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6화
잘 올라가던 승강기가 중간에서 한 번 덜커덩거렸다.
“다른 건 잘만 고치면서.”
밀레나는 승강기 밖으로 몸을 뺀 후 하늘석 상부를 향해 길게 이어진 와이어를 붙잡았다. 신체술을 사용해 줄을 당기며 가볍게 절벽을 찼다.
-그렇게 올라오시면 안 됩니다.
하늘석에 오르자마자 승강기 옆을 지키는 기계인형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얌전히 타고 올라올게.”
-5일 전, 13일 전, 그리고 15일 전에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위험하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기계인형이었다.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가하란이 입력해 둔 대로 반복해서 말할 뿐.
그럼에도 언어 학습 장치가 달린 유사 정령만큼이나 어휘가 좋아서 듣고 있으면 사람한테 혼나는 것 같았다.
“다음에 들을게, 다음에!”
천천히 따라오며 말하던 기계인형이 몸을 지탱하던 세 개의 다리를 획 돌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네 번째부터는 인증을 받기 전까지 계속 따라올 거예요.”
엔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 하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움푹 파인 골 안쪽에 엔엔이 있었다.
각종 공구를 든 작은 기계인형들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H-33이라고 했던가, 종류가 워낙 많다 보니 헷갈린다.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어때요?”
“내부 시설하고 라인 연결 중인데, 다행히 막히는 건 없네요.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가하란은요?”
“항상 있는 곳에요.”
틱, 틱.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가 발치에서 났다. 납작한 기계인형 한 대가 돌 사이에 끼어 헛발질만 하고 있었다.
들어서 빼내려는 순간 H-33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끼인 기계 주변을 빙글빙글 돌더니 돌과 돌 사이의 틈을 벌리고 끼인 기계인형을 빼냈다.
기계 학습.
가하란이 설명하길 하늘석에서 제작, 작동 중인 모든 로봇은 유토니아 커넥톰을 기반으로 배워 나간다고 했다.
그게 무엇인지 물었더니 가하란은 다짜고짜 팔을 살짝 꼬집었다. 아파서 눈을 살짝 찌푸리자,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이거야.”
이거라니?
한 번 더 물어보면 제대로 설명해 줄 것 같았지만, 어차피 깊게 들어가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을 것이다.
“엔엔 님.”
“네?”
“유토니아 커넥톰. 이게 뭔가요?”
“완전 해석 가능한 신경망 체계.”
“……아 네. 그러시겠죠.”
“원론적으로 말하면 자극에 관한 이론이에요. 우리가 분별된 오감을 지니게 된 과정. 가하란이 설계한 기계들은 기본적으로 병렬화된 회로를 갖고 있어요. 획득한 자극을 미니 비트를 통해 공유하며 무언가를 습득, 이내 해결책이라 부를 만할 걸 찾아내죠.”
“자극을 통해 습득해요?”
“뜨거운 걸 만지면 어떻게 되죠?”
“뜨겁죠. 화상을 입고.”
“그걸 어떻게 아나요?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만져봐야 알게 되죠.”
“그거예요. 기계들도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고 있어요. 오류도 많죠. 해석 불가한 정보들의 찌꺼기가 쌓여 기능 정지할 때도 있고요. 그래도 가하란이 초기에 만든 버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어요.”
끼어 있던 기계인형을 찾아내 빼낸 것도 모두 학습을 통해 이뤄낸 걸까?
“유사 정령 같네요.”
“형식은 같아 보이죠. 하지만 다른 점이라면, 유사 정령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어요. 베이스 아키텍처에 새겨진 회로들이 모든 걸 가능케 하니까요. 하지만 커넥톰은 달라요. 우리가 이해하고 있죠.”
엔엔이 벽면에 드러난 파이프에 공구를 가져다 댔다. 집중하는 것 같으니 이만 물러나야 했다.
“가볼게요.”
엔엔이 한 말을 되새김질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살얼음이 낀 강물 안쪽에도 기계인형이 있었다.
물길을 거슬러 헤엄치는 작은 기계들. 물줄기에 휩쓸려 저 멀리 사라지는 것들도 있고, 버텨내는 것들도 있었다.
의미 없어 보이는 저 모든 행동이 모여 온전한 결괏값으로 이어지는 걸까?
-밀레나!
쿵쿵거리며 뛰어오는 초소형 거병이 보였다. 머리 부분에 초록 띠가 묶여 있었다.
