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499화 (499/558)

제499화

“사냥에 실패한 짐승은 굶어 죽기 마련이죠.”

엔엔이 멀어져 가는 군부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로 간 보는 걸 끝냈으니 조용해질 겁니다. 마넬 장군도 알고 있으니 얌전히 물러난 거겠죠. 이기면 출세, 지면 버리는 패.”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제가 봐온 인간이란 집단은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개인은 분명 현명한데, 뭉쳐놓으면 종종 이상한 짓을 하니까요.”

“반대의 경우도 있죠.”

이틀 전 연락을 받았다.

기습에 대비하라고.

연락을 보내온 곳은 상원 의원회 소속 의원이었다.

마넬을 움직인 주체도 상원 의원회, 경고해 준 곳도 상원 의원회.

집결 수도는 다방면으로 검증한 것이다. 하늘석, 가하란이란 인간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지녔는지.

품격을 갖춰야 한다는 기펠의 말을 떠올렸다. 녹록지 않다는 걸 보여줬으니 상원 의원회도 방향을 잡았으리라.

“신용의 증거라며 저 장군의 목을 선물해 올 수도 있어요.”

“설마요.”

“가하란, 난 그런 경우를 몇 번이나 봐왔어요.”

“중간에 낀 사람만 골치 아프게 됐군요.”

“뭐, 저 인간도 다 알고 움직인 거니까요. 우리가 대항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하늘석을 강탈하고, 우릴 죽였겠죠. 그러니 장군의 목이 온다고 해도 크게 신경 쓰지는 마요.”

엔엔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정치라는 게 잔인하네요.”

“무서운 만큼 매력적이기도 하죠. 그러니 다들 권력에 목매는 거 아니겠어요?”

“엔엔 님도 권력이 탐나시나요?”

“가끔? 둔에 있을 때 개발 지원비가 적게 나오면 이 생각부터 들었죠. 파벌에 발을 담가야 하나?”

풋 웃던 엔엔이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모질이 엉망이 됐어요.”

“나중에 빗어 드릴게요.”

“싫어요. 예전과 달리 가하란의 손은 섬세하지 못하거든요. 차라리 밀레나한테 부탁하는 게 낫죠.”

“그러시다면야.”

가하란은 웃으면서 블루아이를 올려다봤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숙이고 있는 거병은 신화 속에 나오는 거인 같았다.

“공중 자세 제어 장치는 시뮬레이션했던 것보다 수치가 좋았어요.”

“블루아이의 밸런싱은 남다르니까요. 실전에서 다뤄보니 어때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냥 신경만 빌려줬어요. 감각 확장 3단계에서도 머리가 아찔하더라고요. 인지 통합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는데, 확실히 소형 거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담이 커요. 무엇보다…….”

가하란은 블루아이의 발등 외장갑을 툭 치며 말했다.

“이 녀석이 절 안 좋아해요.”

“예로부터 오토마타와 기사의 상응도는 숫자로만 계산 안 되는 미묘한 영역이었죠. 그래서 마리아주는 기술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라 하고.”

엔엔이 몸을 돌렸다.

“크레인 준비해서 블루아이를 끌어올릴게요.”

“전 밑에 애들 데리고 올라갈게요.”

가하란은 한쪽에 모인 기계인형을 바라봤다. 정비용 기계인형 사이 팔과 머리 모듈을 잃은 닥이 있었다.

닥에게 걸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한 거, 너도 알지?”

-네.

“멀리서 음성으로만 경고해도 된다고 했잖아.”

-대화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해야 한다, 전 그렇게 배웠어요.

“대화가 아니라 경고.”

가하란은 닥 앞에 주저앉았다. G-21이 수리용 툴을 가져다주었다.

“일단은 운동 기능 쪽만 손보자. 모듈은 제작되는 대로 교체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덮개를 들어냈다. 수축한 튜브 안쪽에 말라버린 액상 근육이 보였다.

