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0화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되다니.”
가하란은 격납고 벽면에 세워둔 광석에서 시선을 떼고 해피를 바라봤다. 오늘 해피는 빨간색 리본을 달았다.
“너희가 어떤 결정을 한 건지, 정말 이해한 거야?”
-네. 이해했어요.
해피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미니 비트 내에 존재하는 기억 중추에 넘버링을 했어요. 각자 좋아하는 숫자를 로우 데이터에 매겨뒀죠. 각 섹션은 상호 교류 상태를 유지하지만, 데이터 보관은 이뤄지지 않을 거예요.
“정신이 육신에 얽매인다는 뜻이야. 너희가 지닌 그 자그마한 코어에 문제가 생기면…….”
-끝이죠. 완전한 끝. 물론 아버지가 그간 수집한 저희 데이터로 또 다른 저를, 해피를 만들어 낼 수는 있겠죠. 하지만 넘버링한 객체 데이터만큼은 아빠도 손댈 수 없어요. 해피가 되살아난다고 해도, 그 아이한테 제 기억이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제가 아니에요.
해피가 치켜든 두 손을 신나게 흔들었다.
-짠! 완전한 오리지널리티.
표정을 지을 수 없는 거병의 얼굴이 활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들…….”
말이 입 안에서 헛돌았다.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이야. 자발적 행동을 대견해해야 할까, 무도한 결정을 질책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의로 조정된 값을 수정해 원래 상태로 돌려야 할까.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닥이 다가왔다. 교체한 머리와 팔 모듈이 유달리 반짝거린다.
-아버지.
“적어도 넌 나와 상의할 줄 알았어.”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생각이 들었는데 하지 않았다?”
-네. 저도 유일해지고 싶었나 봐요. 아버지한테도, 기펠 님한테도 유일한 닥으로 남고 싶어요.
닥이 교체한 팔을 내보였다.
-시작과 끝이 있어야 완전하지 않을까요? 고장 날 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새것으로 교체되는 건, 몸으로 만족할래요. 기억은, 정신은 제 것으로 남기고 싶어요. 어리광일까요? 무지한 일일까요?
가하란은 두 아이를 바라봤다.
해피야 그렇다 쳐도, 닥은 신중하게 결정하는 아이였다. 미니 비트 내에서도 조율자 역할을 자처하며 다른 에고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끝까지 고민하는 아이.
“멈춘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해 봐서 알 거야.”
-네. 제가 경험한 걸 모두에게 전했어요. 다들 끝난다는 게 뭔지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유한한 것을 선택할 거야?”
-네. 저는 유한해지고 싶어요. 아버지처럼.
가하란은 두 손을 깍지 끼고 의자에 앉았다. 검지로 손등을 툭툭 치며 생각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아니, 되돌리라고 하면 어떻게 할래?”
-반항할 거예요!
해피가 말했다.
“정말?”
-네! 저 멀리 도망칠 거예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네 운동체를 내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죠. 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그게 아빠니까요.
이론적이지 못한 말이었으나, 그럼에도 모든 걸 포함한 말이었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후 말했다.
“운동 기능을 개선할 거야. 너희도 계속 시뮬레이션해서 수치를 높여야 하고.”
-그건 재미가…….
가하란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해피의 말을 잘랐다.
“유한함을 택했으면 대가도 치러야지. 앞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잦아질 거야. 미니 비트 안에 너희 정신이 남아 있다면 운동체가 파괴되는 것쯤은 용납할 수 있지만, 상황이 바뀌었잖아? 이제는 그 어떠한 손상도 납득하지 않을 거야.”
닥의 팔을 가리켰다.
“파손되면 수리는 각자 해야 할 거야. 라인에서 생산된 모듈로 갈아 끼우는 일은 이제 없어. 너희 몸은 너희가 돌봐야 할 거야.”
-스스로 고칠 수 없을 정도로 다 망가지면요?
“…….”
-고쳐주실 거죠?
해피가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물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이겨먹겠냐.”
