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0화
한나벨은 다가오는 타린족 전사의 손을 피하며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제압된 군인이 보였다. 그중 몇몇은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산의 전사가 어째서 인간 정치에 개입하는가!”
“내가 부탁받은 건 저 인간 여자의 안전이었다. 너희가 말로써 일을 처리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창을 뽑았을 뿐이다.”
“검은 바위 일족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오.”
“책임? 감히 인간 하나가 책임을 논하는가?”
한나벨은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말문을 여는 순간 비늘 돋친 팔이 턱을 으깨버릴 게 분명했다.
“한나벨 의원님, 이건 정당한 자기방어 행위이니 문제 삼으실 수 없을 겁니다. 먼저 움직인 건 그쪽이니까요.”
아리엘이 다가와 말했다.
타린족 전사가 등 뒤에 섰다. 손가락으로 툭 미는데 온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한나벨은 비틀거리며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의원들은 바짝 언 채 움직이지 못했다.
“시대가 바뀌긴 했군. 제국 시절엔 강자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위정자 곁에 있었는데 말이야.”
타린족 전사가 장내를 훑은 후 벽에 붙었다. 쓰러진 채 신음하던 군인들이 타챠를 피해 문으로 기어갔다.
“아리엘 의원, 선을 넘으신 것 같습니다.”
케스틴이 탁한 목소리를 냈다.
“소란스럽게 만든 건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보셨다시피 먼저 칼을 꺼내든 건 한나벨 의원입니다.”
“과한 해석이 아닐까요?”
“한나벨 의원과 어떤 약속을 주고받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발언에 신경을 쓰셔야 할 겁니다.”
“신경 쓰라, 새겨들어야겠군요.”
케스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중립을 선언한 의원들도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사정이 이리됐으니 오늘은 이만 해산하죠. 정리하고 차후 다시 모여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요, 바로 진행해야 할 건입니다. 그러니 의원님들께서는 저한테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
한나벨은 지금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리엘 의원.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닙니까? 당사자인 학회장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 않겠어요? 강압적인 건 좋지 않습니다.”
“회의장에 군인을 불러들이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망할 계집이, 한나벨은 눈을 찌푸리며 아리엘을 노려봤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아르드헨 측 의원들이 손을 들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솔직하게 가보죠. 저희야 학회장을 견제할 수 있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나벨 의원의 말처럼 성급한 감도 없진 않군요. 물고 뜯는 사이라고 한들, 서로의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하는 것 또한 여기 모인 사람들 아닙니까?”
케스틴이 말을 이어 받았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좋지요. 그러나 절차라는 게 있습니다. 긴급하게 회의를 소집한 것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인데, 이런 중차대한 안건을 당사자 없이 진행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정론이었다. 한나벨은 케스틴이 회의장의 분위기를 바꿔주리라 확신했다.
“이런 식으로 의회가 굴러가면, 나중엔 목에 칼을 들이밀고 의제를 결정하겠죠. 제국의 구식 정치를 버린 우리가 또다시 답습해 버리면 사람들이 뭐라 할까요?”
말을 끝맺으며 타린족 전사를 노려보는 케스틴이었다. 타린족 전사는 길게 하품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리엘을 보호할 뿐이라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렇다면 다른 의원들의 동의를 받아 해산하면 그만이었다.
대비할 시간을 벌면 이번 일도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엘 의원. 의회가 붕괴하는 걸 원하진 않겠죠? 아니면 우릴 전부 쳐내고 혼자 위로 올라갈 생각입니까?”
케스틴이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여기 계신 분들의 도움이 절실해요. 유단 학회장을 혼자 상대하는 건 버겁거든요.”
“정말 모르겠군요. 이건 견제 수준이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거물을 치려면 합당한 준비를 해 오셨어야죠. 증거 하나로 너무 일을 크게 벌이면…….”
“좋습니다. 그러면 제안을 바꾸죠. 해임은 보류하되 유단 학회장을 즉시 구속하겠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소문내지 않고 조용히.”
“구속?”
“학회장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선 레테가 되겠죠.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업도 살펴봐야 해요.”