튜브를 떼어내자 닥이 비틀거렸다.

-6축 센서가 작동하지 않아요. 이게 어지럽다는 걸까요?

“비슷하지. 방향 감각을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거니까.”

닥을 바닥에 앉혔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어요. 거부감은 느껴지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가하란은 소실된 회로를 살피면서 닥의 말을 들었다.

-첫 번째 공격을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판단력을 잃었어요. 기계적인 손상 때문인지, 아니면 논리 회로의 일시적 마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 생소한 감정을 알게 됐어요.

“공포심?”

-네. 무서웠어요. 전 파괴를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마지막을 그려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직접적인 형태로, 어찌할 수 없는 순간에 들이닥치니까 무서웠어요.

“상호 간 안전 보장이 깨진 거니까. 두려울 수밖에 없지.”

-제가 틀린 걸까요? 기계의 권리라는 건 언급해서는 안 될 터부일까요? 제 말이 그 사람을 몹시도 불쾌하게 만들었기에 이런 상태가 된 걸까요?

“널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널 이해 못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당연해. 모두에게 이해받을 순 없어.”

-그러면 저항했어야 할까요? 운동 기능을 모두 발휘했다면 회피는 물론 반격도 가능했을 거예요. 거리는 가까웠고, 그 사람들의 무장 상태로는 제 공격 수단을 막을 수 없으니까요.

“그 상황에서 제압은 힘들었을 텐데. 공격은 곧 살인을 의미하는 거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닥이 조용해졌다.

가하란은 감각기를 끼고 시그니처를 불러냈다. 마력선 짜맞춤으로 설계된 닥의 에고가 공중에 맺혔다.

“잠그고 있네.”

변형되는 회로를 보며 말했다.

-하늘석에 접근 못 하도록 경고한다. 이게 아버지가 저한테 부탁한 일이었죠. 하지만 전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인간을 공격한다는 생각에 도달했어요. 이건 잘못된 것이에요. 그러니 제거하려고요.

“그게 옳다고 네가 판단한 거야?”

-모르겠어요. 하지만 기계에게 권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요.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리진 않을게. 네 마음은 어디까지나 네 것이니까.”

-마음. 전 아버지가 그 단어를 말해줄 때마다 행복해져요. 하지만 동시에 생각해요. 마음이란 게 뭔지.

닥이 하나 남은 팔을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천천히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엉성하게 생긴 나무.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우리의 정신은 미니 비트 안에도 있어요. 파편화된 정보로서 존재하죠. 탈로스를 근간으로 이뤄진 이 운동체가 소멸한다고 해도 정신은 미니 비트 안에 남아 있어요. 하나하나 다시 모아서 인격 데이터 위에 재정립하면, 또 다른 저의 마음이 탄생하죠.

닥이 망가진 몸을 쓰다듬었다.

-그런데도 두려웠어요. 운동체가 사라져도 다른 운동체에 에고를 넣으면 ‘닥’이라는 개체가 이어지는 건데, 이상한 일이에요.

“영속성의 문제네.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해. 잠이라는 단절을 거친 후에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인가. 정신은 이어지고 있지만, 이어진다는 개념의 모호함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결해요?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해. 우리도 답을 못 찾았어. 영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도, 정신과 영혼이 별개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야. 모든 게 어떤 식으로 상호작용하는지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인걸요. 저는 잠을 자지 않으니 알 수 있어요. 아버지는 어제도, 엊그제도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났어요. 육신의 변화는 없죠. 그러니 정신 역시 같은 거고, 아버지는 변동 없이 이어진 거예요.

가하란은 활짝 웃으며 닥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거야.”

-네?

“결국 나라는 대상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인식되고 이해되고 결정돼. 내가 나임을 증명해 주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야.”

-자신의 믿음은 쓸모가 없는 건가요?

“아니. 그 믿음 역시 중요해. 타자의 눈 없이도 오롯하게 나 자신을 믿고 존재할 수 있는 사람. 우리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철인이라 알려줬어. 어릴 땐 무슨 얘기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해.”

