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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507화 (507/558)

제507화

가게 안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더니 우르르 밖으로 몰려 나갔다. 구치와 칼리고도 사람들을 따라갔다.

마을 공터에 우뚝 서 있는 분배소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학회의 상징인 연푸른 띠를 어깨에 감은 여자가 굵은 커넥터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여러분! 지금부터 레테를 가동하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여자가 커넥터를 지하 단자에 꽂아 넣었다. 은은한 마나 파장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이 배터리를 들고 분배소로 다가갔다.

“규격에 맞는 단자에 연결하시면 됩니다. 안전 검사는 끝냈으니 편히 사용하세요.”

구치도 마법등에 쓰는 소형 배터리를 들고 다가갔다. 커넥터가 연결된 충전함에 배터리를 넣고 잠시 기다렸다.

“빠르네.”

기존 분배소와 달리 15분 만에 충전이 끝났다.

“찬란한 인간의 시대네요.”

칼리고가 분배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20년 전만 해도 마법등은 사치품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생활용품이 됐어. 세상은 어떻게 변해가는 걸까?”

“느긋하게 지켜보세요. 어차피 늙지도 않는 몸이니.”

부모와 함께 분배소에 온 어린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왼팔은 의수였다. 축 늘어진 의수에 배터리를 삽입하자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는 손가락을 활짝 펴 부모에게 내보였다. 환한 웃음이 눈에 새겨졌다.

“마법 공학은 위험하죠. 하지만 위험하다고 해서 배척할 수는 없어요.”

칼리고가 말했다.

“일이 터지지 않게 더 신경 써야겠어. 그러고 보니 시장한테서 연락 온 거 없었나?”

“공사다망하신 옛 황제님께선 요즘 워낙 바쁘시거든요. 타리움 정치 구도가 기묘하게 흘러가서 그거 다잡느라고 골치깨나 썩고 있을 거예요.”

“그 양반도 집착이 대단해. 권력의 끝을 맛봤는데도 포기 못 하고 또 도전하고 있으니.”

“맛을 봤으니까 포기 못 하는 거죠. 말이 나온 김에 찾아가 볼까요?”

“둔까지 가려면 두 달은 걸릴 텐데.”

“서두르면 한 달이죠. 잠 좀 줄이면서 뛰면 되니까.”

잡담을 주고받을 때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크족 주술사와 만난 후로 이런 느낌을 종종 받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사고가 터지곤 했다.

구치는 분배소를 바라봤다. 여전히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구치 씨도 저와 비슷한 촉을 느꼈나 보네요.”

“자네도 뭔가 걸리나 보지?”

“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을 대피시키죠.”

칼리고가 학회 관련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던 연구원들이 칼리고가 내보인 넥타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구치는 분배소로 뛰어가는 아이를 슬며시 붙들었다.

“왜요?”

“잠깐만.”

혼자 느낀 거라면 모를까, 칼리고 역시 감지했다면 뭔가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칼리고의 ‘촉’은 믿을 수 있었다. 한때 신이 깃들었던 몸이니 뭔가 달라도 다르겠지.

“시민 여러분, 불편을 끼쳐 정말 죄송합니다. 확인해야 할 사안이 생겨 분배소 가동을 잠시 중단하겠습니다. 큰 문제는 아니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연구원이 큰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뒤로 물릴 때였다.

콰드득, 위험한 소리가 났다.

구치는 고개를 꺾었다. 하늘 높이 솟은 분배소 첨탑이 우그러지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요!”

구치는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길게 뻗은 쇳덩어리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탑을 시작으로 뭉개지더니, 이내 각종 설비가 들어선 주 건물까지 비틀렸다.

사람들이 새된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학회에서 파견된 연구원들은 뒤로 물러서면서도 분배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렬한 마나 파장이 주변을 뒤덮었다. 내성이 없는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쓰러지거나 속에 든 걸 게워냈다.

구치는 인상을 쓰며 곁에 있는 아이를 바라봤다. 다행히 문제는 없어 보였다. 마나가 풍족한 시대에 태어난 신인류. 이 정도 마나 파장은 괜찮은 듯했다.