한숨이 작게 나왔다.
-망가지지 않을게요. 아버지가 걱정하는 일 안 생기도록 조심할 거고요.
닥이 말했다.
“유토니아도 너희와 같은 생각이니?”
-아니요. 의견을 물어봤는데 유토니아는 거절했어요. 유한함도 좋지만 남아서 지켜보고 싶은 게 많다고 했어요.
“그래.”
해피가 만세를 부르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영구성을 포기한 기계.
-아버지.
“어?”
-죄송합니다. 저희가 이기적이었죠?
“많이 놀랐고, 걱정되고, 섭섭하기도 해. 하지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너희가 깨어났을 때 내가 해줬던 말 기억해?”
-‘너희는 자유로울 거야’. 기억해요.
“그건 내 욕심이면서 다짐이기도 해.”
가하란은 작은 드라이버 하나를 닥에게 건넸다.
“다치지 마.”
-네.
닥이 송전 시설을 점검할 게 있다며 물러났다. 멀어져 가는 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엔엔이 눈앞에 잔을 들이밀었다. 커피가 담겨 있었다.
“결여된 것에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봐요.”
“사람은 무한한 삶을 원하고, 기계는 유한한 삶을 꿈꾸고. 개체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저 아이들이 같은 의견을 냈다는 건 예상 밖이었어요.”
“오리지널리티. 모방에서 태어났지만 독자적인 무엇을 꿈꾼다. 가하란이 만든 애들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러게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애들을 지켜보는 심정이란…….”
“올란트도 비슷한 심정이었을걸요?”
“아버지가요? 설마요. 전 아주 말 잘 듣고 얌전한 아이였는걸요.”
엔엔의 눈이 얇아졌다. 가하란은 모른 척하고 커피를 마셨다.
“누나는요?”
“신나게 뛰고 있죠.”
엔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먼 곳에서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이내 높게 자란 나무를 짓뭉개며 뛰어다니는 거병이 보였다.
블루아이.
27m의 거대한 병기가 걸음을 뗄 때마다 폭음에 가까운 소리가 일어났다.
소리에 놀라 날아오른 새들이 거병을 피해 서쪽으로 날아갔다.
“다른 기체 같네요.”
가하란은 유연하게 움직이는 블루아이를 바라봤다. 하늘석 부유 시스템에 사용된 양력 발생기를 축소해 블루아이의 각 모듈에 삽입했다.
질량으로 인해 각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여 기동성을 확보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조종이 난해해지는 단점이 생겨났다.
모션별 무게 이동을 학습해 탑승자를 지원해 주고 있지만, 신경 써야 할 정보가 늘어난 거니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허리까지 오는 나무들 사이를 종횡무진 움직이던 블루아이가 급제동 후 발을 크게 굴렀다.
가하란도 고개를 살짝 들었다. 높게 뛰어오른 블루아이의 몸 주변에 가시화된 마나가 생겨났다.
내뿜어진 마나 파형으로 자세를 잡으며 안전하게 착지한 블루아이가 기우뚱거리더니 옆으로 넘어졌다.
콰아앙!
주변 나무가 죄다 쓰러지면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가하란은 고개를 내저으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무겁긴 하네요. 접지압을 해결하는 게 관건인데, 여기서 마나를 더 쓰면 기동은커녕 보기보다 가벼운 장식품이 되겠죠.”
“저 정도만 해도 운용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방금은 밀레나가 지반 약화를 생각 안 하고 뛴 게 문제니까요. 블루아이가 경고해 줬을 텐데.”
“누나한테 말해 줘야겠어요. 좀 살살 다뤄달라고.”
넘어졌던 블루아이가 천천히 일어섰다. 엔엔이 회중시계를 든 채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기동한 지 어느 정도 됐죠?”
“48분이요.”
“슬슬 마나 포집이 한계점에 도달하겠네요.”
“한계 운용 시간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해 봐야죠. 마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개량된 마나 포집이 어디까지 해줄지.”