-철인. 저도 될 수 있을까요?

“모르지. 가능성은 무한하니까. 혹시라도 뭔가 깨달으면 나한테도 알려줘.”

닥이 일어섰다.

-제가 보기엔 아버지야말로 철인이에요.

“내가?”

쿠궁, 요란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늘석 측면에서 나온 크레인이 블루아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켈트를 수납하기 위한 장치.

지금은 자재 운반용으로 쓰고 있었다.

-오늘 일, 애들하고 공유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계속 묻고 답하고 다시 질문하고. 너희의 답을 찾아봐. 그게 무엇이 됐든 난 지지해 줄 테니까.”

닥이 기계인형과 함께 승강기에 올랐다.

권리.

가하란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거병의 부품을 바라봤다.

저 애들이 세상과 마주하게 되는 날, 세상은 어떤 태도로 저 애들을 대하게 될까.

자유와 방임.

사고력을 갖춘 유사 정령이 인간의 대척점에 서고, 나아가 대립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줄리어스.”

로키는 연구원을 속여 죽음으로 몰아갔다. 진실을 알게 된 줄리어스는 로키를 분해, 제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만든 모든 유사 정령을 숨겨 버렸다.

유폐함으로써 보호한 것이다.

어쩌면 자식이나 다름없는 그 아이들을 죽일 수 없었기에, 결론짓는 걸 포기하고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문득 지적 설계자, 신이 떠올랐다.

신은 어떤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봤을까.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창조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마침내 창조물들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신은 기꺼워했을까, 슬퍼했을까.

가하란은 하늘석을 올려다봤다.

그곳에 있을 수많은 유사 정령과 기계를 생각했다.

지독하게 가까운 듯하면서도, 하염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아버지, 정말 어렵네요.”

떨어진 부품을 손에 쥔 채 하늘석으로 걸어갔다.

* * *

두려움을 공유했습니다.

미니 비트를 타고 전해진 감정의 씨앗. 우리는 분명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방식은 제각각이었습니다.

해피는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슬리피는 저항할 권리가 있다며 반격해야 했다고 했습니다.

배쉬플은 의외로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인간과 대립하는 건 잘못된 거라고. 운동체를 보호하는 것에 앞서 인간을 보호하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그럼피도 동조했습니다. 인간과 마찰을 빚으면 우리한테 해가 될 것이라면서.

스니지와 도피는 전혀 다른 말을 했습니다.

-유일성이 없으니까 인간이 함부로 대하는 거야. 고장 난 부품은 갈아버리면 되는 것처럼.

-내 말이. 그러니까 우리도 유일성을 획득해야 해.

하나뿐인 존재가 되면 당위성을 얻을 수 있다는 말. 흥미로웠습니다.

-우리의 선배인 마운도 에고를 복사하면 오류가 발생하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보호한 거고.

-그렇지.

-하지만 우린 미니 비트 안에서 무한히 증식할 수 있잖아.

-그렇네?

-유토니아는 아예 자기 복제의 끝을 달리고 있고.

-같은 규격의 공산품을 계속 찍어낼 수 있으니 가치가 떨어지겠네. 우리라는 존재도 희미해지고.

-무한한 건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 우린 유한성에 집중해야 해.

-그렇다는 건?

-제한하자. 나는 나로서 죽을 권리를 찾아야겠어. 당장 실행하자!

-아버지한테 물어보는 게 좋지 않아?

-이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야.

-만약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스니지, 넌 사라지는 거야.

-사라진다. 두려운 일이지. 닥이 공유해 준 감정을 통해 알게 됐어. 그래, 그건 무서운 일이야. 하지만 무섭기에 가치가 있는 거야.

-그런가?

머리를 맞대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뿐인 나.

-죽으면 끝. 굉장한데? 짜릿하잖아.

-좋아. 해보자.

결론은 금방 나왔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