아리엘이 힘주어 말했다.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한나벨은 인상을 찌푸렸다. 케스틴이 의구심 담긴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저 늙은 정치가는 언제든 돌아설 것이다. 여기서 의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학회장이 아주 위험한 일에 손대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위험한 일?”
케스틴이 중도파 의원들을 쓱 바라보더니 자리에 앉았다. 한나벨은 이를 악물었다.
“케스틴 의원님! 들을 가치가 없는 얘깁니다. 지금 아리엘 의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죄 없는 학회장을 협박하고…….”
“그건 알 수 없죠. 정말로 덴스 전 학회장을 죽였다면,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니까요.”
몸을 사리기로 결정했구나, 한나벨은 르용을 바라봤다. 더 지체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눈짓을 받은 르용이 학회장 쪽 의원들과 함께 일어섰다.
“우린 가겠어요.”
그러자 아리엘이 타린족 전사를 바라봤다.
“도마뱀 씨, 막아요!”
움직이던 의원들이 움찔했다.
그 누구도 타린족 전사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훈련된 군인조차 비명만 지르다 나자빠졌는데, 허약한 정치가가 뭘 할 수 있을까.
긴장한 채 타린족 전사를 살폈다.
길쭉한 주둥이가 열리더니, 다시금 긴 하품이 나왔다.
“무력이 없는 인간까지 내가 막을 필요는 없지.”
한나벨은 옅게 웃었다. 멈춰 섰던 르용과 다른 의원들도 걸음을 뗐다.
그때였다.
“여러분들은 그라운드 제로를 또 겪고 싶나요?”
아리엘의 한 마디에 모든 의원이 멈춰 섰다. 한나벨도 정지한 의원들을 다그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케스틴이 되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가능성이 매우 커요.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아리엘 의원. 지금 발언은 학회장 해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는 거, 알고 계시겠죠?”
“네, 압니다. 그렇기에 여러분께 협조를 구하는 겁니다.”
아리엘이 의장석 옆에 섰다. 탁자 끝을 손으로 움켜쥐며 말했다.
“조금 전 안쪽 휴게실에서 한나벨 의원이 제게 제안을 했습니다.”
한나벨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미친년이.
“아리엘 의원.”
아주 작게 아리엘을 불러봤으나 소용없었다. 아리엘의 입이 열리고 또렷한 목소리가 나왔다.
“학회장이 영생을 제공해 줄 거라 했습니다. 타인의 몸을 빼앗아 삶을 이어 나갈 수 있으니 이번 일을 덮으라고.”
회의장에 날 선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시선이 학회장 쪽 의원을 향했다.
찰나였지만, 르용의 표정이 무너졌다. 금방 수습했으나 노련한 정치꾼들은 이미 다 알아봤을 것이다.
예상대로, 케스틴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인가 보군요. 이제야 저한테 한 말이 이해가 됩니다.”
“혹시 디온 사령관이 살아 있다고 했나요?”
“맞아요, 정확히 그리 말했습니다. 물론 그 이상은 듣지 못했죠. 오늘 협조하는 조건으로 다음 얘기를 듣기로 했거든요.”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한나벨은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케스틴을 바라봤다.
“영원히 사는 거,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검증만 되면 누리는 것도 좋죠.”
아리엘이 말했다.
“끔찍한 소리를 하는군.”
타린족 전사가 귀라 생각되는 부위를 후비며 움직였다. 구역질 나는 얘기는 인간들끼리 하라며 나뒹구는 군인들을 발로 찬 후 문밖으로 나갔다.
아리엘이 낮게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도마뱀 씨는 잠시 잊죠. 저 양반은 고결한 분이라 이런 거에 관심 없으니까요. 아무튼 영생, 저도 탐나요. 하지만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거…… 다들 인지하고 계시겠죠?”
“본인의 심상 세계를 건드리는 것도 위험할 텐데, 타인의 것을 건드려서 옮기다니. 마법에 문외한이나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는 잘 압니다.”
케스틴이 혀를 쯧쯧 찼다.
