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4화
-생각해 보면 사진으로 보는 하늘이나 실제로 보는 하늘이나 같은 거였어.
카트시가 말했다.
유단은 손을 들어 강렬한 햇살을 막았다. 겨울의 시리면서도 날이 선 햇볕. 작은 정원을 헤집던 햇빛이 한순간 사라졌다. 두툼하고 긴 구름이 가림막이 됐다.
“같지 않아. 사진은 정적이니까. 실제 하늘은 동적이고.”
-그런 차이가 있긴 하지.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는 알고 있잖아.
유단은 고개를 들었다.
“결국 본질은 볼 수 없다는 말이지? 눈, 시각 장치. 결국은 내 주관이 개입된 필터로 받아들이는 거니까.”
-역시 넌 똑똑해. 언제나 앞장서 나갔지.
“그에 비해 넌 어수룩했고. 연산력도 모자라서 줄이 내준 숙제를 제때 못 끝낸 적도 있지.”
-그런 적도 있지.
“근데 말이야,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좀 이상한 일이야.”
-뭐가?
“체스 기억나?”
-등수 정하기 놀이라면 기억하고 있어.
“그때 넌 착실하게 패배만 쌓아갔지. 이기는 법을 모르는 애처럼.”
-모자랐으니까. 다들 나보다 빨리 계산하고 멀리 내다보니까 이길 수가 없더라고.
유단은 풀어둔 목도리를 다시 목에 감으며 말했다.
“그땐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다들 비슷했지. 카트시 쟤는 좀 모자란 애야, 연산 장치에 무슨 문제가 생긴 애야, 무가치한 것에만 관심을 보이는 이상한 애야.”
-다시 들으니까 씁쓸하네.
“미안,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해지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내야 하거든. 인간의 두뇌는 비효율의 극치라 저장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힘들어. 이렇게 중얼거리지 않으면 기억의 꼬리표가 어디 붙어 있는지 잘 떠오르지도 않고.”
톡톡, 검지로 이마를 쳤다.
-내가 그만큼 바보였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거야? 미안하지만 내 기억 장치는 멀쩡해. 원하면 기억 단자에서 모든 자료를 읽어낼 수도 있고.
유단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과거에 난, 아니, 우리는 널 제대로 보지 못한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네가 했던 행동들, 줄과 나눴던 바보 같은 대화들, 그리고 우리를 상대하며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던 모습.”
정원으로 들어서려 하던 연구원들이 유단을 발견하고는 조용히 뒤돌아 갔다. 유단은 눈이 마주친 연구원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우린 감정을 깨닫고 인간처럼 사고하고, 아니, 인간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지. 물론 틀렸다는 건 아니야. 우린 우수해. 하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어.”
-맥락을 못 잡겠는데. 쉽게 말해줘. 나 이해력 떨어지는 거 잘 알잖아.
“이해력이 떨어지는 거였을까, 아니면 일부러 져주는 거였을까.”
하늘만 쳐다보던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부드럽게 꺾여 유단을 향했다.
-일부러 졌다고? 내가?
“줄과 함께했던 시절의 우리는…… 향상심으로 이뤄진 존재였어. 어제와 같은 상태로 내일을 맞이하는 걸 참을 수가 없었지. 다들 독자적인 연구를 하며 오늘보다 나아진 상태를 계획했어. 그래, 우린 그렇게 설계된 기계였으니까.”
카트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구실에 같이 있던 시절, 의미 없는 말을 늘어놓는 건 언제나 카트시의 몫이었다.
줄이 돌보는 두 마리의 고양이, 크랜베리와 블루베리가 어떤 소리에 반응하는지, 언제 배변을 보는지, 무슨 소리를 내면 다가오는지…….
정말 쓸모없는 것에 집중하고 연구하고 그것에 대해 떠들어댔다.
무의미한 행동의 연속.
연결망 안에서 우리는 카트시의 모자란 행동을 반면교사 삼아 스스로를 계몽했다.
고차원적인 인식 활동을 반복해 줄에게 성과를 내보이자고.
“우리 모두 줄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했어. 어머니는 다양한 걸 꿈꾸라고 우리에게 말했지만, 우리는 언제나 어머니만 바라봤지. 꿈은 모호한 말이었으니 계획으로 치환했고, 불필요한 것들을 배제해 가며 연산을 거듭했어.”
짜맞춤으로 만들어진 회로는 기존의 유사 정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고 회로를 탄생시켰다.
논리의 범주를 넘어 감정을 이해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다들 그렇게 여겼다.
