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9화
한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엘이 내려놓은 메모지를 바라봤다.
삐뚤빼뚤하게 적힌 글씨.
유단이란 두 글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날 죽인 건 유단이며, 사용된 독극물은 펠트신이다.’ 이딴 게…….”
한나벨은 메모지에 적힌 짧은 글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마나 각인이 되어 있다 한들 이런 조잡한 쪽지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아리엘을 노려보며 힘주어 말했다.
“이건 유언장이나 다름없습니다. 의원님도 잘 아실 테죠.”
“공증은?”
“마나 각인이 된 문서는 공증이 필요 없죠. 아시는 걸 계속 물으시니 조금 민망하네요.”
“여러분, 조작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나벨은 학회장 측 의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무마해야 했다.
“학회에 정식으로 검증을 요청할 겁니다. 전 학회장의 각인이 남아 있으니 비교할 수 있겠죠.”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만에 하나 거짓이라면 자리를 빼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텐데.”
한나벨은 아리엘의 눈을 들여다봤다.
타협의 여지가 남아 있다면 이 여자가 회의장을 벗어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
“불명예 퇴임을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불명예 퇴임하면 다시는 선출직에 나설 수 없죠. 더불어 사유재산을 모두 타리움 행정부에 귀속시키겠습니다.”
아리엘의 목소리가 회의장을 내리쳤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의원들이 침묵했다.
“한나벨 의원님.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걸 걸었습니다. 아, 건다는 말은 도박 같아서 좀 그런가요?”
“……무모하군.”
“아니요. 의원님은 이미 판단을 내리셨을 겁니다. 눈앞에 있는 어린년이 이 정도로 대차게 나올 정도면 진실을 손에 쥐고 있다, 그러니 협상을 해야 한다. 그렇죠?”
한나벨은 메모지를 노려봤다. 마음 같아서는 손바닥만 한 저 종이를 잘게 찢어 삼켜버리고 싶었다.
유단 학회장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영생의 비원을 풀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테니까.
“아리엘 의원. 흥분을 가라앉히고 얘기를 합시다.”
“흥분은 제가 아니라 의원님께서 하신 것 같지만, 좋아요. 말씀해 보시죠.”
“그 전에 우리 둘이 잠시 조용히 대화하는 건 어떻겠나?”
한나벨은 뒷짐을 진 후 르용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말보다 진실하고 확실한 해결 수단을 동원할 때였다.
르용이 회의장을 벗어났다. 다행히 아리엘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공개석상에서 비밀 대화를 하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나? 여러분! 잠시 쉬도록 하죠.”
말을 꺼내자마자 아르드헨 측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휴식은 필요 없으니 회의 진행하자고 목소리를 냈다.
“의견이 갈리니 예로부터 전해져 온 방법을 사용하죠. 휴식에 반대하시는 분?”
아르드헨 의원 측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아리엘을 따르는 의원들은 아리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리엘이 별도의 지시를 내리지 앉자 의원들은 손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러면 찬성하시는 분?”
학회장 쪽 의원이 손을 들었다. 중도파인 케스틴이 느지막하게 손을 들어 올리자 다수의 의원이 찬성에 표를 던졌다.
“휴식하시죠.”
씨근덕거리는 아르드헨 쪽 의원을 무시한 채 아리엘와 함께 옆방으로 건너갔다.
“기록관이 없으니 사실만 말해줬으면 하는군.”
“전 회의장에 들어선 후부터 계속 사실만 말하고 있어요.”
“정말 유단이 덴스를 죽인 건가?”
“의원님도 알고 계실 텐데요? 살해 정황이 있었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사건이 미결로 종결됐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유단과 손을 잡기로 한 날, 모든 기록을 살펴봤으니까.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건 루카라는 군 조사관. 빼곡하게 쓰인 사건 기록지 안에 유단이 용의자로 조사받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 증거가 없어 무혐의로 끝.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원미상의 꽃팔이 소녀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었다.
“당시에는 무혐의였네.”
“기록을 보셨군요. 그러면 루카 조사관이 증거불충분이라 써놨던 것도 기억하시겠네요?”
