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08화 (508/558)

제508화

“케스틴 의원님. 시간 내 찾아뵈려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한나벨은 케스틴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안 그래도 저번에 손녀분을 만났습니다.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어찌나 좋은지, 참석한 사람들이 다들 인사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죠.”

“재주가 그것뿐이라 걱정이 많았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인사치레가 끝나고 케스틴 의원 옆에 앉았다.

“긴급회의라. 명목상 존재하는 걸 정말로 실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젊은 피가 이래서 부러운 거죠. 저희 나이가 되면 상상만 하지 행동으로 옮기진 못하니까요.”

“아리엘 의원. 피는 못 속인다고 불같은 성정을 이어받았어요.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케스틴이 말끝을 흐렸다.

이 늙은이는 여전하군, 한나벨은 속으로 생각하며 대신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자리 못 가리는 게 아쉽긴 하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 연장자가 잘 돌봐줘야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젊은 친구들은 패기를, 노인들은 지혜를.”

케스틴이 쿠키 하나를 입에 넣은 후 말했다.

“아르드헨 의원 쪽 소식은 들으셨겠죠?”

“예, 듣다마다요. 슬슬 건강 걱정할 나이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안타까운 일이죠.”

“그렇게 정정했던 분이.”

쯧쯧, 혀를 차는 케스틴이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르용, 질리나, 코폰 의원이 들어섰다.

비밀을 공유한 자들. 눈빛을 교환하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정세가 참 매섭군요.”

케스틴이 말을 툭 던졌다.

“그렇습니까?”

“아르드헨 의원은 이 중요한 시기에 자리를 비웠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리엘 의원이 서부의 사자를 데리고 돌아왔죠. 아르드헨 의원만 바라보던 저쪽 양반들은…….”

케스틴이 입을 쭉 내밀며 회의장 구석에 모여 있는 의원들을 가리켰다.

친 아르드헨 쪽 인간들이었다.

“대장을 잃은 들개무리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고.”

“시류가 저쪽 편이 아닌 듯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시류는 누구의 편일까요? 유단 학회장님? 아니면 아리엘 의원님?”

한나벨은 깍지를 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레테. 의원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그걸 모르면 여기 앉아 있을 자격이 없죠. 안 그래도 제 도시에서도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쪽이겠죠?”

“그럼요. 편리함에 속도까지 갖춘 새로운 분배소. 제작설비의 가동률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어요. 관련자들이 좋아서 비명을 지를 정돕니다. 게다가 민간 역시 편의성이 증대됐으니 잡음이 안 나요.”

한나벨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학회장의 작품이죠. 게다가 운영 권한만 학회에 귀속시켰고, 사용료는 저희와 분배를 약속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지금은 시범운영에 시기가 시기인지라 민감한 돈 얘기는 꺼내기 힘드나, 여건이 나아지면 세를 붙일 겁니다. 당연한 것이니 누구도 반발하지 않겠죠.”

이미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시스템이 됐다. 세를 부과한다고 한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합리적인 수준이라면 시민들도 거절하지 않겠죠. 거둬들인 세금으로 편의시설을 늘린다면 오히려 반길 테고.”

“그뿐이겠습니까? 미개척지 개간. 이 원대한 사업에 속도가 붙을 겁니다. 콧대 높은 랍파들을 대동할 필요 없이 마전기를 사용한 탐사도구를 이용하면 위험을 쉽게 피할 수 있죠.”

“하긴, 매의 눈보다는 마법공학의 정밀함이 더 뛰어날 테니까요.”

케스틴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거의 다 넘어온 것 같았다. 중도파의 핵심인 케스틴의 표만 가져오면 지겨운 파벌전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근데 학회에 너무 힘이 쏠리는 게 아닌지, 우려되는군요.”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놓는 케스틴이었다.

늙은이는 정의를 논하는 게 아닐 것이다. 더 내놓으라는 욕심 가득한 언질이리라.

“아시다시피 유단 학회장이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 한 이력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순수한 학자입니다. 이미 확답도 받아놨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의회에 일임하겠다고.”

“순한 양도 침을 흘리며 이를 드러내게 하는 게 권좌입니다. 학회장님 같은 유능한 분께 모든 힘이 집중되면…….”

“걱정하시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원님, 저희가 그걸 몰라서 학회장의 손을 잡았겠습니까?”

한나벨은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디온 사령관이 살아 있습니다.”

케스틴의 흰 눈썹이 꿈틀댔다. 무슨 소리냐며 되묻는 눈빛을 무시한 채 정면을 바라봤다.

참지 못한 케스틴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망자를 욕보이는 건 보기 안 좋습니다, 한나벨 의원.”

“살아 계시는데 어떻게 망자가 됩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나요?”

“의원님. 답을 원하신다면 오늘 회의에서 결의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결의라.”

케스틴이 시선을 내렸다. 주름진 손을 한참이나 바라본 후에 말을 꺼냈다.

“이제 보니 아르드헨 의원을 요양 보낸 건 아리엘 의원이 아니라 유단 학회장인가 보군요.”

“그럴 리가요. 병이 나서 요양 간 분인데.”

입맛을 다시듯 아래턱을 비죽거리던 케스틴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의까지는 아니지만, 흐름을 봐서 말 한마디 정도는 얹어 드리리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대신, 의원님께서 내뱉은 말의 저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그럼요. 응당 그래야죠. 이미 학회장님과 얘기가 끝난 부분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한번 믿어보도록 하죠.”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 문이 열렸다. 아리엘 의원을 주축으로 한 의원들이 장내로 들어섰다.

집결수도와의 화친을 끌어낸 젊은 정치가.

