다. 신체술을 최대치로 사용 중이라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반동이 찾아오는 5분 후라면 어떻게 될까?

타워 쉴드를 든 남자 둘이 앞을 막아섰다. 철저하게 원거리에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뚫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혼자서 몸을 빼면 다른 통로까지 갈 수 있겠지만…….

아리엘은 뒤에 있는 의원들을 바라봤다. 저들은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알고는 있어요. 내 사람이라고 한들 버릴 때는 버려야 한다는 거. 근데 쉽지가 않네요.”

“게스할트 님과 정말 닮았네요. 티안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살려드렸을 텐데, 아쉽군요.”

아리엘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타워 쉴드 뒤쪽에서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온다.

벽면을 치고 올라 몸을 웅크렸다. 몸 밑으로 볼트 두 개가 지나갔다.

이대로 그어버리면!

말았던 몸을 펴면서 있는 힘껏 검을 그으려 할 때였다. 다시금 어둠 속에서 빛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짓는 것도.

세 번째 볼트는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어 쏘아진 네 번째, 다섯 번째 볼트에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푹!

왼팔에 볼트가 박혔다. 차라리 관통당했으면 편했을 텐데. 오른쪽 허벅지를 스치고 간 볼트는 벽에 틀어박혔다.

“장군의 딸을 상대하는데 허술하게 준비할 수가 있나요. 교범에 따라 석궁을 여섯 개 준비했어요. 스콜라는 사라졌지만, 교전 교범은 여전히 쓸 만하죠.”

아리엘은 왼팔에 틀어박힌 볼트를 바라봤다. 살짝 튀어나온 볼트 모양을 보건대, 무리해서 뽑아내면 신경에 심대한 손상이 생길 것이다.

왼팔을 늘어트리고 오른손으로 검을 쥐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신체술을 사용한 대가가 온몸을 옥좼다.

아직 안 돼.

아리엘은 흐릿해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정치계에 입문하고 난 후부터 단련 시간을 줄였는데, 더 늘릴 걸 그랬나?

실없는 웃음이 또다시 흘러나왔다.

도마뱀 아저씨는 무사히 빠져나갔겠지? 일말의 희망을 갖고 뒤를 바라봤지만, 겁에 질린 의원만 보일 뿐이었다.

좁디좁은 통로.

타챠가 온다고 해도 양어깨가 벽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할 것이다. 창도 휘두를 수 없고.

정말 여기서 죽는 건가.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갔지만, 정점은 아니었다. 빌어먹을 아르드헨을 발밑에 두고 마음껏 부려먹는 꿈도 이루지 못하고…….

눈에 힘을 주며 달려들었다. 자세를 낮춰 적의 조준점이 얽히게 만들고, 눈앞에 드리워진 타워 쉴드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까앙!

꽤 잘 벼려낸 검 끝이 부러져 나갔다. 공중으로 튀어 오른 검날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아, 이거 카스토돈 배합철입니다. 오라클 거병 외장갑에 쓰이는 거죠. 어지간한 힘으로는 흠집조차 못 낼 겁니다.”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푸욱!

타워 실드 사이로 삐져나온 창이 옆구리를 찔렀다.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복부에 구멍이 났을 것이다.

볼트가 박힌 왼팔로 찢겨나간 옆구리를 눌렀다.

오른팔이 바들바들 떨린다.

“연약한 여자 하나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준비를 해 온 거 아닌가요?”

남자는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제 대화조차 필요 없다는 듯이.

“학회장이 이토록 절 미워하는 줄 알았다면, 좀 잘 보일 걸 그랬어요.”

“학회장하고는 관련 없어요.”

“아, 그렇긴 하겠네요. 계속 티안을 찾는 걸 보면. 죽기 전에 궁금증이나 풀어주시죠? 제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으면 재미없잖아요?”

“……재미라. 아잔탄스. 그게 당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인데, 설명됐나요?”

아리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망령이 돌아왔군요.”

“티안의 안주인이 우릴 제거하는 데 아주 큰 공을 세웠죠.”

“망할 어머니는 끝까지 날 방해하네요.”

“압니다. 아리엘 의원은 튤립 전쟁과 크게 연관 없다는 걸. 그래도…… 이름을 이어받았으면 대가를 치러야죠. 우리가 아잔탄스였다는 것만으로 죽임당한 것처럼.”

아리엘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런 일이라면 아르드헨을 찾아가야죠. 그 망할 인간이 주도한 건데.”

“안 그래도 둔 정리가 끝나면 그쪽으로 갈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인상을 쓰며 마지막을 대비할 때였다.

틱, 티틱. 타탁, 타탁.

낮은 소음이 지하 통로를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아잔탄스 쪽에서 뭔가를 준비한 건가?

하지만 남자의 얼굴 역시 의아함에 가득 차 있었다.

“뭐, 뭐야!”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아리엘은 소음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됐다.

“밟아! 치워내!”

손바닥 크기의 자그마한 기계들이 지하 통로 벽면을 기며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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