“하지 않았으니 증거가 없지 않겠나.”
“하지만 그 증거가 나와버렸죠.”
한나벨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원하는 게 뭔가?”
“합당한 처벌이죠. 최우선으로 유단 학회장의 신병을 구속하고 그가 진행 중인 모든 프로젝트를 정지시킬 겁니다. 물론 전수조사가 끝난 후에 순차적으로 재시작할 거니 사업적인 측면은 너무 걱정 마세요.”
“자네도 알겠지만, 유단 학회장의 이름은 무겁다네. 섣불리 건드리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패륜아는 사랑받지 못하죠. 게다가 유단 학회장이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건 분배소 때문인데, 사실 분배소와 배터리에 관한 핵심 기술은 모두 덴스 교수의 것이잖아요?”
“…….”
“이게 밝혀지면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할까요? 무엇보다 유단 학회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기술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시민들은 오히려 반길걸요? 정의가 구현된 거니까.”
“유지보수는? 향후 개발은? 그 뛰어난 두뇌를 포기하라는 건가? 자네는 그게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나?”
한나벨은 움켜쥔 주먹을 들어 올리며 확신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살인을 저지른 건 용서받을 수 없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법과 도덕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일어나는 일이야. 자네와 나, 우린 정치가이지 않나?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사명이 우리한테 있지.”
“의외네요.”
아리엘이 진한 미소를 지었다.
“의원님이시라면 이쯤에서 유단 학회장을 포기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견적을 잘 내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그만큼 그의 머리가 아깝다는 걸세.”
“그것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의원님께서 학회장을 이리 감싸시는 이유, 그게 뭔지 궁금해지네요.”
이유.
한나벨은 턱을 쓰다듬으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이건 반대표가 많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아리엘이 개인적으로 발설해 버리면 일이 복잡해지는 건 매한가지고.
한참을 고민한 후에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영원한 삶에 관심이 있나?”
“재미있네요. 유단 학회장도 그런 말을 꺼냈는데. 두 분이 같은 얘기를 한다는 건 뭔가 있다는 뜻이군요.”
“디온 사령관이 살아 있네.”
“……그건 정말 의외네요. 영결식까지 치르신 분이 살아 계시다니.”
“몸은 죽었지. 하지만 정신은 살아 있네.”
“정신이 살아 있어요?”
한나벨은 검지를 세워 머리와 심장을 번갈아 툭툭 건드렸다.
“심상세계를 기계의 안으로 옮겼지.”
“이런 상황에서 농담하실 리는 없고.”
“나도 처음에는 농으로 받아들였네. 하지만 실물을 직접 봤어. 디온 사령관도 만났고. 좀 맹한 느낌이 있긴 했지만, 분명 사령관이었네.”
“그게 영생이라 할 수 있나요? 쇳덩어리 안에서 무엇 하나 할 수 없이 그저 살아가는 게?”
“당연히 아니지. 거기서 끝이라면 누가 그 길을 택하겠나. 하지만 유단 학회장은 그다음을 우리한테 보여줬네.”
한나벨은 빈껍데기가 된 인간 안에 심상세계를 옮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거의 다 왔어. 기술이 완성되면 모두가 꿈꾸던 이상향이 펼쳐지는 거야.”
“몸을 계속 갈아타는 것으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라.”
아리엘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걸 잡아냈다.
흥미가 생긴 것이리라.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라면, 이룬 게 많은 인간이라면 삶에 집착하게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 몸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조건일세. 생각해보게. 죽을 나이가 됐을 때 건강한 몸을 구해 그 안에 내 정신을 심는 거지. 그 후에 양자로 들여오면…… 완벽하게 내 모든 걸 이어받을 수 있네.”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한나벨’이란 인간으로 계속 살아가면 온갖 문제에 봉착하지. 하지만 몸을 갈아탄다면 모든 게 해결돼. 젊은 몸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만끽하며 영원히, 영원히 살아갈 수 있네. 그러다 질리면 죽음을 택하면 되는 거고. 완벽하지 않나?”
“완벽하네요. 괴물이라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없고, 새롭게 변화하는 인간관계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고. 아! 남자의 몸을 구하면 남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 거네요?”