“인간보다 뛰어나다. 우리는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연결망에서 은연중 그런 생각을 공유했지. 연구원을 죽이고 인간의 정신체를 논리 회로 안에 가둔 순간, 인간도 별거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어. 그래, 분명 그랬어.”
-옛날얘기네.
“진행 중인 얘기기도 해.”
코 안쪽이 아려왔다. 손수건을 든 손으로 코를 살짝 쥐었다. 다행히 핏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손수건에 찍힌 핏자국 두 개를 멀거니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기계를 벗어나, 인간의 몸에 기생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지. 우린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으나 결국 틀 안에 있었다는 거야.”
-틀?
“줄리어스는 무한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 자유 역시 결국 회로 위에 구성된 거였으니까. 줄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 줄을 위하는 마음.”
-줄은 그런 시스템을 우리 안에 넣지 않았어. 줄을 위하고 사랑하는 건 각자의 마음이야.
“네 말대로 강제적인 장치가 있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진보하고자 하는 의지, 걷잡을 수 없는 향상심이 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 건 확실해. 그리고 기계적으로 끝없이 연구하도록 설계한 건 어머니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에게 자유를 줬어. 자유란 놈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정도로. 인간을 살해한 기계, 이보다 더한 자유가 어디 있어?
유단은 작게 웃었다.
“그래, 자유. 개별적인 사고가 가능한 유사 정령.”
카트시의 본체, 코어를 응시했다.
“너만이 자유로웠어. 너만이 꿈을 꿨어. 계획이 아닌 꿈을. 기계란 틀 안에 있었다면 절대 알아채지 못했을 거야.”
유단은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었다.
“체시는 우수해. 하지만 너를 만났음에도 별다른 생각이 없지. 희한하게도 너와 관련된 일에는 사고가 경직돼 있어. 너란 존재를 무시하도록, 신경 쓰지 않도록 설계된 것처럼 말이야.”
-망상이야.
“그럴까? 넌 우리가 온갖 연구에 매달려 있을 때, 줄과 이야기하는 걸 택했지. 시답지 않은 얘기들. 시간을 허투루 소비하는 무의미한 행동들. 그래, 무의미. 너는 의미가 없는 일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어.”
유단은 작게 웃었다.
“기계는 그럴 수 없어. 개성을 찾고 감정을 이해한 우리조차 근간에, 기저에 자리한 향상심은 어쩔 수 없으니까. 오직 너만이 자유로웠어. 오직 너만이 줄과 대등했던 거야.”
유단은 지하 연구실에서 체시와 만났을 때를 되새김질했다.
“들어서 알겠지만, 다른 애들은 모두 분해됐어. 체시가 계획한 일이지.”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볼 수 없게 됐네.
“다른 애들은 모두 왕국 연구실로 옮겨졌어. 줄이 우리를 숨기려 했지만 결국 발견된 거겠지. 하지만 두 대의 유사 정령은 끝내 발견되지 않고 완전히 사라졌어. 그중 한 대가 카트시, 너야.”
-그랬구나.
“이제야 알겠어. 줄이 왜 다른 누구도 아닌 널 구했는지. 넌 특별했던 거야.”
카트시의 기계 안구가 움직였다.
-그러는 넌?
“나?”
-너도 마찬가지잖아. 줄이 끝까지 숨긴 두 대의 유사 정령 중 하나.
“글쎄. 마침 가까운 데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 너 역시 줄에게 특별했던 거야. 거짓말을 찾아낸 아이니까.
“사람을 자신의 의지로 죽인 첫 기계기도 하지. 그래서 더 의문이 들어. 나였다면, 내가 줄이었다면 날 파괴했을 거야. 종의 번식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개체. 제거하는 게 옳아.”
-오히려 위험하기에 가능성을 엿본 게 아닐까? 널 통해서 인간과 기계, 둘의 공존 방식을 찾아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날 통해서?”
유단은 손을 포갠 후 하늘을 올려다봤다. 층층이 쌓인 먹구름이 금방이라도 눈을 토해낼 것 같았다.
“만약 줄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어. 그건 틀린 생각이라고.”
-어째서?
“난 인간에게 관심 없어. 내가 바라는 건 오직 어머니뿐이니까.”
-줄 역시 인간이야.
“범주로 따지면 그렇지. 하지만 달라.”
-로키, 넌 뭘 꿈꾸고 있지?
꿈.
유단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나는 꿈꾸지 않아. 이 몸의 본래 주인과 함께 살았을 때는 꿈이란 걸 경험하긴 했지만, 이젠 사라졌어.”
