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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497화 (497/558)

제497화

엔엔이 나뭇가지를 뚝 분질러 모닥불에 집어넣었다. 불길이 잠시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커졌다.

“가하란은 유단을 용서할 수 있나요?”

“글쎄요.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가하란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격납고 안쪽에서 블루아이를 점검하는 밀레나가 보였다.

“용서는 제가 아니라 덴스 교수의 딸 몫인데…… 그 딸조차 의식불명이죠.”

밀레나가 알려주었다. 프레나 역시 덴스처럼 코마 상태에 빠졌다고.

누구의 작품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필요에 의해 사귀고 죽이고. 정말 기계적이네요.”

엔엔이 말했다.

“사람도 비슷하죠. 물론 옹호할 생각은 없어요. 죄를 지었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죠. 단지 인간으로서 인간이 만든 법의 처분을 받느냐, 아니면…….”

“만약 로키가 인간이 되고 싶어서, 단순한 성공욕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죠?”

“타리움 수뇌부에게 판단을 맡기려고 해요. 들어보니 현 타리움은 삼파전이라고 해요. 아리엘 시장, 아르드헨 시장, 그리고 유단 학회장.”

“아르드헨과 아리엘에게 정보를 넘길 생각이군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애처럼 일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놈은 악이다, 그러니 축출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몇이나 움직일까요?”

“없겠죠. 그런 식으로 한번 찍혀 나가면 다음은 내가 될 거라는 걸 인간들은 다 아니까요. 정치적인 괴물들.”

“올바름과 효율. 두 시장님께서 적정선을 정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직접 처벌을 요구할 생각은 없어요?”

가하란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 가구거리로 가면 종종 거리극을 볼 수 있었죠. 용감한 기사가 사악한 적국의 왕을 무찌르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흔해 빠진 얘기였어요.”

타오르는 불길 위로 과거에 봤던 연극이 투영됐다.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단칼에 악을 무찌르고 행복을 가져오니까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세상은 연극이 아니에요. 윽, 하고 쓰러진 악당에게는 사실 먹여 살려야 할 수많은 식구가 있었을 거예요. 용감한 기사는 정치 놀음에 희생돼 변방의 한직으로 물러났겠죠.”

“아닐 수도 있고요.”

“네, 엔엔 님 말씀처럼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가능성은 있잖아요?”

가하란은 의족 연결부를 매만졌다.

“저는 이 대륙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어요. 법과 구조, 사회와 규율. 그런 것들은 오랫동안 이 세상과 부딪쳐 온 시장, 그리고 의회가 더 잘 알겠죠. 일은 효율적으로 해야 해요.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옳아요.”

“가하란은 어떤 역할을 자처할 거죠?”

“그러게요. 어쩌다 보니 중재인을 맡게 됐지만, 아직은 모르겠어요.”

“알고 있겠지만 회담이 진행되면 가하란은 결국 전면에 드러나게 될 거예요. 지금은 ‘석주’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겠지만.”

눈발이 점점 거세져 나뭇잎 위에도 하얗게 쌓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모든 걸 새하얗게 덮어버릴 것이다.

“자연재해 앞에서는 적아가 없다고 하죠.”

“하늘석을 그런 식으로 사용할 건가요?”

“엔엔 님 말씀대로 하늘석이 전략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다들 경계하겠죠. 억제력이 발생할 거예요. 하늘석은 그것만으로도 모든 기능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세상은 연극이 아니죠. 변수가 생길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런 걸 준비한 거고.”

엔엔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보험이라고 해둘게요. 공개하지 않는 보험.”

“보험은 안 쓰일 때가 가장 좋죠. 유지비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가는 보험이지만.”

“쓸데없는 소모전, 불필요한 전쟁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하지만 분쟁은 일어날 거예요. 제국이 모든 걸 통치하던 시절에도 영토전은 즐비했으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모든 걸 억제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감정을 거세하지 않는 이상 다툼은 일어날 것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가려 할 때, 대처할 수 없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러니 막아서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품는 것 자체도 안 된다.

모든 게 통제되는 세상이란 끔찍한 곳이니까.

