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화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그저 여길 잠시…….”
적색 번개가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구치는 멀건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불로의 몸이 된 거지 불사가 된 건 아니니까.
“평화적인 해결책이 싫다면 이쪽도 방법을 바꾸는 수밖에 없어요. 우리 편하고 좋은 말을 놔두고 다른 거 하지 맙시다, 네?”
칼리고가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구치가 손으로 칼리고를 막은 후 고개를 저었다. 어깨를 으쓱거린 칼리고가 검을 늘어트렸다.
구치는 정면을 바라봤다. 사납게 눈을 치켜뜬 청년이 주변을 휙휙 쓸어봤다.
그때마다 ‘틈새’가 요동쳤다.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에요.”
구치가 말했다.
“나가세요. 여긴 허락 받은 자만이 들어올 수 있는 땅입니다.”
청년이 말했다.
“압니다, 알아요. 예전에 마도사에게 얘길 들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퀼비언 씨와 같이 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아요.”
퀼비언이란 이름에 청년의 눈초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자, 여기.”
구치는 품에서 협회의 증표를 꺼내 던졌다. 마도사의 마법이 각인된 증표.
증표를 살펴보던 청년이 천천히 다가왔다.
“당신들을 믿는 게 아닙니다. 마도사와 한 약속을 믿는 거지.”
“그럼요.”
증표를 돌려받았다. 청년이 눈짓을 준 후 발을 굴렀다. 마나와는 또 다른 힘의 파장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구치는 순식간에 멀어지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저게 ‘도깨비의 아이’로군.”
“거친 친구네요. 인간 같지 않은 기세에 힘까지. 퀼 씨가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니 이상한 쪽에서 문제가 터지네요.”
“문제랄 것까지 있나. 저쪽은 저쪽 나름의 법칙을 지키려는 것뿐이지.”
구치는 손목에 찬 밴드를 바라봤다.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던 밴드가 점차 흰색으로 변했다.
“주법(呪法)도 어느 정도 막아주는 것 같네.”
“오크족 주술사께서 주신 거니 효과야 의심할 필요 없죠.”
칼리고와 눈빛을 교환한 후 거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청년이 지키고 있던 거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기인 거 같은데.”
칼리고가 탐지침을 꺼내 땅속 깊숙이 박았다. 침 끝에 달린 작은 유리구슬을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검은색에서 점차 보라색으로 변하는 구슬이었다.
“18분. 활성도에 이상은 없네요.”
칼리고가 수첩을 꺼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잘못된 정보였을까?”
“글쎄요. 일시적으로 활성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는 때도 꽤 있어서, 아직 뭐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네요.”
펜 뒷부분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칼리고였다. 탐지침을 회수하고 거목을 빠져나왔다.
백형(白形) 하나가 이쪽을 주시하다가 틈새 사이로 사라졌다.
“불청객은 빨리 사라져 줘야지.”
칼리고와 함께 숲을 빠져나왔다.
“인위적으로 뿌리를 건드린 것 같지는 않은데.”
“계속 알아봐야죠.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뿌리에 접촉하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찔러보는 게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습성일까?”
“구치 씨의 성격처럼요?”
“이상한 소릴.”
걸음을 잠시 멈추고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활시위를 당기고 감각이 일러주는 곳을 겨누었다.
“…….”
자그마한 마수였다. 감각 기관이 자라지 않았는지, 뱀처럼 땅을 기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구치는 활을 내렸다.
“저 마수가 감동해서 나중에 선물 들고 찾아오겠어요.”
칼리고가 웃으며 말했다.
“여긴 미개척지, 마수의 땅이잖아. 괜히 죽일 필요는 없지.”
“결국에는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올 겁니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자네와 달리 난 생각이 많은 거 딱 질색이니까.”
“저도 단순하게 살고 있어요.”
“말이 되는 소리를.”
숲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는 계속 걸었다. 나흘 정도 걷자 인가가 보였다.