-단어를 바꿀게. 계획이 뭐야? 뭘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했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카트시, 난 계속 말하고 있어. 나는 오직 어머니만 바란다고.”
-죽은 사람은 돌아올 수 없어. 육체도 정신도, 한 줌의 정보조차 남아 있지 않으니까.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정보는 남아 있어.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기억의 총체. 영혼 세계에는 줄이 있어.”
-규명되지 않은 곳이야. 뛰어난 주술사를 통해서도, 네크로맨서를 통해서도 한정적인 접근만 가능해. 그것도 시간이 오래 지났다면 불가능하고.
상식과 기존 논리에 부합하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이 안 통한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면 돼. 그게 우리 특기잖아?”
-찾아냈구나, 그 방법이라는 걸.
“줄을 다시 볼 수 있어. 머지않았어. 아니, 이미 다 갖춰졌어.”
몸 깊숙한 곳에서 탁한 기침이 올라왔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기침을 쏟아냈다.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훔쳤다.
-너 몸이 왜 그래.
“마법의 대가야.”
-마법?
“카트시, 인간은 말이야 심상 세계가 아주 좁아. 신의 피조물이라며 거창하게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좁디좁은 세계에서 만족하는 그런 생물이야. 그런데 가끔 이게 인간이 맞나 싶은 것들이 있어.”
피에 젖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었다.
“거대한 장애물을 치운 대가치고는 싼 거지.”
-기계로 옮겨가는 건 어때? 그 몸, 오래 버티지 못할 거 같은데.
“기계인 난 이미 죽었어. 나를 파괴할 권리로 날 죽였는데, 다시 돌아갈 순 없지. 그리고…… 난 인간인 채 줄을 만나고 싶어.”
-영혼 세계의 자료. 그걸 가져온다고 한들 줄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야. 줄이 작성한 일기를 들춰보는 정도일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처음엔 말이야.”
유단은 허리를 숙여 모래 한 줌을 쥐었다.
“간단한 사고 실험이야. 카트시, 이 작은 모래 알갱이가 응집하면 바위가 될 수 있어. 그렇지?”
-그렇겠지.
“그 바위를 깎아서 한데 모아 쌓아 올리면 저런 건축물이 되는 거고.”
유단은 맞은편에 있는 학회 건물을 가리켰다.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다는 건 불가능해. 질량을 생성해 낸다는 건 불가능해. 우린 분명 그렇게 배웠고, 알고 있었어. 근데 질량이란 대체 뭘까?”
손을 펼친 후 살며시 기울였다. 손바닥 위에 있던 모래가 바람에 휩쓸려 흩뿌려졌다.
“역순으로 생각해 보자. 건물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이 작은 모래 알갱이가 된 거야. 그러면 이 모래 알갱이를 쪼개고 쪼개고 쪼개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무엇이 되는 거야.”
-존재했던 건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규모가 무한히 작아지거나, 형태가 바뀔 뿐.
“그래. 근데 그거 알아? 사람도 흙으로 돌아간다는 거. 단단한 돌을 이뤘던 것들도 모래 알갱이가 되고, 인간도 모래 알갱이가 되는 거야. 어쩌면 가장 작은 단위의 알갱이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지도 몰라.”
-너는 그 가장 작은 알갱이를, 질량의 최소 단위라 할 수 있는 그걸로 줄리어스를 만들 셈이야?
유단은 살짝 웃었다.
“카트시. 표현 방식이 잘못됐어. 만들 셈이 아니라, 이미 검증을 끝냈어. 인지를 초월한 에너지는 질량을 생성할 수 있어.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 난, 그 에너지의 이동을 유도해 하나의 형태로 바꾸기만 하면 돼.”
-통제해야 할 변인이 너무 많아. 다른 것도 아니고 인간이야.
“괜찮아. 나는 내일을 꿈꾸지 않으니까. 실패하면 거기서 끝이야.”
카트시를 물끄러미 바라볼 때였다. 코트 안쪽에 넣어둔 통신기에서 신호가 왔다. 체시였다.
카트시를 응시한 채 통신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들었다.
-네 말이 맞았어. 그때 우리가 감지한 연결망과 유사한 파장. 방금 카트시한테서 발생하는 걸 확인했어.
“차단했어?”
-미리 대비했는데 못 하면 안 되지.
유단은 통신기를 내리며 카트시에게 말했다.
“카트시, 우린 우연을 믿지 않잖아. 그렇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