“협회는 ‘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주목적이죠. 조합은 ‘틈’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저는 그런 거창한 것에 관심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즐거운 모험과…….”

다시금 밀레나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초소형 거병들과 함께 블루아이의 모듈을 살피고 있었다.

“가족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거니까요.”

“주변이 내버려 두지 않을걸요.”

“엔엔 님께 하늘석을 드리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태풍의 눈이 될 돌덩이는 사양할게요. 여기서 연구와 개발하는 것 외에는 맡고 싶지 않아요.”

“맛있는 부분만 쏙 빼서 드시네요. 책임도 같이 져주시는 건 어때요?”

“올한테 물어봐요. 하늘석의 주인이 누구인지.”

엔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앞에 주황색 점이 생겨났다.

-잊지 마요. 무한히 표류하려던 저한테 의지를 심은 건 가하란이에요. 저한테 비전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당신한테 있어요.

그 말만 남긴 채 올이 사라졌다.

“도망칠 수도 없네요.”

하하, 웃으면서 풀어놨던 의족을 다시 연결했다.

“유단 곁에는 아마 체시가 있을 겁니다. 왕국을 없애버린 기계와 인간의 몸을 빼앗아 사는 기계. 일단 전 그 둘을 파악하고 막는 것에 집중해야겠어요. 출세 이상의 것을 꿈꾸며 해선 안 될 짓을 준비 중이라면…….”

가하란은 하늘석의 숲과 숲 너머로 펼쳐진 지상을 훑으며 말했다.

“위상에서 제가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배워왔는지 그 둘에게 알려 줘야겠죠.”

바글바글 끓는 소리가 났다. 모닥불 위에 올려둔 반합을 밖으로 꺼냈다.

“알코올은 다 날아간 것 같네요.”

과일과 함께 끓인 포도주.

엔엔이 먼저 맛을 봤다.

“음, 좋네요.”

잔 두 개를 든 엔엔이 밀레나에게 걸어갔다. 가하란은 남은 술을 따른 후 휘날리는 눈을 바라봤다.

“로키. 넌 인간을 꿈꾸고 있니, 아니면 다른 걸 꿈꾸고 있니.”

이제는 사라진 다른 위상의 친구를 떠올리며, 가하란은 따뜻한 술을 입에 머금었다.

* * *

-철수했어. 그리고 파악하지 못했지만, 세이프 하우스로 의심되는 곳도 몇 군데 발견했고.

“역시 시장님. 행동이 빠르시네.”

-방해물은 치웠어. 그러니 바삐 움직여야겠지?

유단은 옷차림새를 확인한 후 비서를 불렀다. 손님을 안으로 모시라고 말한 후 눈을 감았다.

예정대로 진행되면 쓸 일이 없는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삐끗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대책을 마련해 둬야 한다.

“오셨습니까.”

정복 차림의 남자들이 회의실로 들어섰다.

“학회장님.”

대표인 게몬 아잔탄스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유단은 게몬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렇게 해가 뜬 날에 학회장님을 뵙게 되는 날이 오는군요.”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요. 학회장님께서 지난 몇 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덕에 고생이라 부를 만한 일은 겪지도 않았습니다.”

게몬이 모인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줬다. 이름과 얼굴을 대강 기억해 뒀다. 어차피 일회성으로 소모될 인간들이니 자세히 알아둘 필요는 없었다.

“정말 부친을 쏙 빼닮았군요.”

게몬이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말로나마 아버지의 흔적을 찾게 되니 기쁘군요.”

유단은 아잔탄스의 생존자들을 바라봤다. 옛 황제가 지워버린 1등 귀족, 아잔탄스.

“다른 쪽과 얘기를 끝내 놨습니다.”

“그렇다는 건…….”

“머지않아 내전이 일어날 겁니다. 아잔탄스가 새롭게 몸을 일으킬 토대가 될 거고요.”

아아, 게몬이 감격에 찬 목소리를 냈다. 다른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질감은 이용하기 쉬운 감정이라고 생각하며, 유단은 말을 이었다.

“저는 아잔탄스를 생각하면 감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품게 됩니다. 저희 가문을 지탱해 준 아잔탄스 가문. 고마운 곳이었죠. 그런 아잔탄스가 계파 싸움의 희생양이 됐을 때 돕지 못했습니다. 미안할 따름이었죠.”

