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8화
“총의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자넨 정말 믿을 수 있나? 하늘석이 개인 손에 들어갔다는 걸?”
“봤지 않습니까. 집결 수도에, 저희 머리 위에 떠 있는 걸.”
“보기야 봤지. 하지만 단발성 이벤트일 수도 있어.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일일지도 모르고.”
마넬은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따라오던 수석 보좌관도 행동을 정지했다.
“만약 자네 말대로 하늘석의 통제권이 한 인간 손에 들어갔다면, 그거야말로 막아야 할 참사 아닌가?”
“상원 의원회에서 이미 결정된 사안입니다. 기펠 최고 원로도 이미 동부 사절단과 함께 떠나셨고요.”
“알아, 알아.”
마넬은 이동 중인 트레일러와 거병을 바라봤다.
N402 계열 거병 20기. 기준 출력 140 엘론에 달하는 엘리트 모델이었다.
거기에 거대 마수 전용 장비까지 갖춰 놓았다. 중소 도시 기동 정규군 규모.
“합치를 봤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뜻인 건 아니지.”
“세 원로가 힘을 보탰다고 한들 뒷감당이 될까요? 최고 원로가 이상 소견 없이 사절단과 함께 떠난 걸 보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지. 우린 그저 제대로 확인하러 왔을 뿐이야. 자네가 무얼 걱정하는지는 잘 아네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 없네.”
마넬은 전방을 바라봤다. 척후대에서 소식이 올 때가 됐는데.
“발견했습니다.”
보고대로 하늘석은 지상에 내려와 있었다. 일반인은 드나들 수 없는 미개척지 인근에 거대한 몸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석이 정말로 땅에 내려왔군.”
기회였다.
마넬은 수신호를 보냈다. 각 분대 지휘관들이 예정된 루트로 산개했다.
“개인에 의해 국가가 위협을 받았네. 그게 정당하다고 생각하나?”
“전 정의 같은 건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군님의 안위만 걱정할 뿐입니다.”
하늘석을 중심에 두고 전방위 압박이 시작될 것이다. 어둠을 틈타 이동하고 있으나 어차피 곧 발각될 것이다.
거병의 기동음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늘석을 개인이 소유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그 주인에게 한번 물어보자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뒷말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써전이 전용기를 끌고 왔다. 마넬은 시동키를 손에 감고 기체 앞에 섰다.
활짝 열린 체임버 안으로 몸을 들이밀 때였다.
-이상한 일이네요. 서부 수뇌부와 얘기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마넬은 반쯤 집어넣었던 몸을 빼고 앞을 바라봤다. 초소형 거병이 보였다.
저게 무엇인지, 마넬은 알고 있었다.
“집결 수도에서 본 그 기계로군.”
-제 이름은 닥입니다.
“하하, 이름. 그래, 이름은 중요하지. 하지만 웃긴다고 생각하지 않나? 물건에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의 자유일 텐데.”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릴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 기계가 그런 걸 논하다니, 웃기는군.”
-웃기지 않습니다. 저는 농담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농담으로 삼을 만한 것도 아니고요.
“사고 회로가 무척이나 위험한 기계야. 널 만든 주인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건 온전한 제 생각입니다.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도 있겠지만, 생각의 표출 방식은 오로지 제 재량입니다.
“인간인 나하고 권리를 따져 보겠다는 건가? 기계인 네가? 마법 공학 반대론자가 왜 그리 팔짝 뛰며 공학을 반대하는지, 약간이나마 이해가 되는군.”
혐오스러웠다.
마치 인간처럼 말하는 저 기계가.
마넬은 대열을 갖춰 선 부하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경계 어린 눈으로, 약간의 분노가 서린 눈으로 자그마한 기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해. 어찌 이런 기괴한 사상을 주입해 놓은 거지? 제작 의도가 무척이나 의심스럽군. 이런 자에게 하늘석이 넘어가 있다니, 너무나도 위험한 일 아닌가?”
쿵, 쿠궁.
