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5화
-날 붙잡아 둬도 소용없어.
카트시가 담담하게 말했다.
유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대비책을 갖춰 놓지도 않고 왔을 리는 없으니까.
“집결 수도가 너한테 많은 걸 약속했나 보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정도로.”
침묵이 길어졌다.
“노선을 바꾼 거야? 침묵은 좋은 방법이 아니야. 대화를 해야 서로 얻을 걸 얻지.”
-미안. 생각 좀 하느라.
“생각 좋지.”
다리를 쭉 뻗으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집결 수도에는 벨틴의 뇌라는 연구 기관이 있다지? 둔 학회처럼 마법 공학을 주축으로 여러 연구를 한다고 들었는데.”
-그래?
“모르는 척하는 건 서로 재미없잖아. 우리 얻을 건 얻자. 첩보 활동 중 어쩔 수 없는 누설이라 하면 그쪽도 참작해 줄 테니.”
집결 수도에도 유능한 공학도가 있는 듯했다. 잠든 카트시를 깨운 것도 모자라 회유까지 했으니까. 아니, 어쩌면 카트시가 유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카트시는 집결 수도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걸까. 독립된 지성체로 대접을 받고 있을까, 아니면 이용하기 편한 기계로 취급받고 있을까.
-말해주고 싶어도 아는 게 없으니 말해줄 수가 없네. 벨틴의 뇌라는 단체도 네 입을 통해 처음 들었어.
“거짓말치고는 너무 궁색해서 거짓말 같지가 않네.”
-사실이니까. 난 집결 수도의 사정을 몰라. 그곳에서 뭘 준비하는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고.
“잊은 거 같은데, 넌 우호의 표시로 나한테 보내진 선물이야. 집결 수도에서 보낸 선물. 집결 수도에 대해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한데.”
-레퍼토리를 여러 개 준비하긴 했어. 하지만 준비하면서도 써먹을 수 없을 거라 예상했지. 왜냐하면 넌 우수하니까. 미니 비트에 관한 것도 금방 알아차릴 줄 알았어.
“미니 비트? 그게 네가 보낸 신호 전달 체계의 이름이야?”
-맞아. 연결망하고 꽤 닮았지?
“줄의 연결망 구조를 인간한테 전했구나? 그걸 구현할 정도의 기술이 집결 수도에 있는 거고. 놀라운 일이네.”
유단은 즐겁게 미소 지었다. 집결 수도가 장거리 통신 체계를 구축했나.
동부의 수뇌부가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일이었으나, 유단은 순수하게 기술적 진보에 감탄하고 넘겼다.
대륙의 정치 구도 같은 건 관심 밖이었다. 계획에 불필요한 요소니까.
-오류는 잡고 가야지. 아까도 말했지만 난 집결 수도와 관계가 없어. 두 번째. 미니 비트는 연결망에 착안해 만들어진 게 맞지만, 내가 따로 도운 건 없어. 그 친구가 알아서 설계한 거니까.
“그 친구?”
-다행스럽게 나한테도 친구가 생겼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의도가 명확하지 않으니 정보를 선별할 수가 없었다.
“여기 온 목적이 뭐야? 기술 유출? 아니면 감시?”
-솔직하게 말해줄까?
“솔직한 건 언제나 좋지.”
-네 마음을 확인하려고 왔어. 그리고 방금 그 마음을 확인했지. 넌 변할 생각도, 멈출 생각도 없는, 예전과 똑같은 상태라는 걸.
“조금은 변했어. 취향이란 것도 생겼고.”
-그 취향을 맞춰주면 계획이 변경될까? 뭘 원해? 원하는 걸 말해봐.
“줄리어스. 그게 다야. 몇 번을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갈 거고.”
-그래, 넌 그런 애지. 평행선을 달리는구나, 우린.
“아쉬운 일이네.”
유단은 카트시를 데리고 지하로 돌아갔다.
“네가 발산하는 신호는 모두 차단해 뒀어. 너한테 이상이 생겼다는 걸 그 친구가 알기까지 며칠이나 걸릴까?”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내일이면 집결 수도에서 기술팀이 출발하는 걸까? 선물을 돌려받으려고?”
-아니. 당장은 아무것도 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준비가 끝나면 그 친구가 널 찾아오겠지.
“타리움의 핵심 도시, 이곳 둔까지 올 수 있을까? 기펠 원로라 해도 멋대로 돌아다닐 수 없을 텐데.”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 그러니 같이 기다려 보자고.
