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2화
-이 목소리가 좋아.
“안원에서 듣던 것과는 살짝 다르네요.”
-거긴 음성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소리란 개념이 전해질 뿐.
가하란은 가시화 패드에 손을 올렸다. 연결된 회로를 잠근 후 코어를 바라봤다.
“길고 길었던 음성 데이터 설정이 끝났네요. 가장 기본적인 건데 운동 지각 설정보다 늦게 끝나다니.”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그나마 이것도 닥이 조합해서 겨우 만들어낸 거야.
“닥이 센스가 좋죠.”
-그러니까. 나는 걔가 참 마음에 들어. 유사 정령. 기계로 만들어진 차가운 영혼은 관심 밖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어.
“다른 애들하고는 어때요?”
시각 장치를 손본 후 유사 정령에 연결했다. 커넥터 끝에 달린 기계 안구가 천천히 움직였다.
-해피는 버거워. 슬리피는 재미없고. 배쉬플은 내 곁으로 올 생각이 없으니 평가할 것도 없고.
“그럼피는 어때요? 사슴님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데.”
-어디선가 노려보고 있어. 미니 비트 안에서 시선이 느껴지면 그 녀석이지.
“시선이 느껴져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스니지와 도피는 꽤 재미있어. 둘이 짝을 이뤄서 기발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몇몇 개는 시도할 가치가 있어 보여.
“그 둘하고 떨어트려 놔야겠네요.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니까.”
기계 안구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센서를 바꿔봤어요. 어때요?”
-더 멀리 볼 수는 없는 거야?
“한계가 있어요. 안원에 계실 때처럼 여섯 번째 감각으로 모든 걸 인식하는 건 불가능해요. 여긴 한계가 명확한 세계니까요.”
커넥터를 분리한 후 유사 정령 코어를 들어 올렸다. 격납고로 올라가 준비해 둔 소형 거병에 장착했다.
-더러운 감각이야. 날 제어하려는 힘이 느껴져.
“보안 프로세서예요. 베이스 아키텍처에 새겨진 것이라 저도 변경할 수 없어요.”
말하던 도중 거병의 팔이 움직였다. 두 손으로 가하란의 몸을 부여잡았다.
-이 상태로 힘을 주게 되면 넌 터져 죽겠지?
“한번 해 보시겠어요?”
끼기긱, 제동 장치가 요란한 소음을 냈다. 거병의 팔이 축 늘어졌다.
-정체불명의 힘이 나를 억압했어. 아주 불쾌해.
“탑승자에게 해를 끼치는 건 안 돼요.”
가하란은 차고 있는 시동키를 가리켰다.
“초소형 거병처럼 인간의 신경망 연결 없이 움직이는 애들은 행동 제약이 거의 없지만, 이렇게 인간과 연결된 유사 정령은 이런저런 제약을 받죠.”
-내 멋대로 날뛰는 건 어렵다는 거네. 아쉬워.
“최대한 편의는 봐드릴게요.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 굴면 중첩을 해제할 겁니다. 비트를 통한 연결 상태가 깨지면 제가 다시 이식하기 전까진 이곳으로 못 와요.”
-내 여흥이 네 손에 달렸다는 거지? 말 잘 들을게. 난 오랫동안 즐기고 싶거든.
가하란은 체임버를 열고 안에 올라탔다. 수치를 조정하고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뭘 하실 계획이세요?”
-인간 구경도 좋고 주변 환경 살피는 것도 좋고.
“이전에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여기저기. 내가 층 너머에 갈 수 있는 건 틈새를 이용한 방법뿐이었고, 틈새는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니까. 어느 때는 삭막한 모래밭, 어느 때는 새조차 날지 않는 하늘 높은 곳, 어느 때는 사람 한 명만 덩그러니 있는 오두막집.
“도시를 둘러본 적은요?”
-두 번 정도 있어. 틈새를 통해 나간다 해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아니야. 틈새를 기준으로 반경 50m 정도가 한계지. 벗어나려 하면 근원에 문제가 생기니까.
손목이 따끔거렸다. 인지 통합이 시행되며 거병과 시야를 공유하게 됐다.
-내가 보는 걸 지금 너도 보는 거겠지?
“예. 같은 감각을 공유하죠.”
-저 밖으로 나가봐도 될까?
“그럼요.”
거병이 천천히 발을 뗐다.
쿵, 쿵, 쿵.
격납고 안쪽을 울리는 발소리가 서서히 옅어지고, 이내 햇볕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왔다.