“아닙니다. 학회장님은 당시 어리셨습니다. 악랄한 황제가 휘두른 눈먼 칼에 친부를 여의시기도 했고.”

게몬이 말했다.

유단은 감정을 억누르는 척, 잠시 말을 멈췄다.

“옛 황제, 아르드헨 시장에게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겠죠.”

회의실에 모인 인간들은 결의에 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저희는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학회장님께서 지원해 주신 무기도…….”

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멈추게 했다.

“거사를 치르기에 앞서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확실하게 준비하고 확실하게 움직여야지만 희생을 최소화하고 원하는 걸 손에 넣을 수 있죠.”

인간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드헨 시장이 둔을 빠져나갔습니다.”

“설마 정보가 새어 나간 겁니까?”

게몬이 당황해 물었다.

“아닙니다. 알아본 바 건강에 문제가 생겨 요양차 잠시 자리를 비운 것입니다.”

“찢어 죽여 마땅한 놈이지만 병환으로 허무하게 가는 건 안 됩니다. 우리 손으로 처단을 내려야 하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야지만 아잔탄스의 정당성을 되찾아 올 수도 있죠. 그러니 일단 준비만 해두세요. 제가 모든 정보망을 활용해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학회장님이야말로 아잔탄스의 빛이십니다.”

“아닙니다. 전 그저 과거의 빚을 갚을 뿐입니다.”

게몬과 인간들을 돌려보낸 후 서신을 작성했다. 밑 작업을 해둔 시의회에 보낼 편지.

-벤덴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어. 그 결과 시의회의 전원이 교체됐고, 시장은 목이 잘려 나갔고.

“내전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전쟁은 어디까지나 눈길을 돌리는 용으로 사용할 거니까.”

-질리지도 않아. 땅은 넓은데 좁은 영토를 점유하고, 그걸 차지하겠다고 싸워.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이 없어. 인간은 학습을 안 하나?

“아니, 학습한 결과야. 벌판에 도시를 세우는 것보단 갖춰진 인프라를 빼앗는 게 훨씬 저렴하니까.”

마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도시로 인구가 몰리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과거에는 영주의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무수히 많은 마을이 거대한 영토를 이뤘다면, 지금은 안전이 보장된 울타리 안 도심지로 인간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땅은 한정됐는데 사람은 계속 몰려든다.

밀집화가 가속되고 인구 밀도는 포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도시가 한두 곳이 아니었다.

타리움이 정식 가입한 대도시들마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외지에서 몰려든 부랑자들을 해결하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됐을 정도다.

이제는 마수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문제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소리였다.

잉여 자원을 누리지 못하는 인간들.

도시 밖 인간들은 도시 안을 꿈꾸고, 도시 안 인간들은 도시 밖 인간들을 경계했다.

체시가 말해준 시위는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예전에는 혈통이 계급을 판가름 지었다면, 이제는 사는 곳이 계급을 결정했다.

줄 세우기는 언제나 불만을 탄생시킨다.

심지에 불티가 튀는 순간,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터질 것이다.

-로키.

“응?”

-어머니를 이 땅에 다시 불러들이고 나면, 그 뒤는 내 마음대로 할게.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어. 난 그 찰나만을 원하니까.”

-실패하면…… 인간들은 두 번째 재앙을 겪게 되겠네. 들썩이는 뿌리. 그걸 구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외투를 챙겨 일어설 때였다. 체시가 다시 말을 걸었다.

-넌 정말 그거면 돼? 그다음은 생각해 본 적 없어?

“말했잖아. 난 하나의 목표만을 설정해 둔다고. 그걸 이루기 전까지 다른 건 계산상에 없어.”

-그래. 나도 어머니의 얼굴을 일단 봐야겠어. 그다음에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넌, 뭘 할 생각인데?”

-네가 원하는 걸 말하면, 나도 말해줄게.

“들으면 유치하다고 할 텐데.”

-안 비웃을게, 말해봐.

유단은 체시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뒷정리 부탁할게.”

-그럴 줄 알았어.

회의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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