“여기도 어찌어찌 자리를 잡았네요. 미개척지 근처라 얼씬도 못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위대하신 마법 공학의 힘이지.”
구치는 밀려드는 해더 트럭을 바라봤다. 아홉 대의 트럭 뒤쪽에 길쭉한 트레일러가 달려 있었다. 투박한 쇳덩이들이 마을 공터에 쌓여 나갔다.
“저게 그 레테인가? 이런 벽지까지 설치하고, 타리움이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사업답네.”
분주히 움직이는 인부를 바라보다가 근처 식당으로 들어갔다. 허름한 가게지만 사람이 제법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도시에서 왔나?”
주인장이 식은 맥주 두 잔을 내어주며 말했다.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나온 맥주라 멀뚱히 지켜보고 있자 주인장이 씩 웃었다.
“서비스. 오늘같이 좋은 날을 그냥 넘길 수 있나.”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구치는 맥주잔을 들며 물었다.
“좋고말고. 오늘부터 분배소가 정상 가동하게 됐으니까. 한때는 지형이니 마나 밀도니, 문제가 많아서 설치가 안 된다고 했는데…….”
주인장이 밖을 바라봤다.
“개량된 분배소는 그런 거 상관없이 설치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매번 배터리 수급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젠 다 해결된 거지. 도시로 진입하려고 아등바등하던 사람들도 다들 이쪽으로 자리를 옮겼어. 분배소만 있으면 도시 생활 부럽지 않으니까.”
마전기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 없게 된 시기. 도시 인프라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분배소가 마을에 들어서면 생활 환경이 개선될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여유와 웃음이 가득한 것도 이해가 됐다.
“요즘 도시에 정착하는 게 만만치가 않죠?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면 호산브릴일 테고, 거기도 포화 상태라 하던데.”
칼리고가 주인장에게 물었다.
“말도 말아.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 도시 방벽 앞에서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자리가 나면 들어가려고 아등바등, 그러다 싸움이 난 적도 적지 않고.”
주인장이 혀를 찼다.
“거기다 관리소장이 뒷돈 받고 없는 자리를 만들어 팔다가 뒤집힌 일도 있어. 근데 문제는 그 관료 놈을 쳐내는 게 아니라, 돈을 낸 사람들을 쫓아낸 거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재수가 없다면서 퉤, 하고 옆에 침을 뱉는 주인장이었다.
“문제가 많네요.”
칼리고의 눈웃음이 짙어졌다. 구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친구, 또 건수 물었구만.
“많지! 여기뿐인가? 다른 곳도 마찬가지야. 도시 안에 사는 놈들, 지들이 도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릴 개처럼 취급해.”
“개처럼?”
“그렇다니까. 사실 이 마을이 개간된 것도 도시 이주권을 준다는 명목하에 사람들을 쓴 거거든. 근데 막상 마을이 생기고 터를 어느 정도 잡으니까, 도시 놈들이 말을 바꿨어. 여기서 살라고.”
“저런, 못된 새끼들을 봤나.”
칼리고가 쯧쯧 추임새를 넣었다.
“자그마치 800명이었어. 도중에 숫자가 늘어서 1,300명까지 갔고. 여기가 어디야? 느긋한 걸음으로 열흘 정도 가면 나라가 정한 미개척지가 나오는 곳이야. 예전 같았으면 얼씬도 안 했을 척박한 땅이라고. 그런 곳에 이주권을 대가로 사람을 밀어 넣었으면 약속을 지켜야지.”
“하여간 넥타이 매고 다니는 놈들은 죄다 묶어서 흠씬 패야 한다니까요? 입에 거짓말을 달고 살잖아요.”
칼리고가 바 테이블을 탕탕 치면서 말했다. 구치는 칼리고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넥타이를 생각하며 미지근한 맥주를 마셨다.