운동 능력이 없는 유사 정령을 적진으로 보낸 이유.
마음을 알기 위해서라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 말고 진의를 파악해야 했다.
집결 수도는 정말로 전쟁을 준비하는 중일까? 오라클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카트시를 파견한 걸까?
겉으로는 화친을 주장하고 뒤로는 전쟁을 준비하는 건 질리도록 반복된 역사였다.
기펠 최고 원로가 사절단과 함께 둔으로 들어온 것 역시 전쟁 준비의 일환인 걸까?
“카트시. 나한테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 내 일이 끝나면 그 뒤는 알 바 아니야. 전쟁하든, 학살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마무리 단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곤란해.”
체시를 바라봤다.
준비가 끝났는지 천장에서 내려온 기계 팔들이 카트시의 상단에 위치했다.
-카트시. 개인적인 원한 같은 건 없어.
체시가 말한 후 까르르 웃었다.
-이 말 해보고 싶었어. 진부한 연극 대사지만 난 이게 좋거든.
카트시의 코어를 기계 팔이 붙잡았다. 유단은 뒤로 물러섰다.
-청소해 주게?
-원하면 작업이 끝난 후에 해줄게.
그라인더가 맹렬한 소리를 내며 코어에 닿았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내부 회로를 살짝만 들여다볼게. 사소한 오류가 생길 수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작업이 끝나고 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카트시, 너도 그걸 원하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네.
회전하던 날이 우뚝 멈춰 섰다. 붉게 달아오른 베어링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체시가 기계 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유단, 이거 상태가 이상한데? 청철도 못 자르고 있잖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라인더에 다가가 날과 접합부를 살폈다. 미세하게 세워둔 날이 죄다 뭉개졌다. 회전축은 녹아버린 베어링과 엉켜 다시 쓸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유단은 카트시의 본체를 바라봤다. 갈려 나간 청철 사이로 다른 게 보였다.
-잠깐만. 이게 뭐야?
체시의 기계 안구가 카트시의 코어를 살폈다.
-청철 안쪽에 다른 금속이 있잖아? 설계 구조상 이런 게 있으면 안 되는데.
줄이 만든 유사 정령의 구조는 체시가 완벽하게 꿰고 있었다.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동지들을 해부할 때 내부 구조가 어땠는지, 전부 확인했다고 말했다.
-잠깐만.
체시가 작은 기계 팔을 움직였다. 고장 난 그라인더를 떼어내고 새것으로 교체했다.
다시금 불꽃이 퍼져나갔다. 유단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소음이 멎는 순간 카트시를 확인했다.
-청철의 두께는 0.4cm. 그 밑으로는 정체불명의 금속으로 돼 있어.
유단은 네크룸으로 만든 핀을 쥐었다. 청철 안쪽에 있는 탁한 은빛의 금속을 핀으로 긁었다.
“보여?”
-확인했어. 네크룸 핀으로 안 긁히는 거 보면 경도가 계측 범위 밖이라는 거네.
그라인더에 사용된 날도 배합철. 거병 외장갑에 주로 쓰이는 것이다.
어지간한 물질은 가볍게 잘라낼 텐데, 카트시의 본체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
강도가 어느 정도일지 예측조차 되지 않았다.
“집결 수도에서 희한한 몸을 만들어 줬구나.”
-나를 집결 수도와 연관 짓는 건 이해해. 하지만 몇 번을 말했듯 난 그쪽과 아무 상관 없어.
“그러면 이 코어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줄이 제작할 당시에는 모두 청철로 만들어졌어. 이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고.”
-너희는 그랬겠지.
너희는.
많은 걸 내포한 단어였다. 유단은 체시를 바라봤다.
-이쪽 선반 말고 안쪽 실험실에서 확인해 볼게.
천장에서 내려온 기계 팔이 카트시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맞은편 방으로 옮겨졌다.
차폐벽 안쪽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유단은 커피를 내리고 생각에 잠겼다. 처음 보는 금속이었다. 벨솔 연구회에서 다루는 특수한 액상 근육만큼이나 이질적인 물체였다.
집결 수도의 주조 기술은 타리움을 상회하는 것인가? 아니면 신인류의 마법으로 만들어낸 새로운 물질인가?
“카트시가 사실만 말한 거라면…….”
집결 수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카트시를 일깨운 자는 누구인가?