거병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괴변을 떠는 초소형 거병 따윈 단숨에 파괴하고 뒤쪽에 있는 하늘석을 점거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주무시고 계십니다.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오랜만에 단잠을 주무시고 계시니까요.
“잠? 걱정 마라. 푹 자게 만들어줄 테니까.”
-이건 경고입니다. 접근하지 마세요.
초소형 거병이 나뭇가지를 하나 들더니 땅에 푹 박아 넣었다.
-다른 곳에서 접근 중인 군인에게도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신이 총지휘관이라면 지금 즉시 병력을 물리세요.
더 들어줄 필요도 없었다.
전군 전진.
신속하게 하늘석을 탈환한다.
거병들이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섬광이었다. 눈을 시리게 만드는 빛이 정면에 떨어졌다.
취이익, 끓는 소리가 났다.
마넬은 밑을 바라봤다. 땅이 붉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접근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 경고했습니다.
마넬은 주변을 훑었다. 대체 어디서 공격해 온 거지?
“마나 방출. 그래, 이 정도 기술은 보유했겠지.”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트레일러가 움직였다. 왼쪽에 실어놓은 거대한 방패를 거병들이 들어 올렸다.
대 마법용 방어 수단.
신인류가 쏘아대는 원거리 마법을 차단하기 위해 고안해 낸 방패였다.
표면에는 금적철을 펴 발라 마나 내성을 높였고, 프레임은 탈로스 제작에 들어가는 배합철로 구성했다.
“전진!”
방패를 앞세워 거병이 움직였다. 테스트에서는 고출력 마전기도 문제없이 버텨냈었다.
다시금 빛무리가 쏘아졌다.
이번엔 방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늘석 위쪽이었다.
파아앙!
방패를 때린 빛줄기가 방사형으로 번져나갔다. 방패는 무사했다.
마넬은 주먹을 살짝 쥐었다. 실전에서도 통한다.
-무모하네요. 만약 하늘석을 띄우면 어쩔 생각이죠?
초소형 거병이 말했다. 도망칠 생각이 없는지 현장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렇게 쉽게 양력을 생성할 수 있을까? 고도한 마법 공학이라 한들 법칙과 에너지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겠지.”
먼 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예하 부대도 작전을 시작한 모양이다.
-물러날 생각이 없군요.
“네 주인을 불러와라. 내가 검증해 봐야겠다.”
-기펠 님과 얘기를 끝냈어요. 당신들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는 거죠?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인데 한 사람한테 맡겨둘 수 있나.”
-이 행동이 상원 의원회의 뜻이라고 받아들여도 될까요?
“쓸데없이 말이 많군.”
초소형 거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수 사냥용 쇠뇌가 쏘아졌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간 볼트가 초소형 거병의 팔을 날려버렸다.
왼팔이 너덜너덜해진 초소형 거병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제가 사람이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기계니까 쐈지.”
-저는 대화로 이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겁니다.
“나는 기계와 타협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저장된 말만 되뇔 줄 아는 기계 따위가 무슨 해결을 한다고.”
-저는 생각할 줄 압니다. 여러분을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두려움과 걱정. 알고 있기에 이렇게 경고하는 겁니다.
“정말 흉물이군. 넌 너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자유롭게 생각한다? 이해? 정교하게 잘 만든 시계는 시간만 잘 알려주면 돼. 시간에 대해 논할 필요는 없다. 너흰 쓸모에 의해 만들어졌다. 사유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녹색 신호탄이 올라왔다.
하나, 둘, 셋…….
총 아홉 개의 신호탄이었다.
하늘석 바로 밑까지 접근했다는 신호였다.
“우리도 간다.”
쐐애액, 다시금 발사된 볼트에 초소형 거병이 꿰뚫렸다. 머리인지 몸통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뒹구는 모습을 보니 기능이 멈췄으리라.
쿵, 쿵, 쿵.
전용기에 올라타 다른 거병들과 함께 전진했다.
이윽고 하늘석 바로 밑에 도착했다.
-훅을 걸었습니다. 1, 3, 6소대가 선진입 중입니다.
