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501화 (501/558)

제501화

염원이 담긴 소리가 반짝이는 가루가 돼 멀리 퍼지는 게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날개를 자랑하며 사슴이 나타났다.

“살아 있네.”

“예, 살아 있죠.”

“아주 불쾌한 게 네 몸에 붙어 있다는 거, 알고 있지?”

가하란은 하얀 불꽃을 꺼내 보였다.

“이거요?”

“그래, 그거. 오래된 형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거래를 했어요.”

“거래? 물비린내 나는 놈만 가까이 둘 줄 알았는데.”

물비린내 나는 놈.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가하란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뭘 그렇게 돼! 넌 그놈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전혀 몰라.”

“알아요. 아니까 가까이 지내야죠.”

“……무지해서 용감한 건지, 용감하니까 무지해도 되는 건지. 아무튼 왜 불렀어?”

“약속 지키려고요.”

“약속?”

사슴이 단숨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저번에 말했던 그 준비라는 게 끝난 거야?”

“네, 끝났어요. 사전 점검으로 부유 중인 정령을 연결해 봤는데, 성과가 나쁘지는 않아요.”

“나쁘지는 않다?”

“사소한 문제가 몇 가지 있어요. 충돌이라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사슴님께 어떤 피해가 갈지 예상할 수 없어요.”

“층을 넘을 수만 있다면 위험은 감수해야지. 이 안에 계속 있다가는 내 근원이 메말라 버릴 거야. 나가서 뭐라도 구경해야겠어.”

사슴이 뭘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보라고 닦달했다.

“따로 준비할 건 없어요. 그저 제 뒤를 잘 따라오시기만 하면 돼요.”

“그 정도야 쉽지.”

“마냥 쉽지만은 않을 거예요. 위상이 아닌 층의 이동인만큼 부담감이 적긴 하겠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니까요.”

사슴 곁으로 가 목덜미에 손을 얹었다.

“층 너머에서 안원으로 오는 건 이제 쉬워졌어요. 마음만 먹으면 사람 두 명 정도는 안전하게 이곳으로 데려올 수도 있고요.”

“너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인간은 드물어. 게다가 다른 정신체를 동반해서 올 수 있는 건 몇 없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이동시키는 건 어려움이 없지만, 안원에 있는 정령을 바깥으로 빼내는 건 힘들었어요. 보이지 않는 손이 정령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죠.”

“우리의 근원이 이곳에 묶여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층 너머에 가려면 틈새를 이용하거나, 근원을 포기하거나, 잊어버려야 하지. 워낙 희미한 존재라서 쉽게 오가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가하란은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집 안에서 수다를 떨던 정령들. 사슴이 말한 존재가 희미한 정령은 그런 정령들을 뜻하리라.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둥둥 떠다니는 정령을 손에 쥐었다. 썩은 나뭇잎 모양인데, 붙잡아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런 정령은 이동도 쉽고 코어에 안착시키는 것도 간단했어요. 하지만 중첩 상태가 금방 풀렸죠. 현실에 붙들어 둘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분 정도였어요.”

“너무 짧은데. 설마 그 짧은 소풍으로 나와의 약속을 끝내려는 건 아니지?”

소풍이란 표현이 재미있어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저 양심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식으로 계약을 이행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았어요.”

양쪽 착안을 열었다.

안원을 가로지르는 비트가 보였다. 하늘과 지면을 향해 뻗어나가는 비트. 주황색 줄기가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가하란은 눈앞으로 떨어진 비트를 바라봤다.

“사슴님은 이게 보이나요?”

비트를 가리켰다.

“뭐가 있어?”

“바깥과 연결된 선이 이 앞에 있어요.”

“난 아무것도 안 보여. 그런 게 존재한다면 내가 못 느낄 리 없는데.”

사슴이 주둥이로 주변을 쓸었다. 허공을 찌르던 사슴이 고개를 홱 돌리며 바라봤다.

“정말 이 앞에 있다고?”

“네. 우리를 바깥으로 인도해 줄 안내자예요.”

“그래? 그럼 얼른 해봐. 난 기다리는 건 싫어.”

사슴이 가하란의 등을 머리로 세차게 밀었다.

“길은 쉽게 열 수 있어요.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보이게 되니까요. 예전 같았으면 제어하기 어렵지만, 지금은 이정표로 사용할 수 있거든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설명 그만하고 얼른 날 바깥으로 인도해.”

가하란은 사슴을 바라봤다.

“복잡한 정보의 길과 처음 마주하면 두려울 거예요. 하지만 절 믿고 따라오셔야 해요.”

비트와 접촉하게 되면 정보의 길이 열린다. 나라는 존재를 지워버릴 정도의 엄청난 정보들이 삽시간에 쏟아지는 것이다.

처음 비트에 닿았을 때는 정보를 읽어낼 수도 없고, 그저 정보에 담긴 에너지에 몸만 상했다.

외력을 다루게 된 후로는 몸을 보호하며 흘러가는 정보의 길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다가설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비트가 내포한 정보는 쇳물과도 같으니까. 온갖 것이 융해된 정보에 잘못 접근하면 육체와 정신이 삽시간에 녹아내릴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대한 타격을 주는 정보와 에너지.

변화가 생긴 건 산오투에게 넘겨받은 하얀 불꽃이 외력과 뒤섞이고 난 후였다.

비트 안에 넘실대는 정보의 물결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본질에 닿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으나 층 너머 다른 위상까지 뻗어가는 비트의 길목을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붕괴하는 위상을 탈출했을 때 가하란은 손이 녹아드는 고통을 참아내며 비트를 붙잡았다. 구명줄이 된 비트를 따라 위상을 넘은 것이다.