“그렇지. 무엇이든 될 수 있네.”
“그거 정말 흥미롭네요.”
한나벨은 아리엘이 든 노트를 바라봤다. 천천히 손을 뻗으며 말을 건넸다.
“이 건만 덮으면 되네. 착오였다고 말하면 끝날 일이야. 아르드헨 쪽에서 말이 나오겠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하겠나?”
“이 안에 든 메모지만 없으면 완벽해지겠군요.”
“아니지, 증인도 같이 사라져 줘야지.”
노트에 손이 닿기 전, 아리엘은 웃으면서 손을 뺐다. 한나벨은 민망해진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뒤로 물렸다.
“정말 탐나는 제안이었어요. 예전의 저였다면 분명 받아들였을 거예요.”
“……아리엘 의원.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게. 자넨 소수파야.”
“소수가 할 수 있는 일도 있죠.”
아리엘이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저는 한 번의 삶이 중요해서요. 무한히 반복한 어떤 남자의 최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아리엘 의원. 이건 내 부탁이자 마지막 배려일세.”
“배려요?”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다, 강렬한 비명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 그만!”
“안 돼!”
한나벨은 미소를 지었다. 회의장 정리가 시작된 모양이다.
벽 너머 회의장이 다시금 조용해졌다. 아리엘이 닫힌 문을 바라보며 눈을 찌푸렸다.
“험악한 짓을 하시네요.”
“슬슬 의회도 물갈이할 때가 됐지.”
“감당할 수 있겠어요?”
“아르드헨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라면 쉽게 정리할 수 있네. 물론 이 뒤에 각 도시에서 항의가 들어오겠지만, 그 역시 금방 잠잠해질 테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공석이 된 의원석을 탐내는 사람이 많다는 걸.”
한나벨이 다가가 아리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학회장은 이상적인 인물로 남아 있어야 하네. 그래야 연구를 지속할 수 있으니까.”
“안타깝네요. 의원님 정도 되시는 분이 이런 판단을 하시다니. 동시에…… 좀 무섭네요.”
아리엘이 웃음을 지었다.
뭐가 무섭다는 거지?
“시나리오를 네 개 받았어요.”
아리엘이 손목을 빼며 말했다.
“시나리오? 그게 무슨…….”
“제가 말한 증인이요, 그 사람이 말해준 시나리오가 있었어요. 제가 타리움의 정세와 관련된 인물에 대해 말해줬더니, 그 자리에서 작성해 건네준 건데. 하참.”
도리질을 치며 계속 웃는 아리엘이었다.
“이 정도로 들어맞아 버리니 오히려 당황스럽네요. 그 사람은 여러분을 직접 본 적도 없으니까요. 정세만으로 이 정도까지 유추할 수 있다니. 아, 체스말이 된다는 기분이 이런 걸까요?”
“아리엘 의원.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아리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감탄 중인 거예요. 물론 저도 예상은 했죠. 하지만 이런 제안을 받을 거라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당신의 말을 예상했어요. 아니, 이 정도면 예언이 아닐까요?”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한나벨은 쯧 혀를 찬 후 몸을 돌렸다.
“뭐, 이미 끝난 일이니 자네가 뭐라 하든 상관없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욕보이지 않고 깨끗하게 처리해줄 테니 걱정 말게.”
“정이란 게 있었나요?”
끝까지 턱을 빳빳이 세우는 아리엘이었다. 코웃음이 나온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건가?
“들어와서 마저 정리해. 시체는 훼손하지 말고. 예쁘게 꾸며서 땅에 묻어야 하니까.”
문에 대고 말했다.
몇 초가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한나벨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문을 바라봤다.
“뭐 해? 들어와 정리하라니까.”
대답이 없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아니죠. 이렇게 말해야죠. 도마뱀 씨, 수고했어요. 여기 남은 분도 부탁할게요.”
그러자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다.
한나벨은 눈을 부릅뜬 채 바깥에 서 있는 타린족 전사를 바라봤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과 마주하자 몸이 얼어버렸다.
“얼른 정리하고 밥이나 먹어야겠군.”
타린족 전사가 피 묻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