해피였다.
“오늘은 초록색이네.”
-멋있죠?
“그래, 멋있네.”
-아버지가 전할 말이 있대요!
“뭔데?”
해피가 몸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승강기에서 뛰어내리지 말래요.
“…….”
해피의 머리를 툭툭 건드린 후 격납고로 들어갔다. 지하로 내려오니 올이 반겨줬다.
-사절단은 떠났나요?
“방금.”
-시작됐네요.
“이제 어떻게 될지, 지켜보면 알겠지.”
-무사태평. 아무 일도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죠.
“맞는 말이야.”
통제실 바닥이 좌우로 갈렸다. 다시금 밑으로 내려갔다.
하늘석의 중심부.
카트시의 몸인 ‘켈트’가 보관된 거대한 공동은 오늘도 시끌벅적했다.
빼곡하게 채운 설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생산해 내고 있었다.
바닥에 난 홈을 따라 흐르는 백색 용융 철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미안.”
복잡해 보이는 부품을 든 기계인형이 눈앞에 서 있었다. 옆으로 비켜서자 그제야 걸음을 뗀다.
점점 더 톱니바퀴처럼 변해가는 곳이었다.
개별적인 움직임들이 하나의 거대한 동작을 일궈냈다. 설비 배치부터 기계인형들의 움직임까지, 가하란은 모든 걸 계산해 뒀을 것이다.
-사절단이 출발했대요! 저는요?
“카트시의 뜻이야. 나도 동의했고.”
허리 높이의 선반 앞에서 가하란과 마운이 얘기 중이었다. 보라색 점이 위아래로 펄쩍 뛰었다.
-저도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알아. 하지만 네가 말했듯 에고는 복사하는 데 한계가 있잖아? 네 에고가 담긴 유사 정령을 유단 곁으로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해.”
-카트시는요.
“카트시는 괜찮을 거야. 보호 시스템은 뚫릴 리 없고, 본체도 분해할 수 없을 테니까.”
가하란이 손가락으로 보라색 점을 살짝 건드렸다.
“널 못 믿는 게 아니야. 그저 위험을 최소화하고 싶었던 것뿐이지.”
-……웃긴 게 뭔 줄 알아요? 도움이 되지 못해 열받는 것도 있는데, 동시에 안전한 곳에 남게 돼 행복한 마음도 있어요. 난 역시 겁쟁이인가 봐요.
“먼저 나서는 겁쟁이가 어디 있어. 그쪽 일은 카트시한테 맡기고, 너는 나를 좀 도와줘. 네 도움이 절실해.”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죠.
보라색 점이 사라졌다.
밀레나는 손을 흔들며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마운은 괜찮은 것 같네.”
“섬세한 친구라 앞으로도 잘 달래 봐야지.”
선반에 놓인 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야 너와 카트시를 믿지만, 여전히 불안하긴 해. 유단이 카트시를 파괴하면 어쩌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을 동원해 에고를 손상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
가하란이 장갑을 벗으며 말했다.
“내가 가진 기술과 하늘석의 장비로도 카트시의 본체에 데미지를 주지 못했어. 외관을 둘러싼 청철이야 쉽게 녹일 수 있겠지만, 그 안에 든 금속은 지금의 기술로는 파괴 불가능해.”
“확신에 찬 말을 들어도 마음이 안 놓여. 적진 한가운데에 카트시가 홀로 가는 거니까.”
“위험에 노출되는 일은 없을 거야. 설령 있다고 해도 내가 보호할 거고.”
가하란이 동쪽 설비 쪽을 바라봤다. 밀레나도 그 눈길을 좇아 고개를 돌렸다.
초소형 거병들이 생산 라인에 붙어 있었다. 가하란이 초기에 만든 일곱 거병이 아닌, 하늘석에서 새로이 제작한 애들이었다.
몸은 나뉘어 있지만 관장하는 사유체는 하나라고 했다.
옆을 지나가던 초소형 거병과 눈이 마주쳤다. 거병이 움찔하더니 재빨리 라인으로 뛰어갔다.
“유토니아가 그러더라. 누나가 아직 어렵다고.”
“내가? 내가 왜?”
“나야 모르지. 나 없을 때 혼낸 적 있어?”
“설마.”
저 멀리 있는 유토니아들이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가 동시에 밀레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시 한데 모여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진지한 대화를 해봐야겠네.”