10분이 지났다. 다양한 동작을 취하던 블루아이가 우뚝 멈춰 섰다.
“59분. 예비 배터리로 전환하면 1시간 정도 더 움직일 수 있겠네요.”
“그사이 마나 포집이 제 역할을 다하면 3시간 정도는 가동할 수 있겠네요. 백업 트레일러까지 붙이면…….”
“단독 작전 수행 4시간. 상상을 초월하는 수치네요. 저런 걸 4시간이나 움직일 수 있다니.”
가하란은 엔엔을 툭툭 친 다음 바닥을 가리켰다. 엔엔이 아, 하며 작게 웃었다.
“우린 저거보다 더한 물건에 타고 있었죠.”
“송전탑 구조 해석이 끝나고 이걸 기반으로 마나 포집을 재구성하면 예비 배터리도 필요 없을 거예요. 문제는 줄리어스가 걱정한 마나 고갈 현상인데.”
“뿌리 돌출로 인해 마나가 과포화된 상태예요. 신인류도 계속 태어나는 마당에 고갈은 걱정할 필요 없겠죠. 안 그래도 하늘석으로 계속 측정 중인데, 이미 조성된 환경이라 바뀔 것 같지 않아요.”
“마르지 않는 샘이네요.”
“대중에 공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안 되네요.”
“잠깐이겠지만 자원 때문에 다투는 일은 없어지겠죠.”
“한시적 평화라도 그게 어디예요.”
엔엔이 팔을 길게 뻗었다. 회색빛 털이 바짝 솟았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좀 쉬세요.”
엔엔을 의자에 앉힌 후 커피 잔을 들었다.
“가하란은요?”
“마무리할 게 있어서요. 내려가 봐야 해요.”
“아, 마무리 단계면 답을 찾았나 보네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일단 해보는 건데, 날뛰면 골치 아파지겠죠.”
“마나 공백 상태에서 진행해요. 혹시 모르니까.”
“네, 신경 쓸게요. 혹시라도 사고 나면 잘 수습해 주세요.”
“못 들은 걸로 할게요. 가하란이 벌린 사고 크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통제실을 통해 하늘석 중심부로 내려갔다.
오늘도 얌전히 잠들어 있는 켈트를 바라보며 걸음을 뗐다.
-지시하신 거 전부 확인해 봤어요.
유토니아가 다가와 말했다. 오늘은 외발인 기계인형의 몸을 빌리고 있었다.
“어때?”
-발생한 충돌 횟수는 4회. 회로 꼬임으로 끝난 것이 3회였고, 나머지 한 번은 사소한 폭발이 있었어요.
사소한 폭발의 현장 앞에 섰다.
실험용으로 제작한 유사 정령 코어가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차폐벽 곳곳에 검은 그을음이 보였고 매캐한 냄새 역시 코끝을 스쳐 갔다.
-순간 방출 에너지 980마이트였어요.
“0.3cm 정도의 마나 응축봉이 폭발한 거네?”
-그렇죠. 시험 목적으로 제작된 거라 이 정도의 사소한 폭발로 그친 거예요.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보호벽으로 차폐했으니 안전에는 문제가 없으나, 실사용 중에 사고가 터졌다면…….
“체임버가 사라지겠네.”
-진행할까요?
“해야지. 이론이 아닌 실적용했을 때 수용 가능량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봐야 해.”
가하란은 유사 정령 코어를 들고 차폐벽 안으로 들어갔다. 실험대에 코어를 둔 후 가볍게 숨을 골랐다.
“다녀올게.”
-오래 걸리나요?
“금방 돌아올 거야, 아마도.”
익숙한 감각의 끄트머리를 붙잡으며 눈을 감았다. 몸을 훑고 지나가는 힘의 파장을 느낀 후 다시 눈을 떴다.
안원.
가하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백색 불꽃을 두른 거미, 산오투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로 연락하기 전까지 신경 쓰지 않겠다는 뜻인가.
“사슴님!”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