안 그래도 타리움 내에서 발언권이 셌던 여자인데 날개를 단 꼴이 됐다.

하지만 이번 건은 선을 넘었다.

“안건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시하려다가 한번 얘기나 들어보고자 왔습니다.”

르용 의원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리엘과 마찬가지로 옛 중앙군부의 핏줄인 데다가 여자, 거기에 나이대도 비슷했다.

한배를 타지 않았으니 싸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왜 어처구니가 없을까요. 합당한 안건인데.”

“유단 학회장 해임이 합당한 안건인가요? 경우에 따라서는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입니다. 다들 동의하시겠죠?”

르용 의원의 시선을 받은 다른 의원들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바쁘신 분들 모셔두고 딴소리할 수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의제는 말씀드린 대로고, 진행은 제가 맡겠습니다. 다들 귀찮은 관례는 싫어하실 테니 선언은 넘기겠습니다. 괜찮으시겠죠?”

한나벨은 팔짱을 낀 채 아리엘을 바라봤다.

어떤 말이 저 입술을 비집고 나올지 사뭇 기대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회장을 끌어내리는 안건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그림자조차 건들기 힘든 사람을 해임으로 이끌 만한 재료가 과연 존재할까?

설령 있다고 한들 과반수의 찬성이 나오지 않으면 해임 건은 무산된다.

케스틴이 합류한 이상 회의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다.

“무슨 이유로 학회장을 해임해야 하는지, 말씀해 보시죠.”

르용이 양손으로 아리엘을 가리켰다. 마음껏 떠들어 보라는 표정을 곁들여서.

“르용 의원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부당한 행위로 사익을 얻었다면 처벌받아야 마땅하겠죠?”

“원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래야 하죠. 하지만 죄만 바라봐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공적을 살펴야죠. 손톱만 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늘을 가릴 만한 업적을 쌓은 사람을 해코지하면 누가 납득할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은 어느 정도의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살인이라.

한나벨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면서 찻잔에 손을 뻗었다.

사람 목숨은 귀하다. 하지만 귀한 것에도 차등은 있는 법이다.

아리엘이 저리 자신만만하게 나오는 걸 보면, 학회장은 분명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동등하면 손잡고, 강하면 끌어내리고, 약하면 잡아먹는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있었다.

살인죄를 적용해 학회장이란 간판을 잃어버리느니, 덮어주고 다독여줄 인간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살인이라. 아리엘 의원께서는 무서운 말을 입에 담으시네요. 마치 학회장께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을까요?”

“예, 맞습니다.”

“증명할 수 있나요?”

“증인이 있습니다.”

“그래요? 어디 계시죠? 직접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대체 누굴 죽였으며,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아리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 없습니다. 오고 있거든요.”

“아리엘 의원님. 국가적 위기 사태를 잘 마무리하신 거, 저도 인정합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거죠. 기세를 탄 김에 다 정리해 버리고 싶으셨나요? 있지도 않은 증인을 만들어 학회장을 끌어내리시겠다고요?”

“분명 존재하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한나벨은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아낸 후 르용에게 눈짓을 보냈다. 르용이 눈웃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있다고 치자고요. 그럼 말씀해 보시죠. 학회장이 누굴 어떻게 한 건지.”

“피해자는 덴스 교수. 전 학회장입니다.”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다른 의원들 역시 표정을 굳히며 아리엘을 바라봤다.

“지독한 말씀을 하시네요. 누가 누굴요?”

르용이 목소리를 높였다.

“유단 학회장은 지금의 지위를 얻고자 덴스 전 학회장을 독살했습니다. 또한 같은 독극물로 덴스 전 학회장의 딸, 프레나를 코마 상태에 빠트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나아가 전 학회장의 최측근인 오빈 역시 살해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탕, 한나벨은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리엘 의원, 지나치십니다. 여독이 남아 헛소리를 했다고 여길 테니 말씀을 주워 담으시죠. 지금이라면 여기 모이신 분들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아니요, 한나벨 의원님. 저는 아주 멀쩡합니다.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틀린 말은 없으니 주워 담지 않겠습니다.”

“아리엘 의원!”

외치면서도 생각했다.

사실이 아니어야 하지만, 만약 학회장이 전 학회장을 죽였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술김에 시민 하나 죽인 거였다면 무마할 수 있다. 하지만 덴스 전 학회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배소와 마전기의 기틀을 세운 혁신의 상징. 덴스란 이름이 갖는 무게는 현 학회장 못지않았다.

아리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학회에서도 유단 학회장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이다.

“여러분. 친부나 다름없던 분을 독살하고 자리를 이어받은 끔찍한 인간이라는 게 세간에 알려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리엘이 좌중을 둘러봤다. 시선을 받은 의원들이 불편한 기침을 해댔다.

“도시법 개정에 인구 포화 문제로 선거 때 자리가 위태로운 분들이 꽤 많으실 테죠. 이럴 때 사익을 위해 가족을 살해한 학회장을 두둔한다면, 여러분들이 계신 자리는 어떻게 될까요?”

아픈 곳을 찌르는 아리엘이었다.

“표는 무섭습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깔고 뭉개는 시민들이지만, 참정권이 그들 손에 쥐어져 있다는 걸 잊으면 곤란해요.”

“증인이란 자가 증거도 갖고 있나요?”

아르드헨을 따르는 의원 측에서 목소리가 나왔다.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학회를 견제할 수 있다면 아리엘과도 손을 잡고도 남을 놈들이다.

“증인은 멀리 있지만, 증거라면 여기 있어요.”

아리엘이 꺼내든 건 오래된 노트였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치더니 안에서 접힌 메모지를 꺼냈다.

“덴스 교수의 친필입니다. 마나 각인도 돼 있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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