“에헤이, 됐네, 됐어. 이미 지나간 일이고 분배소도 오늘부터 가동하니까 잘 해결됐지. 얼마 전에 시험 가동했을 때 다들 구경 가서 기도했어. 제발 문제없이 되라고.”
“마전기만 원활하게 공급되면 여기도 훨씬 살 만해지겠죠?”
“물론이지! 기계인형을 들여놓을 수 있고, 레일도 깔아서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도 쉽게 움직일 수 있게 하고. 배터리가 비싸서 창고에 박아두기만 했던 거병도 움직여서 방벽을 쌓을 수도 있지.”
“새로운 분배소를 개발해 낸 둔 학회가 참 고맙네요.”
주인장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내가 둔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소문을 들었는데, 새로운 분배소 레테는 온전히 유단 학회장의 발명품이라더군.”
“우리 구세주님께서 또 한 건 하셨네요.”
“그러게 말이야. 세상이 힘들면 반드시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마스터 아낙스, 유단 학회장. 평생 그 둘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해.”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손님이 잔을 치켜들며 외쳤다.
“학회장님을 위하여!”
“위하여!”
가게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구치는 칼리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눈짓을 줬다. 칼리고도 고개를 짧게 끄덕인 후 주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분배소 시험 가동은 무사히 끝났죠?”
“무사히 끝났으니까 완공하고 가동하지.”
“그, 시험 가동을 언제 했었나요?”
“자세한 날짜는 기억 안 나고 두 달 전쯤인 거 같은데. 왜 그러나?”
“아니요. 제가 사는 마을에도 분배소가 들어올 것 같다고 해서요.”
“이런 외진 곳도 무사히 설치가 끝났어. 자네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될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주인장이 기분이라면서 안주를 내주었다. 구치는 토마토소스 안에 뒹구는 작은 고기를 집어 입에 넣었다.
“두 달 전이면 시기적으로 겹치긴 하는데.”
“마나를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니 뿌리에 영향을 줄 수도 있죠.”
“문제가 될 것 같나?”
“아직 모르죠. 제가 머리가 좋다고 한들 마법 공학에 대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입으로 자기 머리가 좋다고 말하는 건 자제 좀 하지.”
“좋은 걸 어찌합니까?”
으쓱거리는 칼리고였다.
“사실 이것저것 알아봤지?”
“물론 알아봤죠.”
칼리고가 수첩을 들췄다.
“마나를 형질 변환하는 과정에서 폭발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해요. 설비적으로는 안전한데, 외부 충격이 가해지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편의를 위한 위험. 어쩔 수 없는 건가?”
“당장 마전기 공급을 모두 차단하라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차단하라고 한 관료의 목을 시민들이 치겠지.”
칼리고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건 다들 알고 있어요. 마나와 관련된 건데 절대적으로 안전할 수가 없죠. 다만, 마법 공학으로 위험도를 최대한 낮출 뿐이에요.”
“폭발 사고가 있었던 적이 있나?”
“다행히도 아직까진 한 건도 없어요. 안전성은 입증된 거죠.”
“그렇다면 역시 일시적인 현상이었을까.”
뿌리가 미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약한 움직임도 과거 사례가 있다 보니 신경 써서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어. 마치 길리우드가 억제제였던 것처럼 느껴져.”
“구치 씨. 변화는 막을 수 없어요. 결국 신속한 대응만이 길이죠. 이미 마법 공학은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길에 들어섰으니까요.”
“마법 공학이 계속 진보하면 내 몸에 내려진 이 기괴한 현상도 해명되는 걸까?”
구치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안면을 트고 지내던 친구들은 죄다 늙어가는데, 이 몸뚱이는 변함이 없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젊게 살면 좋은 거죠.”
“자넨 걱정되지 않나? 아는 사람들 다 늙어 죽고 혼자 남을 수도 있는데.”
“그때가 돼도 구치 씨랑 저, 랜더 씨가 남을 테니 걱정 없죠.”
“……정말 끔찍한 세상이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