“학회장은 지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위험한 실험을 진행 중인 겁니다. 상식을 벗어난 마법을 구사해야 하니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겠죠.”
“그래서 레테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한 거군요.”
“예. 아시다시피 레테는 마전기를 쉽게 이동시킬 수 있죠. 동부 전역에 퍼져 있는 분배소를 이용한다면 실험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쉽게 충당할 수 있을 테고요.”
“유단 학회장이 레테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밀어붙였죠.”
아리엘이 눈웃음 지으며 케스틴의 말을 받았다.
“거기에 레테를 반대하던 탄드라 명예 의원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요.”
“이렇게 들으니 참으로 오묘한 시기군요.”
아리엘이 주먹 쥔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여러분의 권익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닙니다. 독단적인 실험 때문에 우리가 이룩해 놓은 모든 것이 증발하면 큰일 아닐까요?”
“그건 안 될 일이죠.”
“살인 건은 확실합니다. 이건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전 우리를 위해, 이 의회를 위해 힘쓰고 싶을 뿐입니다. 정의? 그런 건 관심 없어요. 그저 우리가 나눠야 할 걸 지키고 싶을 뿐이니까요.”
아리엘의 말이 끝났다. 한나벨은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학회장의 편을 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을 나눠서 져야 한다.
“제가 아리엘 의원의 참뜻을 오해했나 봅니다. 그래요, 문제가 있으면 살펴봐야죠. 구속해서 찬찬히 들여다봅시다. 문제가 있다면 그대로 처리하면 되고, 없다면…….”
“제가 의회에서 나가면 될 일이니 여러분께 폐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리엘 의원께서 손해만 보는 게 아닌지.”
“뭘요, 이런 일은 어린 후배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젊을 때 활기차게 움직여야죠.”
하하하, 케스틴이 시원하게 웃었다.
“학회장도 이해할 겁니다. 의회가 정한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모두 동의하시는 건가요?”
모두라고 지칭하며 한나벨을 똑바로 바라보는 아리엘이었다.
고심할 거리도 없었다.
“……그렇게 하지.”
“사소한 오해가 생겨 수하들에게 피해가 간 점,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사망자는 없으니 크게 염려하진 마세요.”
“신경 써줘서 고맙군.”
르용에게 턱짓을 했다.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제가 서두르는 이유는 다들 아실 겁니다. 오라클. 학회장을 서둘러 제압하지 않으면, 그쪽에서 움직일 테죠. 그러니 최우선으로 학회장의 신병을 확보한 후 정보를 통제할 겁니다.”
“그건 우리 쪽에서 맡지. 학회장이 연구에 몰두하면 보름 정도 소식이 끊기는 건 흔히 있던 일이니.”
케스틴의 말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이 바뀌었다. 학회장은 구속될 것이다. 없는 죄도 만들어내는 곳인데, 확실한 물증이 있다.
학회장은 처분될 것이다.
살인죄에 이것저것 덧붙여 시민들이 동정표조차 던지지 못할 정도의 쓰레기로 만들 테지.
갈라진 학회의 지분을 나눠 먹는 건 저들이 될 것이다.
한나벨은 잃지 않는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컵은 엎어져 버렸다. 쏟아진 물은 어쩔 수 없으니 컵에 남은 물이라도 지켜내야 했다.
“내가 무지해서 그렇게 위험한 것인지 몰랐네.”
항복의 표시는 확실할수록 좋았다. 아리엘이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셨겠죠. 이제부터라도 저희 의견에 따라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겠네.”
회의장 분위기가 정리되던 찰나였다. 회의장 문이 벌컥 열렸다. 타린족 전사가 뚱한 눈빛으로 복도를 가리켰다.
“대규모 확성 마법이다. 아니, 기계인가? 어쨌든 네가 들어야 할 내용 같은데.”
아리엘이 눈을 찌푸리며 회의장을 나섰다. 한나벨도 뒤따라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와 격리된 정원에 들어섰을 때였다.
둔 시계탑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시민 여러분, 아니, 국민 여러분. 천박한 정치가들이 여러분들이 이룩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합니다.
유단 학회장의 목소리가 도시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