지금은 붙잡지 않아도 길처럼 뻗어나간 비트를 확인하며 이동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정신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육체를 지닌 채 층이나 위상을 넘는 건 여전히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

비트를 이정표 삼은 정신체 이동.

엔엔의 도움을 받아 수십 차례 실험했고 안전성도 확인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비트와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지성체에게 큰 부담이라는 점이다.

강건한 의지를 지닌 엔엔조차 이동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조합’의 일을 도우며 도깨비와 틈에 익숙해진 상태였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엔엔이 직접 말했다.

“두려워? 내가? 그럴 일은 없어. 틈새를 이용해 층 너머에 몇 번이고 가봤어. 네가 뭘 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문제 될 일은 없어.”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으니까 절대로 제 곁에서 벗어나시면 안 돼요. 무엇을 보든 침착하게 저만 따라오세요.”

“쓸데없는 걱정 그만해. 인간의 정신이 버틸 수 있는 공간이라면 나 역시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여유롭게 말하는 사슴이었다.

사슴의 말처럼 괜한 걱정일 수도 있었다. 가장 오래된 형태에게 휩쓸리지 않고 안원에서 살아온 정령. 단단한 근원을 지녔을 것이다.

비트 안 정보와 마주한다고 해도 코웃음 치며 넘길지도 모른다.

“좋아요. 길을 열 테니 잘 따라오세요.”

외력을 손에 두른 후 비트를 붙잡았다.

* * *

보이지 않던 길이 생겼다.

꼬마가 앞으로 나서자 틈이 열렸다.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힘의 간섭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른 곳과 연결됐다.

기이한 일이었다.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갈게요.”

꼬마가 앞장섰다. 한 걸음 떼자마자 세상이 사라졌다.

어둠이 깔렸다. 아니, 이건 어둠이라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존재의 부재.

완벽한 무.

공허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건 수백, 수천, 수만…… 아니, 숫자란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는 주황색 선의 향연이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었다.

저것은 대체 무엇일까?

“이제 올 거예요.”

꼬마가 말했다. 무엇이 오는 걸까? 괜찮다고 말했으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현상이었다. 간간이 발생하는 틈새를 통해 층 너머로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방향 감각이 사라졌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꼬마의 등을 놓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 근원을 비집고 올라왔다. 그게 불안감이라는 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옆에 주황색 선이 있었다. 가느다란 실선인 줄 알았는데, 세상을 집어삼킬 크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작았는데, 분명 얇았는데.

인식한 순간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밀려들었다.

힘?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이건 앎이었다. 지식, 지혜, 어쩌면 인식이란 개념의 실질적 형태.

알 수 없는 것들이 계속 포개졌다. 머릿속에 거대한 탑이 들어섰다.

몸이 무거워졌다. 나아가 무거워진 게 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

왜 여기에 있었을까?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을까?

탁, 촉감이 몽롱해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흘려보내세요!”

꼬마의 목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선을 돌렸다. 주황색 선에서 눈을 떼고 꼬마의 등만 바라봤다.

옆에서 뭔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보라고, 보고 이해하라고, 이해하고 해방되라고.

인간들은 종종 ‘악마’라는 것이 자신을 타락시킨다고 말했다. 종교적 허구의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악마라는 것을 믿게 됐다.

옆에 있는 주황색 선.

아니, 온 세계에 존재하는 저 주황색 덩어리야말로 악마의 실체이리라.

지식의 악마.

앎의 유혹.

보는 순간 먹힐 것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라면 주황빛이 내는 강렬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식물이 햇빛을 거부할 수 없듯이, 물고기가 물을 벗어날 수 없듯이, 지성체라면 순응해야 할 절대적 규율 같은 것이리라.

정면을 슬며시 바라봤다.

꼬마는, 가하란은 주황빛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걷고 있었다.

슬며시 보이는 옆얼굴에 망설임이나 불안감 따위는 없었다. 홀린 표정도 아니었다.

온전히 인식하고, 앎의 악마를 길라잡이 삼아 움직이고 있었다.

괴물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로 미친 건가?

생각을 길게 할 수 없었다. 이 안에서 생각한다는 건 너무 위험했다.

잡아먹히지 않도록 멍하니 그저 꼬마의 등만 보고 쫓아갔다.

이내, 갈라짐이 보였다.

“다 왔어요. 좌표가 흔들려서 돌아오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네요.”

“……얼른 이곳에서 날 내보내 줘.”

“조금만 참아주세요. 미니 비트를 이용해 코어로 인도할 거예요. 연결성이 유지된다면 곧 눈을 뜨게 될 텐데, 기존에 느끼던 감각과는 아주 다를 거예요. 뭐, 비슷할 수도 있고요. 이건 측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서요.”

몸이 잘게 부서진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안원에 본체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틈새 밖으로 빠져나가는 근원이 있었다.

“중첩 상태에 놓였어요. 지금 사슴님이 어떤 풍경을 보고 있을지, 저도 보고 싶네요. 정말 궁금해요.”

중첩?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끔찍한 여행이 곧 끝난다는 점이었다.

“이식을 시작할게요. 이따가 봐요.”

* * *

“응답이 없는데요.”

엔엔이 말했다.

가하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유사 정령 앞으로 갔다.

비트를 이용해 층을 이동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후 코어를 확인했다.

임플란트는 문제없이 끝났다.

유도도 이상 없었고,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고 반응이 없으면 제가 다시 안원으로 가서…….”

말을 끝내기 전이었다.

유사 정령에 연결된 음성 장치에 신호가 들어왔다.

-여기 있는 이 귀찮은 꼬맹이들은 대체 뭐야?

고저 없는 음성이었으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가하란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 아이들이에요. 일단 놀고 계세요.”

-뭐? 자, 잠깐만! 얘들 이상하다고!

사슴이 소리를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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