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3화
“여독이 덜 풀리셨을 텐데.”
“쉬면 뭐 하나요, 일해야지.”
아리엘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푹 쉬고 싶었지만, 어느 분께서 일을 잔뜩 벌여놓으신 터라 그럴 수 없게 됐네요. 타국에 다녀온 저보다 학회장님이 더 바쁘셨겠어요. 의원들 포섭에 레테 사업 진행까지.”
“저도 쉬는 걸 즐기지 않아서.”
커피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설탕은 안 넣으시죠?”
“예.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아리엘이 잔을 들고 단숨에 커피를 마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입에 털어 넣고 나서야 잔을 내려놓았다.
“천천히 드시지.”
유단은 입가에 미소를 걸며 말했다.
“저도 바삐 움직여야 해서요. 자리를 오래 비웠더니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이네요.”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검사 끝났으면 들여보내 주시죠. 멀리서 가져온 선물인데.”
비서가 낑낑거리며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목함이었다.
“이게 뭡니까?”
유단은 나무 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집결 수도에서 보내온 화친의 증거라고나 할까요? 학회장님께 보내는 선물인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네요. 그쪽 연구회에서 소중히 간직해 온 골동품이래요. 자세한 건 모르겠고.”
“선물이라.”
아리엘이 픽 웃었다.
“타리움의 수뇌부에게 전부 선물이 갔어요. 본의 아니게 제가 배달을 맡게 됐고요. 성의를 담아 보낸 물건인데 아랫사람 시키면 모양새가 안 난다나 뭐라나.”
아리엘이 시계를 슬쩍 확인했다.
“전할 물건 전했고, 학회장님 얼굴도 봤으니 그만 가 봐야겠네요. 아, 그나저나 어디 편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요 며칠 골방에 틀어박혀 프로젝트 준비를 했더니 조금 피곤하군요.”
“피곤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을병을 앓게 되면 그때 알려드릴 테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세요.”
“말씀을 무섭게 하시네요. 타리움의 기둥이신 학회장님께서 편찮으시면 안 되죠. 건강하세요, 제발 부탁드릴 테니.”
문을 조용히 열고 발을 바깥으로 반쯤 내밀었던 아리엘이 다시 몸을 돌렸다.
“한 가지만, 아니, 질문할 게 두 개 더 있는데.”
“서서 말씀하지 마시고 앉으시죠.”
“괜찮아요. 아무튼 첫 번째 질문. 아르드헨 시장을 어떻게 한 거죠?”
유단은 살짝 고개를 저은 후 잔을 들었다.
“건강이 악화했다는 소식을 아직 못 들으셨나 봅니다.”
“아니요. 둔에 도착하자마자 정리된 보고서를 받았어요. 더더욱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 아르드헨이 자기 건강 상태를 관리 못 한다? 듣기만 해도 어이가 없어서 우습지 않나요?”
“아르드헨 의원님도 사람이니까요. 병이란 게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아는 아르드헨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병도 살뜰하게 쳐낼 사람인데, 뭐…… 운이 없었나 보네요.”
“운이 없다, 예.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겠군요.”
아리엘이 백방으로 알아본다고 해도 사실은커녕 진실의 조각조차 찾아내지 못하리라.
문제 될 것들은 아르드헨 본인이 직접 정리한 후 도시를 나갔을 테니까.
성가신 상대이기에 되레 믿을 수 있었다.
“그렇다 치죠. 그럼 두 번째. 의원들이 레테 사업에 아주 적극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더라고요. 반대 측은 아르드헨의 부재로 인해 손도 써보지 못했고요.”
“국가사업이 마찰 없이 진행되면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이로써 분배소 설치가 어려웠던 도시 외곽지도 마전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정말 다행인 일이죠.”
“사업이 표면만으로 해석할 수 있나요. 동대륙 전역의 마전기, 마나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아리엘 의원님.”
유단은 코끝을 매만진 후 말했다.
“저와 마법 공학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신 거라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단, 실용적인 대화였으면 하네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마법 공학을 마냥 두려워하죠. 실생활에 적용된 마법 공학을 누리면서도 마법 공학 개발에 앞장서는 지성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눈이 살포시 쌓인 건물 지붕 너머로 우뚝 솟은 분배소가 보였다.