국가가 아닌 정말 개인이 장거리 통신 체계를 완성했다는 건가?
거기에 ‘너희들’이란 말.
카트시는 다르게 제작된 것일까?
유단은 망가진 그라인더를 바라봤다.
나타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련 기술이 발달했다. 배합술도 진일보해 강도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배합철이 생산되고 있었다.
현시대가 창조해 낸 그라인더의 날을 과거의 무른 쇠가 튕겨내는 건 불가능하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나타의 마법 공학은 분명 뛰어났으나 원물을 다루는 기술, 금속을 주무르는 기술은 현시대가 월등히 앞서나갔다.
카트시의 본체는 집결 수도에서 재창조됐다고 봐야 했다. 그게 아니라 정말 과거에 만들어진 거라면…….
실험실 문이 열렸다. 유증기와 함께 기계 팔이 빠져나왔다.
-유단, 좀 난감하게 됐어.
체시가 카트시의 코어를 내보였다. 겉면을 둘러싼 청철이 모두 벗겨진 상태였다.
탁한 은빛으로 만들어진 코어.
표면을 살폈다. 마력선이 새겨져 있어야 하는 표면이 매끈했다.
손으로 만져봤다.
-간지러워.
카트시가 웃으면서 말했다.
부드러운 질감이었다. 쇠의 느낌이 아니었다. 단단한 고무 같았다. 누르면 살짝 들어갈 것처럼 보이나, 막상 눌러보면 일그러짐 없이 형태를 유지했다.
-강산을 붓고, 용로에 넣고, 국소점 충격 전달까지 해봤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
용로 안에서도 형태를 유지했다?
유단은 카트시의 코어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이건 줄의 작품이 아니야.”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집결 수도의 작품도 아니지.”
용로에 넣어도 형질이 바뀌지 않는 쇠 안에 회로를 심어 에고를 옮겨 넣는다?
그런 기술이 있었다면 오래전 대륙 통일을 이뤄냈을 것이다.
“너와 함께하는 그 친구가 왜 나한테 관심을 갖는 거지? 네가 말했잖아. 내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이제는 내 말을 믿는 거야?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가 내 눈앞에 있으니까.”
-그 친구는 말이야, 너의 오래된 친구야.
한쪽 눈이 씰룩거렸다. 인간적인 감정이 외부로 표출되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수수께끼는 그만하고 싶은데.”
-난 수수께끼를 한 적 없어. 로키, 난 말이야 사실만 말하고 있어. 널 위해서 말이야.
“그 친구는 내가 가만히 있기를 원하는 거고?”
-그랬지. 근데 이미 늦어버렸어. 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유단은 카트시를 내려놓은 후 체시를 바라봤다.
“체시.”
-준비할까?
“아무래도 앞당겨야겠어. 그리고 아잔탄스 쪽도.”
-전쟁은 화려한 게 좋지. 기대되네. 얼마나 화려하게 서로를 죽일지. 비명을 많이 질러줬으면 좋겠어. 난 소리에 자극을 좀 더 받으니까.
기계인형이 움직였다.
유단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두 개도 돼.
“왜 확인하러 온 거지? 날 억제할 생각이었다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나았을 텐데.”
-네가 인간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으니까. 널 처단할 명분도 없고, 조용히 죽이면 그 혼란을 감당하기도 힘들어. 그러니 널 살려두는 편이 가장 좋다고 판단했어.
“사회와 관계. 참 인간다운 발상이야.”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이지. 너한테도 그게 있지 않아?
“있어. 분명 존재해.”
-대상이 줄리어스에게 한정돼 있을 뿐?
유단은 외투를 챙겼다.
“당분간 못 올 거야. 바빠질 거 같거든.”
-얌전히 있어 주면 안 될까? 물질 생성. 그건 이론만 들어도 너무 위험해 보이는데.
개인실 불을 모두 껐다. 어둠에 잠긴 카트시의 코어가 은은한 빛을 뿌렸다.
“말했지? 나한테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서두르면 좋을 게 없지만, 아무래도 좀 앞당겨야 할 것 같아.”
-과격한 수단은 좋지 않아.
“평화롭게 해결할 거야.”
-체시는 전쟁이라고 말하던데.
“옵션 중 하나. 그러니 네 친구가 날 방해하지 않길 기도해 줘. 전쟁은 싫잖아?”
유단은 카트시에게 손을 흔든 후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