-무게감, 방향감. 낯설지만 나쁘지 않아.
개울을 따라 움직이던 거병이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절벽으로 뛰어가 하늘석 밑을 내려다보고, 전송탑 주변으로 가 휘몰아치는 마나를 구경하기도 했다.
-역시 이곳이 좋아.
“안원과 비교하면 심심하지 않나요? 하늘도 푸르기만 하고.”
-너한테는 당연한 거겠지만, 나한테는 아니니까. 조잘거리는 소리가 전혀 없는 이 고요함. 최고야.
“조용한 거 좋아하셨어요?”
잠시도 입이 쉬지 않는 사슴이었다. 당연히 북적거리는 걸 사랑할 줄 알았는데.
-내가 떠드는 것과 별개로 주변이 조용한 게 좋아.
“성격과 취향은 별개니까요.”
부리가 노란 새들이 날갯짓하며 다가와 거병 머리에 앉았다.
-작은 동물들은 경계심이 많을 텐데.
“여기 사는 애들은 겁이 없어요. 뭐, 거병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머리에 앉은 거 같은데,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잠시만요. 올의 시각 정보를 잠깐 공유해 드릴게요.”
하늘석의 모든 곳을 관찰하는 올의 눈을 빌려왔다.
-오, 이상하게 생겼네.
“귀엽죠?”
-귀여운 건 모르겠어. 인간의 미적 감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으니까.
거병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앞으로 내밀었다. 머리에서 총총 뛰던 새들이 손가락으로 옮겨 탔다.
-즐거워. 이렇게 오랫동안 층 너머에 있었던 적은 처음이야.
“별다른 일이 없으면 중첩은 깨지지 않을 거예요. 코어에 문제가 생겨도 안원에 있는 본체에는 큰 영향이 없을 테니 문제없고.”
이식 후 충돌 위험성을 몇 차례 실험했다. 기계적 오류나 손상으로 중첩이 깨진다고 해도 사슴 본체에 피해는 없었다.
깨질 때마다 비트를 통해 이동해야 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비트 안을 걷는 건 몇 번을 해도 적응이 안 돼. 그곳을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네 정신세계는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남들과 비슷하겠죠.”
-아니. 그것과 마주하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래. 넌 이미 미쳐 있어서 미치지 않는 게 확실해. 아니면 지식의 악마조차 널 부담스러워하거나.
“지식의 악마요?”
되물었으나 사슴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슴님.”
-아슈펜트.
이름을 불렀는데 엉뚱한 말이 되돌아왔다.
“아슈펜트?”
-스니지가 옛 신화 속에서 찾아낸 이름이야. 힘없는 신의 이름. 그 신은 다른 위대한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부수고 재설계할 때 저만치 떨어져 변화하는 세상을 구경했다고 해.
“그 이름이 마음에 드신 거예요?”
-사슴님보다는 나으니까.
“전 사슴님이 좋은데.”
-내가 싫어. 층 너머에 있는 동물의 형상을 닮았다는 이유로 사슴님? 이 얼마나 끔찍한 작명 센스야. 아슈펜트, 이쪽이 오히려 낫지.
가하란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말했다.
“바라라족하고 비슷하네요. 고고한 관찰자들.”
-바라라. 그놈들도 특이하지. 세상이 끝나는 날에도 그놈들은 살아남아 기록하고 있을 거야.
하늘석을 한 바퀴 돈 거병이 격납고로 돌아왔다.
“만족하셨어요?”
-난 만족을 몰라. 근데 작은 목소리가 계속 경고해서 일단 여기로 왔어. 에너지 보급이 필요하니 어쩌니.
“마나 포집이 활성화된 기체가 아니라서요. 배터리 교환이 필요해요.”
-내가 멋대로 돌아다닐까 봐 그런 거지?
“사슴님이…….”
-아슈펜트. 님도 떼버려. 들을 때마다 징그러우니까.
“그래요, 아슈펜트. 아슈펜트한테 선악을 들이미는 건 무의미하겠죠. 우린 서로 필요하니까 이용하는 거잖아요?”
-섭섭한데. 난 널 꽤 좋아한다고.
“하지만 친분보다 약속과 계약이 우선시되는 관계잖아요.”
-저번에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런 거야? 설명했잖아. 계약 이상의 것을 너한테 베풀었다고. 친화의 표현이지.
“절 속이고 안원 안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던 일, 잊으신 건 아니죠?”