“그리도 걱정되고 의심이 된다면, 좋습니다. 깨끗하게 가보죠. 현 시간부로 학회가 통제 중인 모든 분배소의 작동을 중단하겠습니다. 타 도시의 분배소 역시 순차적으로 기능이 정지하겠죠.”
유단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마나등이 꺼지며 옅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리엘 의원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야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편해지겠죠. 유지 보수 때마다 온갖 민원이 학회로 밀려듭니다. 행정처에서는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죠. 실질적인 관리는 우리 소관이니까요. 그러니 편해지겠습니다. 모든 관리 책임을 그쪽으로 넘기도록 하죠.”
“그런 식으로 의원들을 협박했나요?”
“협박? 하하,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리엘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요. 협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인간들이었다면 타리움 내에서 버틸 수 없었겠죠. 학회장님께선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제안하셨나 보네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상용 가능한 어떤 기술에 대해 논의했을 뿐이죠.”
“그래요? 늙은 의원들이 탐내는 건 건강뿐일 텐데. 뭐, 영생이라도 약속하셨나요?”
유단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아리엘 의원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영원한 삶. 매력적이죠. 우리는 언제나 불가능을 갈망하잖아요?”
“그렇다면 상상을 진지하게 해보시죠. 영원한 삶을 살게 되면 어떻게 될지.”
“방법이 있나 보네요.”
고개를 내저으며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요. 영생은 어디까지나 공상의 산물이죠.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 마음껏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상상.”
팔짱을 낀 아리엘이 고개를 삐딱하게 숙였다.
“저는 순리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신화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영생을 꿈꾼 자가, 시간을 되돌리려고 발버둥 친 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신화는 교훈을 위한 수단일 뿐이죠. 현실은 다릅니다. 마법 공학이 지금의 발전 속도를 유지하면 향후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죠.”
“그래요? 그러면 이런 나약한 몸에서 벗어나 강철과도 같은 몸을 얻게 되는 것도 가능한가요?”
“언젠가는 이뤄지리라 믿습니다.”
“그렇군요. 모두가 강철로 된 몸을 얻게 되면, 그땐 피육으로 된 인간이 고귀함의 상징이 될 수도 있겠네요?”
“문화의 변화까지는 예측할 수 없죠. 저는 어디까지나 기술을 얘기하는 거니까요.”
아리엘이 빙긋 웃었다.
“흥미로운 얘기 잘 들었어요. 학회장님과 대화하는 건 쓸모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제 착각이었네요. 나중에 또 뵙죠. 영생에 관해서도 차분히 얘기해 보도록 해요.”
“언제든 찾아오세요. 기쁜 마음으로 환영할 테니.”
아리엘은 “분배소는 잘 운영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났다.
-포섭할 가치는 있어.
“아니, 이미 레테는 활성화되기 시작했어. 적당한 선에서 관심만 다른 곳으로 돌리면 돼.”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아리엘의 말대로 창백했다.
-도자기라도 보냈나? 명인이라 불리는 도공은 죄다 서부에 있다고 하니.
“글쎄.”
목함 덮개를 열었다. 겹겹이 쌓인 제습지를 들춰내자 선물의 실체가 드러났다.
유단은 눈을 얇게 떴다.
“이건…….”
뜻밖의 선물이었다. 안에 든 유사 정령을 들어 올렸다.
“곤란한 우연이네.”
-내 시각 장치가 망가진 게 아니라면 이건…….
유단은 유사 정령을 상자 안에 도로 넣었다. 비서를 불러 오후 일정을 모두 취소한 후 학회 지하실로 이동했다.
체시의 본체 옆에 선물 받은 유사 정령을 놓았다.
동일한 규격.
나타 시절에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왕립 연구소에서 어머니의 자료를 기반으로 만든 걸까?
“확인해 보면 알겠지.”
커넥터를 연결하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반응이 없었다. 하긴, 작동하는 물건이었다면 골동품이 아닌 연구 자료로써 사용했을 터였다.
“1차 반응은 없어. 완전히 잠겼거나…….”