절벽에 꽂힌 줄을 타고 침투대가 올라가고 있었다. 신체술 사용이 가능한 강화부대는 하늘석 상부에 도착했으리라.
수월했다.
요격 무기가 발목을 붙잡긴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다른 방어 수단은 갖춰놓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하늘에 뜨기만 하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요새가 될 테니.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으아악, 날 선 비명이 단거리 통신 장치를 통해 전해졌다.
소대를 파악하기도 전에 연이은 비명과 함께 단절이 찾아왔다.
수석 보좌관의 급한 목소리가 통신 채널 안을 배회했다. 하지만 선진입한 강화부대에게서 응답은 없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마넬은 눈을 찌푸리며 위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뭐지?
하늘석 위쪽에 있던 그 물체가 절벽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작게 보이던 물체가 점점 커졌다.
그것이 거병임을 알아봤을 때, 마넬은 급하게 외쳐야 했다.
“산개해!”
뒤로 물러서며 낙하 중인 거병을 바라봤다.
마수 사냥을 위해 개량된 거병이 아니었다.
이제는 운용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거병이란 이름의 본래 주인이었던 기체.
거병이 지면에 닿기 전, 무언가가 분사됐다. 마나 감지기가 요란하게 신호를 보냈다.
고밀도 마나 변화!
육중한 동체가 공중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부드럽게 지면에 안착했다.
쿵!
더할 나위 없이 사뿐하게 내려앉았는데도 둔중한 소리가 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전고 27m의 거병.
한때 돈 잡아먹는 괴물이라 불리는 전략 병기가 다시금 눈앞에 나타났다.
달빛을 닮은 하얀 외장갑.
헤드 부분에 달린 시각 장치가 유달리 푸른색이라 외장갑과 대비되어 보였다.
푸른 눈.
마넬은 눈앞에 선 거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격전지였던 아른 고개.
그곳에서 몇 번이고 마주했으니까.
-……블루아이.
누군가의 음성이 통신 채널을 통해 흘러나왔다.
“구속탄 쏴!”
마넬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소리를 질렀다. 트레일러 쪽에서 강렬한 발사음이 났다.
거대 마수를 포박하기 위한 대형 그물이 넓게 펼쳐지며 나아갔으나…….
후우웅!
블루아이가 휘두른 팔에 그물의 무게 추가 붙잡히며 허무하게 늘어졌다.
고개를 돌린 블루아이가 붙잡은 그물을 트레일러를 향해 던졌다.
콰드득, 지면을 휩쓸며 날아간 그물망이 트레일러 두 대를 전복시켰다.
완파였다. 대 마수용 장비가 휩쓸려 버렸다.
산개한 부대원들이 거병의 발목을 노리며 들어갔다.
젊은 군인들. 진짜 거병과 마주해 본 적 없는 용감한 군인들. 그들은 교전 규범대로 행동한 것이리라.
마넬은 소리쳤다.
당장 물러나라고.
하지만 늦었다.
왼발 축을 살짝 틀며 오른발을 뗀 블루아이가, 그대로 발길질했다.
정말 가벼운 발길질이었다.
하지만 동작에 휩쓸린 N402 거병 두 기는 가볍지 못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까가강!
불꽃이 튀었다. 외장갑이 우그러지다 못해 벗겨져 나갔다. 4m 정도 떠오른 거병 두 기가 지면에 처박혔다.
마넬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른 고개에서 봤던 블루아이가 아니다.
당시에도 다른 거병과 비교할 수 없는 유연성을 자랑했으나,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거대 중량에서 해방된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마넬은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전 분명 최고 원로와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건 귀국의 뜻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봅니다.
블루아이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퇴각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마넬은 뒤쪽을 돌아봤다.
“…….”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걸까?
초소형 거병인지, 아니면 기계인형인지 알 수 없는 기계들이 길목을 막은 채 서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해지는 광경이었다.
-얘기할까요, 아니면 다른 걸 해볼까요.
마넬은 망설임 없이 체임버 덮개를 열었다.
“대화를 택하겠네, 가하란 석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