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1화
기계 소가 이끄는 수레가 가게 앞에 멈췄다.
“설탕을 조금 더 구해보려 했는데, 쉽지 않네요.”
“저도 소식 들었습니다. 윗동네에서 다 쓸어 간다면서요?”
오트는 작은 자루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안을 살펴보니 황갈색 설탕이 들어 있었다.
“둔은 그나마 나은 겁니다. 다른 도시는 물건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요즘 유통 상황이 괜찮지 않나요?”
“물동량이야 예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죠. 근데 필요로 하는 곳이 워낙 많아서.”
“다들 살기 좋아졌나 보네요. 이 비싼 설탕이 구하기 힘들 정도면.”
“좋은 시대가 됐죠. 예전에는 사람이 낑낑거리면서 옮겨야 했던 것도 이젠…….”
잡화상 주인이 기계 소의 넓적다리를 툭 때리며 말했다.
“이 녀석들이 다 해주니까. 아무튼 주문한 건 물량 들어오면 바로 가져다줄게요.”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기계 소가 멀어져 간다.
오트는 가게 문을 열고 저녁 장사 준비를 했다. 재료를 손질하고 미리 준비해도 되는 볶음 요리에 손을 뻗을 때였다.
데에엥, 밖에서 중후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오트는 갸웃거리며 식칼을 놓았다.
“저게 왜…….”
다시금 종소리가 가게를 비집고 들어왔다. 희한한 일이었다. 시계탑 종은 유지 보수 문제로 3년 정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밖으로 나오니 주변 가게 주인들이 죄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계탑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래?”
“글쎄.”
“종 수리가 다 끝난 건가?”
데엥, 데엥, 연이어 하늘을 타고 울려 퍼지는 종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멀거니 시계탑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저기.”
맞은편 가게 주인이 왼쪽 길목을 가리켰다. 오트도 시선을 옮겼다.
군복을 갖춰 입은 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양옆으로 물러났다.
오트도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군인들은 질서를 지키며 상가가 늘어선 길목을 빠져나갔다.
“다들 무장했는데?”
“분위기가 어째 좀 싸하지?”
군부가 있는 도시인 만큼 군인이야 시도 때도 없이 보곤 했다. 가게 단골 중에서도 군인이 꽤 있었고.
하지만 무장한 군인들이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오트는 군인들이 향한 방향을 바라봤다. 이동하는 군인들의 머리 위로 시의회 건물이 걸쳐 보였다.
“자네들, 가족들부터 챙기게.”
E2-3 골목 상인회의 대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오트는 군인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보며 말했다.
“자네들도 포른 쪽 소식은 들었겠지?”
“도시 밖 사람들이 의회를 뒤집었다는 그거요?”
“그래, 그거. 지금 다른 대도시들도 분위기가 안 좋아. 쉬쉬하고 있지만 여기도 문제가 꽤 있고.”
대표가 고개를 쭉 빼 시의회 건물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군인들이 시의회 건물을 둘러싸고 있어. 내부 사정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되도록 장사 쉬고 저쪽에는 얼씬도 마.”
쿵!
묵직한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해더 트럭이 오가는 도로 쪽에 무리 지은 거병이 나타났다.
“저기…….”
오트가 손을 들어 거병을 가리키는 순간.
콰아앙!
폭발이 일어났다. 길목을 점거한 거병이 반대편을 향해 무슨 짓을 한 것 같았다.
“오라클, 벨틴! 저 미친놈들이.”
대표가 경악에 차서 말했다.
폭음에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놀라서 울기 시작했고, 성인들은 상황 파악에 앞서 일단 도로에서 떨어져 나왔다.
“저, 저게 대체 뭡니까?”
오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시야 정면에 있는 거병이 검은색 쇠막대기 같은 걸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나를 이용한 무기야. 저거에 휩쓸리면 시체조차 안 남게 되니 얼른…….”
대표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다시금 검은 쇠막대기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쿠아아앙!
오트는 귀를 막았다. 먼 곳에서 분진이 솟구치고 있었다. 보랏빛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얼른 피해!”
대표의 말에 상인들이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챙길 수 있는 건 챙기자는 마음 같았다.
오트도 가게 2층에 누워 있는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아내는 도시 밖 목축지로 갔으니 당장은 괜찮을 것이다.
고개도 못 가누는 아들을 품에 안고 뛰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병들이 괴상한 불꽃을 쏘아댔고, 그것들과 대치 중인 거병들은 거대한 방패를 들이밀며 항전했다.
전쟁.
삭막한 그 단어가 머릿속을 잠식해 나갈 때였다. 오트는 길목을 틀어막은 군인들과 마주했다.
온몸이 굳었다.
설마 다 죽이려는 건가?
“이쪽으로 오세요!”
길을 막고 있던 군인이 외쳤다.
가도 되는 걸까?
망설일 때 뒤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어정쩡하게 첫걸음이 떨어졌다.
어차피 뒤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군인들 쪽으로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 들고 이내 군인들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날카로운 창끝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을 할 때였다.
“아이는 괜찮습니까?”
“아…… 네.”
“정말 다행이네요. 어서 안쪽으로 대피하세요. 여기도 곧 시끄러워질 겁니다.”