-하부 레이어까지 깨끗하게 밀린 쇳덩이거나. 나한테 연결해 봐. 살펴볼게.
체시 본체와 연결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터널 찾았어. 이 형식은, 잠깐만. 이거 카트시잖아?
“카트시?”
여기저기 흠집이 난 유사 정령을 바라봤다.
-기다려봐. 깨워볼 테니까.
“씨앗이 반응할까?”
-억지로 싹을 틔우면 돼.
은은한 마나 파장이 느껴졌다. 유단은 감각 장치를 카트시에 연결했다.
“카트시.”
이름을 불러봤다. 신호가 생성됐다. 반응은 있었다. 몇 차례 더 자극을 줬다.
-누구?
“나보다는 체시랑 먼저 대화하는 게 낫겠네. 이 꼴이 된 사연을 설명하려면 꽤 기니까.”
한때 카트시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무사했으니 카트시도 어딘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학회의 정보력으로도 흔적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그라운드 제로 때 땅속 깊숙이 묻혔을 거라 예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카트시 맞아. 어수룩한 것도 여전하고. 네가 누군지, 왜 이런 모습이 됐는지도 대강 설명해 놨어.
“수고했어.”
-뭘. 오랜만에 옛 친구하고 얘기하니까 즐겁네. 옛날 생각도 나고.
유단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카트시에 연결된 기계 안구가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로키야?
“그래.”
-안 어울려. 이상해.
“나도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아.”
-불편하지 않아? 인간의 몸은 기능적으로 우수하지 못하잖아.
“불편하지. 하지만 사회에 녹아들려면 별수 없어. 그리고 나쁜 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카트시의 기억은 연결망이 해제되던 순간에서 멈춰 있었다.
-줄은 죽은 거지?
“죽었어. 몇백 년도 전에.”
-실감 나지 않아. 줄은 항상 곁에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인간은 죽게 돼 있어. 너도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알아.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어. 다른 애들은?
유단은 체시를 바라봤다. 사실을 말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넘어가는 게 좋을지.
이건 체시가 선택할 사항이었다.
-내가 전부 파괴했어.
-파괴? 죽였다는 거야?
-넌 예전부터 너무 감성적이야. 죽인다는 표현은 우리한테 어울리지 않아. 기능 상실, 영구적 정지, 파괴. 이런 게 올바른 표현이지.
-왜 그런 거야?
-필요했으니까. 지금도 너와 난 의견이 갈리잖아? 변수를 줄이고 싶었어. 줄이 없는 세상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데, 반대하는 녀석이 있을 것 같았거든.
체시와 카트시. 둘 다 대화를 멈췄다. 커넥터를 이용해 정보를 주고받는 듯했다. 음성으로는 몇 날 며칠이 걸릴 방대한 이야기가 순식간에 오갔을 것이다.
-과격해.
-부정하진 않을게. 하지만 내 행위는 정당했다고 봐. 그놈들도 자기 이익을 위해 줄을 붙잡아 가두고, 나아가 죽였다고 말했으니까.
-어머니를…….
유단은 카트시 앞에 섰다.
“너라면 이해하겠지.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줄은 죽었다며.
“그래, 죽었어. 명백한 죽음. 돌이킬 수 없는 끝이 줄을 찾아왔겠지.”
-그렇다면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해. 불가능에 집착하는 건 효율적이지 못하고.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어. 체시가 아이디어를 냈고, 내가 구체화했어.”
카트시가 잠깐 침묵했다가 말을 꺼냈다.
-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야?
“계획대로 된다면.”
-정말?
“완성 단계에 이르렀어. 최종 시퀸스에 들어가면 가중 연산이 필요한데, 네가 도움을 줬으면 해. 줄을, 어머니를 다시 만나고 싶잖아?”
그때였다.
체시가 끼어들었다.
-이제 막 깨어난 애한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네. 잠깐은 쉬게 해줘. 카트시한테는 찰나였어도, 몇백 년의 시간이 흐른 거니까.
유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납득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말이 나온 김에 옛날얘기나 좀 할까? 여유롭게 말이야.”
유단은 카트시의 코어를 든 채 말했다.
“진짜 하늘을 보여줄게. 사진이 아닌 실제 하늘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