“듣는 걸 좋아하는 애니까 재미난 얘기를 해주면 금방 마음을 열 거야.”
“마음이라.”
밀레나는 검지로 머리를 톡톡 치며 물었다.
“근데 몸은 여러 개지만 관리 주체는 하나라며. 저렇게 여럿이 모여 떠드는 건, 혼잣말하는 거라고 봐야 하나?”
“통합 사고인 유토니아가 하나 존재하지만, 그 안에서 각기 나뉜 성향이 있나 봐. 나와 대화할 땐 대표 격인 유토니아가 나오는데 자기들끼리 떠들 땐 각자의 역할이 있는 것 같아.”
“혼자 하는 소꿉놀이, 혹은 연극 같은 거네.”
“그런 걸 수도 있겠네.”
“귀엽네.”
다가가 말을 걸려고 하자 놀란 새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쓱해진다. 헛기침 한 번 하고 다시 가하란 곁으로 돌아왔다.
“친해지는 건 다음에 해야겠어.”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다가가 봐.”
가하란이 감각기를 손에 낀 채 손가락을 몇 번 움직였다. 바닥에 흐르는 백색 철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졌다.
“밥 아직 안 먹었지?”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서 먹자. 도시락 준비해 놨어.”
* * *
“……안에만 있었더니 바깥 날씨를 몰랐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몸을 틀어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밀레나가 등을 떠밀었다.
“눈 보면서 먹으면 좋지, 뭐. 옛날 생각도 나고.”
누나와 격납고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서 귀 짧은 토끼 무리가 오도카니 지켜보다가 이내 사라졌다.
“하늘석 말이야, 어떻게 저런 애들이 사는 걸까?”
“전송탑이 끌어들인 마나에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다른 위상, 그러니까 50년 전 하늘석에서도 저 애들은 있었어.”
“50년 전? 새끼들이 큰 건가?”
“아니. 50년간 살아온 거 같아. 어쩌면 그것보다 더 긴 세월을 여기서 보내 왔을지도 모르고.”
“……여기서 자주 보는 하얀 개구리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걸까?”
“아마도?”
가하란은 젖은 가지를 주워 한데 쌓았다.
“젖어서 불은 안 붙고 연기만 날 텐데.”
밀레나가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불로 태우면 괜찮아.”
“아, 그게 있었지.”
외력으로 몸 안에 스며 있는 하얀 불꽃을 끄집어냈다.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손끝에 피워낸 후 젖은 가지에 옮겼다.
하얀 불길이 단숨에 가지를 집어삼켰다. 1m 정도 불길이 치솟다가 이내 일반적인 불꽃색으로 변했다.
끽, 끽!
하늘석 숲속을 안방 삼아 뛰어놀던 루루도 모닥불 곁으로 다가왔다. 밀레나가 루루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한동안 안 보이더니.”
“이쪽 친구들하고 잘 지내는 것 같아.”
바구니를 열고 음식을 꺼냈다.
음식을 덜고 한입 먹으려고 하는데, 오른쪽 무릎이 시큰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밀레나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날씨가 이러면 아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금속이니까.”
바지를 걷고 의족의 결합부를 살짝 풀었다.
“안에 들어갈까?”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밀레나를 향해 살짝 웃어 보였다.
“금방 괜찮아져. 그보다 이거 먹어봐. 후추를 듬뿍 넣어서 코가 찡할 정도로 맵지만, 나름 매력이 있어.”
음식을 한 입 먹은 밀레나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가끔은 생각해. 요리사적 기질과 모험심은 안 어울리는 거 같다고.”
그러면서도 덜어낸 음식을 꼭꼭 씹어 먹는 밀레나였다.
“엔엔 님!”
밀레나가 반색하며 손을 들었다. 엔엔이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내며 격납고 안으로 들어섰다.
“식사 아직이죠?”
“네. 이제 먹으려고요.”
“이것 좀 드세요. 가하란이 만들었어요.”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엔엔이 갸름해진 눈으로 음식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먹어봤어요.”
“……아.”
“밀레나도 가만 보면 못된 구석이 있어요.”
엔엔이 옆에 앉았다.
가하란은 긴 연기를 뿜어내는 모닥불을 보며 말했다.
“모인 김에 말씀드릴게요. 하늘석을 움직일 겁니다.”
엔엔과 밀레나가 동시에 쳐다봤다.
“카트시가 타리움에 도착하는 시기에 맞춰, 근처로 이동할 거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