두두두, 땅이 진동했다. 구치는 근처에 있는 균열로 시선을 던졌다. 폭 50cm의 균열이 점점 벌어지더니 1m 가까이 크기가 확장됐다.

설마?

그라운드 제로가 머리를 스쳐갔다. 균열을 비집고 올라왔던 붉은 뿌리. 참사가 또다시 반복되는 건가?

“……멈춘 건가.”

불안하게 떨리던 땅이 얌전해졌다. 구치는 분배소를 바라봤다. 붕괴가 멈췄다. 건물을 짓누르던 보이지 않는 힘이 사라진 것이다.

“아빠!”

아이가 부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곳곳에서 신음과 울음소리가 났다. 마나 파장에 휩쓸려 기절한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한순간에 마을이 혼란에 빠졌다.

구치는 칼리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칼리고는 학회 연구원을 붙들고 상황을 묻고 있었다.

“저, 저희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현상은 처음이에요.”

“모른다고 끝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대로 설명해 보세요. 그게 당신의 일이에요.”

“그게…….”

칼리고가 얼이 빠진 연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책임 소재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말해봐요. 무얼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머리 굴리지 마시고 아는 대로 말하세요. 지금 그 입으로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따로 알아내면 일이 더 복잡해지니까.”

칼리고가 신분을 밝혔는지, 연구원은 겁에 질린 채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그런 서두 아주 좋아해요.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시작하는 말은 대부분 확실하니까요.”

“설치가 급하게 진행된 감이 있어요. 검사가 모두 끝났다고 했지만, 몇몇 지대에 관한 검사는 무시됐어요. 내부에서도 말이 나왔으나 지금이 아니면 설치가 늦어진다고 해서 강행한 거고요.”

“내부에서도 문제 파악을 한 상태다?”

칼리고가 찌그러진 분배소를 바라봤다.

“이렇게 될 걸 예상했다는 건가요?”

“아니요! 주 건물에 피해가 갈 정도였다면 설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가 파악한 건 기능 약화 정도였어요. 설치를 완료해도 충전 성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 정도였어요.”

칼리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해봐요, 라고 했다.

“저희는 정치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시민 간에 불화가 심각해졌으니까요. 도시인과 비도시인. 둘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면 통제권을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겠죠.”

“그래서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을 분배소를 일단 설치해서 민심을 사로잡자, 이런 건가요?”

“저희는 그렇게 파악했습니다. 실제로 상부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구치는 둘 사이에 끼어든 후 연구원을 바라봤다. 미소를 곁들이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는 거네요?”

“당연하죠! 우리도 목숨이 여러 개인 건 아니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분배소가 가동할 때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학회 연구원들이었으니까.

위험한 걸 알았다면 멀찍이 떨어져서 가동했을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 레테에 관한 걸 잘 알고 계신가요?”

질문을 연이어 던지자 연구원이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다가 칼리고를 바라봤다. 이 사람은 누구인데 이런 질문을 던지느냐, 그런 눈빛이었다.

칼리고가 입을 열었다.

“저를 비롯해 타리움, 아니, 동부의 권력가들과 인연이 깊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사실만 말씀하세요. 이분을 거스르면 정말 큰일 날 겁니다.”

손짓까지 섞어 호들갑을 떠는 칼리고였다.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연구원의 말을 듣는 게 중요했으니까.

연구원이 살짝 겁에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작동 원리야 이전 분배소와 같기에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마전기 전송 파트는 솔직히 학회장님을 제외하고는 이해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핵심 모듈 역시 모두 학회장님께서 제작하신 거고요.”

“핵심 모듈이라. 건물 안에 있겠죠?”

“예? 아, 네. 있습니다.”

“지금 확인할 수 있을까요?”

연구원이 불안한 눈으로 분배소를 바라봤다.

“대충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안으로 들어가는 건 우리가 할 테니.”

“아,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만류하는 다른 연구원들을 뒤로한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시설이 기능을 상실했는지, 마나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겁니다.”

“의외로 작네요.”

“집약률이 대단한 물건이니까요. 학회장님을 제외하고는 만들 수 없습니다.”

2m 크기의 철제 박스였다. 칼리고에게 부탁해 밖으로 옮겼다. 연결된 커넥터를 모두 제거하고 안쪽을 살폈다.