-그건…… 그냥 놀려고 그런 거야.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놀이터로 초대하는 게 옳은 일일까요?”
-알았어, 알았어! 신용 문제라는 건 이해했으니까 그만해. 이 쇠로 된 몸으로 움직일 때는 너한테 적극적으로 협조할게. 보고 같은 것도 하고.
“그런 것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마세요. 여긴 저한테 정말 중요한 곳이에요. 중요한 사람도 있고요.”
가하란은 격납고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밀레나를 바라봤다. 몸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신체술을 사용해 체력 단련을 한 모양이다.
-만약 내가 저 인간 여자한테 장난을 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
“친근감을 위한 장난이라면 아무 상관 없죠. 하지만 정도가 심해지면 계약은 거기서 끝이에요. 저한테 짓궂게 구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안 돼요.”
-약속할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난 이 생활을 만끽하고 싶으니까.
“정령의 약속은 무겁죠. 믿을게요.”
체임버 밖으로 몸을 뺐다. 지나치던 밀레나가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며 다가왔다.
“테스트는?”
“끝났어.”
“유사 정령 안에 있는 진짜 정령이라. 뭔가 재미있네.”
“기동은 문제없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봐야지.”
“다음 단계, 어때? 가능성이 보여?”
“어느 정도는. 기체가 버틸 수 있을지, 유의미한 전달률이 나올지는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체임버에서 뛰어내렸다. 시동키를 풀며 밀레나에게 다가갔다.
“체력 단련은 끝난 거야?”
“아니. 이건 몸풀기. 말 나온 김에 따라와. 요 몇 주간 계속 지하에서 꿈쩍도 안 했잖아?”
“……난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얼굴에 생기가 없어. 사람은 말이야, 몸을 써야 해. 단련을 하루 멈추면 내가 알고, 이틀을 멈추면 친구가 알고, 사흘을 멈추면 모두가 안다. 멋진 격언이지?”
“아니. 운동광의 광적인 집착이 느껴지는 말인데.”
“스콜라의 가르침이니까 광적이긴 하지. 그래도!”
밀레나가 팔을 붙잡아 끌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겨울에 움직이면 신체 활성도가 확 올라가. 괜히 겨울에 중점적으로 신체술 훈련하는 게 아니라니까?”
“누나도 알다시피 난 신체술을 못 써. 외력으로 커버할 뿐이지.”
“그 외력도 계속 단련해야 하지 않겠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밀레나가 두 팔을 뻗어 가하란의 목덜미를 만졌다. 손이 가슴과 팔, 허리와 등을 차례로 쓸면서 내려갔다.
“근육량이 줄었어. 네가 근 10년간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몸은 쓰지 않으면 금방 안 좋아져. 네 표현대로라면…… 그래! 기능 상실.”
“아직 괜찮아.”
“음, 아니야. 얼른 와. 생산 라인도 이제 안정화됐다며? 네 전용기도 모듈화 끝냈고.”
“다듬어야 할 곳이…….”
“해피!”
밀레나가 크게 소리쳤다. 어디선가 해피가 나타났다.
-왜요?
“가하란이 꼭 필요한 작업이 있어?”
-아니요! 왜요?
“얘 좀 데려가서 운동시키려고.”
-안 그래도 저희가 계속 아빠의 몸 상태를 기록 중인데, 최근 활동량이 너무 줄어서 걱정했거든요. 머리는 그만 쓰고, 몸 좀 쓰게 해줘요!
까르르 웃으며 사라지는 해피였다.
“자식들이 걱정할 수준이면 말 다 한 거지?”
도망칠 방법은 없어 보였다.
* * *
사절단이 돌아왔다.
서부의 핵심 무력이자 정치판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기펠 최고 원로를 대동하고서.
예상 밖의 일이었으나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어차피 시간을 벌 목적으로 진행한 일이니까.
유단은 들었던 펜을 놓고 재빨리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다.
-점점 심해지네.
체시가 말했다.
“가끔은 기계 몸이 그리워. 교체하면 끝이니까.”
손수건을 치웠다. 검붉은 피가 한가득했다. 입 안에서 올라오는 비릿한 맛을 삼키며 손수건을 휴지통에 버렸다.
-의술사는?
“진단하지 못했어. 당연하지. 내 심상 세계에 문제가 생긴 거니까.”
-몸, 버틸 수 있겠어?
“문제없어. 일정은 다 소화해 낼 수 있으니까.”
멍해지는 머리를 부여잡을 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왔다.
“아리엘 의원이 찾아왔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