군인들이 길을 터줬다. 품에 안은 아기가 칭얼대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길게 늘어선 군인들이 힐끔 바라보더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숨넘어갈 것처럼 울던 아기가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군인이 점거한 길목을 빠져나오자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얼빠진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무장한 채 전열을 가다듬는 군인, 소름 끼치는 무기를 앞세운 채 전진하는 거병.
“괜찮아,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다시금 울먹이는 아이를 달랠 때였다.
“저희가 안전을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 통제에 따라주세요.”
군인의 외침에 사람들이 눈치를 보다가 한곳으로 모였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신 거 압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루아침에…….”
“아직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분명한 건 저흰 여러분의 편이라는 겁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던 군인이 턱을 들어 올렸다. 오트도 치직거리는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었다.
-대규모 확성기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전 둔에서 마법 공학을 연구하는 연구자 유단입니다.
둔의 유단.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목소리에 집중했다.
-우선 사과드리겠습니다. 위급한 상황이라고 한들 여러분을 휘말리게 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오트는 뒤늦게 합류한 상인회 사람들과 뭉쳤다.
“유단이라면 학회장 말하는 거 맞지?”
“맞아요. 신년 행사 때 들은 목소리하고 똑같아요.”
“그런 분이 대체 왜 이런 소란을…….”
다른 사람이었다면 욕부터 나왔겠으나, 유단 학회장이라는 말에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전임 학회장님의 뜻을 이어받아 만인의 편의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분배소와 배터리. 마법 공학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죠.
거리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몰려 있었으나,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집중해 학회장의 음성을 들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걸, 저는 알면서도 무시했습니다. ‘사람은 선하다, 사람은 사람을 위하게 되어 있다.’ 친부나 다름없는 전임 학회장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낮게 진동했다.
시의회 쪽을 향하던 거병이 폭발하며 쓰러지고 있었다.
매캐한 연기와 탄내가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기술이 발전하면 공평이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정도 성과도 보였고 저는 이대로 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에게 돌아가야 할 자산을 빼앗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군인 한 명이 칼을 높게 들어 올리며 외쳤다.
“부당한 권력가들에게 심판을!”
“기술의 진보와 평등을!”
오트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놀란 눈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타리움. 시의회는 학회가 관리하던 분배소를 독점, 사유화하려 했습니다. 제가 반대했으나 그들은 강행하기로 결정했죠.
무장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군복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푸른 띠를 오른팔에 감고 있었다. 학회 사람들이란 표식.
-시민 여러분, 아니, 국민 여러분. 천박한 정치가들이 여러분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무장한 시민들이 군인들과 합세했다.
-이 말을 하는 지금, 저는 너무나도 두렵습니다. 그들의 권세는 하늘에 닿았고, 저는 초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앞선 감정은, 분노입니다.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대다수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주변을 바라봤으나, 몇몇은 결의를 다진 것처럼 눈에 힘을 주었다.
-저는 여러분이 누려 마땅한 것을 지켜낼 것입니다. 여러분의 수고로 이룩한 것을 여러분께 돌려드리기 위해 움직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학회장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짧은 침묵이 끝난 후 군인들이 통솔을 시작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군인을 따라 이동하던 사람 중에서 이탈자가 발생했다. 그들은 군인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하더니, 이내 무기를 받았다.
오트는 들뜬 표정으로 돌아서는 로이스를 붙잡았다.
“어딜 가려고?”
“아저씨, 방금 들었잖아요. 정치하는 새끼들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그래도…….”
“아저씨는 애 데리고 가세요. 전 싸울 거니까.”
“아직 뭐 하나 분명한 게 없어.”
“알아요, 저도.”
“안다고?”
“네. 학회장이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죠. 근데, 이건 확실해요.”
로이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이 기회라는 거. 아저씨도 알잖아요. 지금 도시가 어떤 꼴인지? 돈도 벌 수 있는 놈만 벌 수 있게 됐어요. 귀족제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정말 사라졌어요? 아니죠! 뻔뻔하게 살아 있잖아요, 저기에!”
로이스가 가리킨 곳은 시의회였다.
“지금이 기회예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 이번이야말로 진짜 평등이 뭔지 보여줘야죠. 운 좋으면 이름도 남기고.”
“로이스!”
남녀노소 불문하고 군인 쪽으로 합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각자의 이유로 모여든 것이리라.
오트는 거대한 광기를 본 것 같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이미 뒷전인 것 같았다.
아니, 표현이 잘못됐다. 저건 광기가 아니다. 지나칠 정도로 냉정한 계산이다.
“아잔탄스를 위하여.”
오트는 뒤쪽에서 난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틀었다. 군복 차림의 여자가 조용히 읊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 오트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여자가 슬쩍 곁을 지나갔다.
끝까지 모른 척했다.
들키면 안 된다, 오랜 장사를 통해 얻은 직감이 속삭였다.
군인이 지나간 후에야 떨리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잔탄스.
누구나 알고 있는, 하지만 지금은 잊힌 옛 귀족의 이름.
망령이 되살아난 건가?
이 일과 연관된 건가?
“이쪽으로 오세요!”
사람들을 통제하는 군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트는, 시선을 땅으로 깔고 천천히 걸었다.
학회장도, 시의회도, 평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아들을 꽉 끌어안고 살아남는 것만 생각했다.
비대해져 가는 계산적 광기가 얼른 가라앉길, 속으로 기도하며 도시를 벗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