“……뭔지 알아보겠나?”

“구치 씨. 사람 민망하게 자꾸 물어볼 거예요?”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마력선의 향연. 엘리멘트 패널이 층층이 쌓여 있었는데, 몇몇 개가 검게 타들어 가 있었다.

“단순한 사고일까요?”

같이 들여다보고 있는 연구원에게 물었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이쪽이 마나 추출을 담당하는 회로인 건 확실합니다. 근데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죠?”

“과부하가 걸리면 바로 차단되어야 할 시스템인데, 내부적 결함 때문인지 차단되지 않았어요. 밀도가 높아진 마나가 수신부로 일제히 몰려 물리적인 현상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첨탑이 우그러지고, 땅이 흔들린 이유겠군요.”

연구원들이 몰려들었다. 현황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예전에는 사진도 마법사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요즘에는 렌즈 달린 기계로 해결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저한테 맡기시죠.”

칼리고가 모듈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구원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안 됩니다. 학회의 자원이고, 기술 유출의 가능성이 있어 반출은 엄금하고 있어요.”

“강탈당했다고 하세요.”

“예?”

“아르드헨 시장 쪽 사람이 강탈했다고 학회에 보고하세요. 말로만 하면 못 미더우니까 팔 한 쪽씩 부러트려 드릴까요? 그게 좀 아쉬우면 자르는 것도 가능하고.”

연구원은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경직된 눈으로 칼리고를 바라봤다.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아챈 모양이다.

“정식으로 항의서가 갈 겁니다.”

“얼마든지 보내세요. 갈음할 게 몇 개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한데 모여 몇 마디 나누던 연구원들이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며 물러섰다.

“원인을 찾아내려면 이걸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일단 둔으로 가죠.”

칼리고가 상자를 들어 올렸다.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데 이맛살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둔으로?”

“예. 옛 왕립 공학대 소속 연구진들이 둔에 있습니다. 가져다주면 뭐라도 알아내겠죠.”

“해석하지 못한다면?”

“그땐 학회장님과 직접 면담해 봐야죠. 잠깐이지만 뿌리가 반응했어요. 설계상 오류가 있는 거라면 고쳐야죠.”

“곱게 협조해 줄지.”

“학회 내부 자료를 몇 개 갖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해결책이 안 나오면 더럽고 치사하게 가야죠. 자자, 얼른 가죠?”

성큼 앞서가는 칼리고였다. 구치는 칼리고를 향해 외쳤다.

“그거 계속 들고 갈 건가?”

“그렇게 안 무거워요.”

“……나중에 딴소리 말게.”

구치는 한데 모여 있는 연구원들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후 칼리고의 뒤를 쫓아갔다.

* * *

“정말 괜찮은 겁니까?”

마을 대표의 걱정 어린 물음에 연구원은 최대한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기계라는 게 오작동을 피할 순 없죠.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봅니다. 저희가 있을 때 고장 난 거니까요.”

트레일러에서 새로운 모듈을 꺼내 왔다. 송전 첨탑도 금방 재조립해 세울 수 있었다.

남부 설치 일정이 일주일 정도 미뤄지겠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근데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요? 또 문제가 발생하는 건.”

“이번 건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면 우리 모두 밀려날 겁니다, 둔 밖으로요. 다들 알잖아요?”

다른 연구원들을 보며 말했다.

“딱 한 번 일어난 사고입니다. 그렇죠?”

연구원들이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합시다. 그게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고, 또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니까요.”

* * *

아리엘은 책상 위에 놓아둔 통신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유단에게 카트시를 전하고 이틀째. 연락 올 시간이 됐다.

오후 1시.

분침이 숫자 ‘12’ 위를 엇갈려 지나갔으나 통신기는 침묵했다. 일이 틀어진 것이다.

아리엘은 밖으로 나와 비서에게 말했다.

“타리움 전체 회의를 소집해 주세요.”

“전체 회의는…….”

규정을 언급하려는 비서의 입을 손짓으로 막았다.

“긴급이에요. 내용은 유단 학회장 해임 건. 시의회는 내가 직접 갈 테니 각 상인회와 클랜에 전달해 줘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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